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블루의 본체화를 위해 둘은 넓은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만 한 너른 공터가 나타났고, 블루가 본체화를 했다. 어제와 달리 사지가 멀쩡해진 실비아지만 혹시나 또 안전불감증이 어쩌고 하면서 시스템이 염병할 데드엔딩을 선물할 수도 있었다. 불안했던 실비아는 저번처럼 셀프 결박플을 했다. 상태 이상에 걸렸을 때와 달리 생생해진 몸에 좀 더 자신감이 생긴 실비아는, 가슴 쪽이 좀 더 두드러지도록 꽈악 묶었다.
‘엄청 큰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몸 아닐까….’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블루를 바라보자 그가 커다란 감색 눈을 둥그렇게 휘며 입을 열었다.
『어제보다는 덜 귀엽지만, 이 모습도 정말 예쁜 거 같아.』
“섹시하지?”
『섹시?』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은 듯 블루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실비아는 입을 가리며 조그맣게 웃은 뒤 다소 신랄한 말을 내뱉었다.
“응, 섹시. 꼴린다는 말과 동의어야. 이 모습은 간단히 말하자면 섹시하고 꼴리는 모습이지.”
『이 모습이 섹시한…? 모습이야? 응, 그래. 실비아, 너 정말 꼴린다.』
블루에게 몹쓸 단어를 하나 가르쳐준 실비아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기도 잠시, 블루가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친 후 땅을 박차고 올랐다. 쉬익-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다 내음이 강해졌다. 블루는 실비아가 묶여있는 두 손을 모은 채 빠르게 바다 위를 비행했다.
“끼-룩?!”
지나가던 갈매기가 갑작스러운 블루의 등장에 깜짝 놀라 물고 가던 새우맛 과자를 떨궜다.
“와아, 바다 색깔 정말 예쁘다!”
새우잡이 배를 탈 때 바다를 건너긴 했지만, 하늘 위에서 보는 바다는 또 남달랐다. 실비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틀어 아래를 구경했다. 블루는 그녀가 보기 좋도록 손을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그렇게 패러글라이딩하듯이 스릴을 만끽하던 실비아는 점차 추워져서 오돌오돌 떨며 블루의 손에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를 소중히 감싸 안고 가던 블루는 조금씩 속도를 줄이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바다 한가운데에 계곡이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웅장한 폭포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실비아, 이제 입구에 다 왔어. 아래를 봐.』
“어디….”
아래로 향한 실비아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어쩐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 같더니, 바다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웬만한 섬과 비슷한 크기의 구멍으로 바닷물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싱크대의 수챗구멍 같다고나 할까. 눈을 가늘게 떠 구멍을 관찰해봤지만, 어찌나 깊은지 바닥을 알 수가 없었다.
‘싱크홀 같은 건가? 어휴, 들어갈 엄두가 안 나는걸.’
없던 심해 공포증이 저절로 생겨날 만큼 오싹한 광경이었다. 손바닥에 달려있는 작은 몸이 부르르 떨자 블루가 귀엽다는 듯 목을 울리며 웃었다.
『무서워? 저기로 들어가야 해.』
“좀 무섭긴 해.”
『나만 믿어.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리고….』
블루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실비아를 묶은 끈을 긁적이자 끈이 순식간에 다 끊어졌다.
“어머머! 뭐 하는 거야?”
『이건 풀고 내려가자.』
실비아가 황급히 제 몸을 더듬었다. 옷은 하나도 안 찢어지고 끈만 떨어져 나갔다. 블루의 능숙한 끈 풀기에 실비아의 입에서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 쪽은 조금 찢어져도 감당 가능한데, 여러모로 애석한 일이었다.
“쩝, 근데 끈은 왜 풀어야 해?”
『구멍이 점점 좁아질 거야. 그래서 인간으로 변해서…. 아! 일단 들어가자!』
블루가 커다란 눈을 옆으로 굴리더니 실비아를 쥔 손을 부드럽게 오므렸다. 그러곤 날개를 접더니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마치 번지점프를 하는 것 같은 조절 없는 하강에, 블루의 오므린 손 틈 사이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으아악! 뭐야! 왜 갑자기 내려가!”
『쉿. 문지기가 쫓아오고 있어.』
오므린 손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실비아의 귓가에 끼에엑-! 하는 정체 모를 괴물의 울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뭐, 뭐야?”
『도시 입구를 수호하는 문지기야. 그냥 가까이 다가오는 존재는 다 공격하고 본다고 들었어.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바로 내려가자.』
빠르게 낙하하는 블루의 뒤를 커다란 크기의 조류 괴수가 쫓아오고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사방이 어두워지고 주변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멍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괴물의 울음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구멍으로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짝 추격해 온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괴물의 섬뜩한 울음소리에 실비아의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끽, 끼에엑!”
“어떡해! 공격당하겠어. 그냥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아냐. 구멍이 점점 좁아지고 있잖아.』
실비아는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블루의 말대로 구멍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아까 힐끗 본 바로는 괴수는 블루와 맞먹는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아, 혹시…!
생각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블루가 실비아를 놔버린 것이다. 놓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손을 털어 실비아를 떨궜다. 엉덩이가 시원해진 실비아의 머릿속에 불과 어제 겪었던 추락사의 악몽이 떠올랐다. 믿었던 블루가 스스로 저를 놔버릴 줄이야! 배신감에 치를 떨며 실비아가 고래고래 쌍욕을 내뱉었다.
“이 개-! 새! 끼이이이이! 엇!”
『뭐?』
인간화를 한 블루가 추락하던 그녀의 몸을 낚아채듯 안고는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버리려는 게 아니었구나. 민망해진 실비아는 입을 꾹 다물고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블루는 잠시 위로 고개를 들더니 쫓아오는 괴수를 확인하고 다시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실비아를 꽉 끌어안은 그는 곧 사람 두 명만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키에에엑!”
몸집이 큰 괴수는 둘을 쫓다가 좁아진 구멍 입구에 쿵-하고 몸을 부딪치더니 아쉽다는 듯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괴수의 소름 돋는 울음소리가 동굴 속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블루가 그녀를 보듬으며 날개를 펄럭였다.
『실비아, 괜찮아? 저놈 때문에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구멍이 좁아져서 인간화를 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고 들었었거든.』
“그래도 그렇지! 대뜸 날 놔버리면 어떡해.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많이 무서웠어?』
어, 이게 무슨 일이지? 늘 애처럼 칭얼거리는 게 일이었던 블루가 그녀를 반대로 달랬다. 이런 모습은 낯선데, 얘가 뭘 잘못 주워 먹었나. 머쓱해진 실비아는 투덜대는 걸 멈추고 가만히 블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속눈썹이 촘촘하게 달린 아름다운 감색 눈이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다봤다. 블루는 놀란 실비아를 배려해 아까와 달리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갔을까,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제 도착했어.』
“아…. 으응!”
감미로운 속삭임에 실비아는 파드득 놀라며 블루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휘젓자 단단한 지면이 밟혔다. 킁킁대며 주변을 부유하는 공기를 들이켜니 바다 짠내가 약간 날 뿐, 지상과 다를 것 없이 호흡할 수 있었다. 실비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 정말 네 말대로 지상이랑 다를 게 없네. 여기가 정말 바닷속 맞아?”
『주변을 둘러보면 심해 도시가 맞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블루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실비아도 뒤늦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곤 확실히 이곳이 바닷속이 맞단 걸 깨달았다. 사방은 어떤 막으로 뒤덮인 듯 바다를 경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경계 너머는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시커먼 심해가 보였다.
‘바닷속 맞구나. 대박, 이런 곳은 처음이야.’
실비아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고개를 위로 꺾었다. 천장에선 아까 들어왔던 구멍을 통과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지상의 태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참 깊숙이 내려왔는데 어떻게 저렇게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걸까?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저 구멍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덕에 심해 도시는 여타 지상의 도시들처럼 밝았다.
그들이 착지한 곳은 심해 도시의 바깥으로 높은 지대였다. 의례 심해 도시이니 해초와 산호가 있을 거라고 상상했건만, 의외로 지상에서 볼 법한 평범한 나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를 가진 식물들이 있어 신비로움을 유지했다. 그녀가 넋을 놓고 주변을 구경하는 사이 블루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잡았다.
『실비아, 저기가 내가 말한 심해도시야. 바로 들어갈까?』
“으응. 근데 저 도시 안전할까?”
실비아가 불안한 눈으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도시는 제국에서 본 건물들과 달리 특이한 양식의 지붕들이 많이 보였다. 저걸 기와집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오기 전에 상상한 대로 동양풍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무래도 바닷속으로 들어온 건 처음인지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상에서야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지만, 살다 살다 바닷속까지 들어올 줄이야. 던전 공략 몇 개 했다고 우쭐해 있었는데 괜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블루는 손을 잡아당기는데도 걸음을 옮기지 않고 버티는 실비아를 보며 재밌어했다.
『괜찮아. 난 바다에 익숙하니까. 그리고 이 도시에서 드래곤보다 센 존재는 없어. 내가 알고 있는 한.』
“으응….”
블루의 말에도 실비아는 안심하지 못했다. 오염된 기운이 이곳 어딘가를 바꿔놓았다고 생각하니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던전에 들어오면 뜨는 메시지가 안 나타나네? 이 도시 전체가 던전은 아닌가 봐. 그럼 아직까진 안전한 걸까.’
던전에 진입할 때마다 보이던 제1장, 제2장 어쩌구 하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블루의 부모님은 오염되지 않았을 수도 있단 것. 실비아는 용기를 내어 따뜻한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녀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블루가 귀엽다는 듯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러곤 기습적으로 상체를 숙여 부드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