270화
“좀, 많이 놀라운데. 그러니까…. 내 아버지가 여기서, 왕이 되셨다는 거야?”
“네. 아시다시피 블루 드래곤 일족 자체가 저희 평범한 바다 수인들과 비교되지 않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들 계시죠. 그래서 이 왕국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드래곤님들은 모두 다 귀족입니다. 그중에 블랙드래곤과 블루드래곤의 혼혈이신 용왕님은 몇십 년 전에 왕좌에 오르셨고요. 아, 이렇게 설명할 게 아니라 당장 왕궁으로 가시죠.”
경비대장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더니 해마를 몰고 있던 해마부에게 왕궁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탄 것 같지 않은 귀신같은 승차감으로 해마차는 왕궁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고 순식간에 거대한 궁 앞에 도착했다.
“저기, 저분이 용왕님의 아들….”
“네에?! 허억!”
궁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에게 경비대장이 뭐라 뭐라 속닥거렸다. 블루를 힐끗거리던 경비병은 펄쩍 뛰어오르더니 거대한 문을 곧장 개방했다. 잠깐 사이에 어마어마한 신분 상승을 한 블루를 경비대장이 조심스럽게 궁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옆에 있는 심복인지 금붕어 똥인지 모를 실비아를 곁눈질하고 다시 블루에게로 돌아갔다.
“아유, 지금 생각하니까 이게 다 운명이 아닌가 싶군요? 원래 오늘은 제가 연차였거든요. 이상하게 출근이 하고 싶더라니, 왕자님을 모시려고 아마도 신께서 이렇게 기회를 주신 게 아닐까….”
경비대장은 손을 싹싹 비비며 블루의 옆에서 감언이설을 속삭이기 바빴다. 그는 옆에 선 실비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얼떨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실비아는 경비대장의 태도고 뭐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멍하게 걸었다. 일방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던 날백수 블루가 급격한 신분 상승을 하다니. 그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무슨 놈의 세상이 이렇게 불합리하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왕자가 된 블루에게 시비 걸 처지가 못 되는 실비아는 분노를 애써 조절하며 묵묵히 그들의 곁을 따랐다.
“아유, 참. 왕자님은 용왕님을 닮으셔서 이목구비도 어쩜 이리 완벽하신지!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요.”
경비대장이 아주 그냥 연인처럼 블루의 곁에 딱 붙어서 속살거리는 바람에 실비아는 어느새 저 뒤로 밀려났다.
블루는 얼떨떨한 상황에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뒤늦게 그녀가 멀어진 걸 알아채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실비아, 같이 가자.”
기품있는 목소리에 실비아의 뺨이 붉어졌다. 분명히 아쿠아리움에서 물개 노릇을 하던 그 블루와 껍데기는 같건만, 뒤돌아서서 관대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서 순간 제왕의 기운이 흘렀다- 라고 속물근성 가득한 실비아는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쇤네가 어찌…는 아니고. 흠흠, 구경하느라 뒤처진 거야.”
순간 비굴하게 허리를 숙일 뻔한 실비아는 헛기침하고는 블루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에 경비대장이 화들짝 놀라며 실비아에게 관심을 보였다. 인간 하녀인 줄 알고 무시 중이었는데 왕자의 소중한 이라면 큰 무례를 저지른 셈이었다.
“아이고. 옆에 계신 분은…!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왕자님과 한 쌍의 해마처럼 잘 어울리십니다.”
“흥! 됐거든요.”
경비대장의 뒤늦은 아부에 실비아는 콧방귀를 끼며 무시했다. 아까 무시할 땐 언제고 블루와 손 한번 잡았다고 저렇게 태도가 싹 바뀌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손이 발이 되도록 아부하는 경비대장과 함께 걸어가던 둘은 화려하고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직감적으로 이 문 너머에 부모님들이 있음을 알아챈 블루가 긴장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럼 들어가실까요?”
경비대장이 문손잡이에 손을 대자 블루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잠깐, 잠시만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네.”
몇십 년 만에 보는 부모님이었다. 어린 그를 놔두고 떠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블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보통의 인간들처럼 부모님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다. 혼자서도 둥지에서 아무 탈 없이 잘 살았고 편지도 나중에는 드문드문 왔지만, 한동안은 꼬박꼬박 받았기에 외롭지도 않았다. 실비아를 만나기 전, 원래 그의 마음은 그랬다.
그가 만약에 둥지에서 계속 살았다면, 부모님이 유희를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세계로 와서 실비아를 만나 여러 가지 인간의 감정을 배우게 된 후로, 조금씩 그의 머리에 인간을 닮은 감정이 차올랐다.
‘왜…. 왜일까?’
어째서 부모님은 자신을 놔두고 떠난 것일까? 저기 놀이공원에서 노는 인간들은 저렇게 자식을 살뜰하게 챙기는데, 왜 나의 부모님은 그러지 않았을까. 인간을 닮은 나약한 감정이란 건 알았지만 그 생각을 멈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실비아가 동행한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 부모님을 찾아 심해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실비아랑 가까이 지내다 보니 뭔가…. 너무 인간같이 굴고 있잖아. 이런 감정을 인간들은 서운함이라고 불렀던가? 서운하다니, 그것참 우스워…. 아버지가 이 나라의 왕이 되신 걸 보면 별 탈 없이 잘 살고 계셨던 것 같으니, 서운한 티 내지 말아야겠어.’
“블루야?”
실비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블루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고는 곧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같이 들어가 줄래?”
“음….”
실비아가 잠시 망설였다. 이 문을 열면 블루의 부모님이 계신다는 건데, 손을 잡고 들어갔다가는 영락없는 즉석 상견례였다. 드래곤들도 상견례 같은 게 있는진 모르겠지만, 인간의 상식으로는 좀 꺼려졌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블루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래?”
“뭐?!”
아니, 눈치 없는 블루에게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실비아는 눈앞의 블루가 자신이 아는 그 드래곤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었다.
블루는 실비아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더니, 경비대장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드래곤어로 속삭였다.
『부담스럽냐구. 그냥 네 표정이 그래 보이길래….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아, 그런 건 아냐. 음, 손은 잡지 말자. 물 많은 곳에 와서 그런가. 손에 땀이 차서 원.”
블루는 왜 부담스러워하는지 이유는 모르고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래도 표정을 알아챈 게 어딘가. 둥지에서 은둔 백수처럼 지내던 블루가 이 정도로 발전하다니.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 얠 가르친다고 손가락도 없어지고, 압박사도 당하고 별걸 다 했는데 표정 하나 살피지 못해서야 헛고생이지.’
실비아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실비아가 괜히 손에 땀이 차서 못 잡겠다는 변명을 하니 블루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손을 거뒀다. 딱 이 정도가 좋았다. 여기서 더 눈치가 생기면 훗날 곤란한 일이 있을 때 빠져나가기 힘들 수 있으니까. 가령 실비아가 말하던 ‘친구’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란 걸 알게 된 후에, 줄곧 친구라고 말해왔던 루카와 무슨 관계냐고 따져댄다거나 하는 상황 말이다.
실비아의 미소에 블루가 영문을 몰라 하며 함께 미소 지었다. 양옆에 선 수인들이 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문을 열자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알현실이 나타났다. 높은 천장과 화려한 샹들리에…. 그리고 동양풍의 옷을 입은 신하들?! 동서양이 혼란스럽게 섞인 알현실의 모습에 실비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퓨전이네. 게임 개발할 때 예산이 부족했나….’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 실비아는 몇몇 신하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밖에 있는 수인들과 달리 이곳의 수인들은 눈빛 자체가 달랐다. 기운을 보아 수인들 중에도 능력이 출중한 자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긴 소맷자락 바깥으로 드러난 손에는 물갈퀴가 달려있기도 했으며, 이가 말도 안 되게 뾰족하고 길게 나와 있기도 했다.
그때 구경에 여념이 없던 실비아의 귓가에 낮고 품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야. 이리 가까이 오거라.”
알현실의 가운데, 상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블루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언어로 불렀다. 실비아가 블루의 이름을 지어주는 계기가 된 용언으로 된 이름이었다. 지력을 높여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걸 보니 블루가 평소에 쓰는 드래곤어랑은 또 다른 언어 같았다.
“오느라 고생했지?”
제일 위에 앉은 이라면 용왕, 즉 블루의 아버지일 터. 그는 드래곤어가 아닌 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유희를 오래 다니기도 했고, 이 왕국 전체가 제국어를 쓰니 그도 제국어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블루와 똑 닮은 얼굴에 검은색과 하늘색 머리카락이 옴브레 헤어처럼 섞여 있는 남자가 화려한 왕관을 쓴 채 상석에 앉아있었다. 블루의 아버지인 용왕이었다. 블루가 어색해하며 곧바로 다가가지 않자 그가 초조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올라오거라. 어서.”
블루는 머뭇거리다가 못 이긴 척 어색하게 계단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는 모습을 지켜보며 양옆에 선 수인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분위기를 보니 상하관계가 엄격한 제국과는 달리 이 심해 도시, 아니 왕국은 군신의 관계가 좀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실비아를 내버려 둔 채 부자 상봉은 한참을 이어졌다. 뭐라 뭐라 조그맣게 속삭이고, 어깨를 토닥이고 하는 것 같은데.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심심해진 실비아가 바닥에 있는 무늬의 개수를 세고 여기저기 힐끗거리며 구경하는 와중에 용왕이 그녀를 불렀다.
“우리 아들이랑 같이 온 인간 아가씨. 이름이 실비아, 맞지? 우리 아들을 데려와 줘서 고맙네.”
“아, 네. 딱히 데려온 것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