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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67화 (267/372)

267화

역하렘 여주라서 괴로워하던 때는 까맣게 잊고 실비아는 블루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눈앞에 누가 있는지 인식하길 바라며 머리카락을 살짝 쥐어뜯어 봤지만, 많이 피곤한지 블루의 눈꺼풀엔 미동도 없었다.

가슴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던 실비아는 끝끝내 반응 없는 블루에게 지쳐 눈을 감았다. 자는 사람에게 치근덕거리다가는 게임이 노 프모가 된다…. 그 꼴을 시스템이 두고 볼 리 없을 터. 거기다가 아직 공략조건이 완수되지 않았기에 괜히 수면 중에 건드렸다가 배드엔딩을 하나 더 수집하게 될 수도 있었다.

‘에잉…. 나도 잠시 쉬어야겠다.’

『실비아! 이제 일어나야지!』

실비아는 제 몸을 격하게 흔드는 손길에 번뜩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든 거지? 점점 맑아지는 시야에 옷을 단단히 차려입은 블루가 보였다.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걸 보니 방금 씻은 모양이었다. 역시 블루는 자는 실비아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쉬움에 쩝, 입맛을 다신 실비아는 입가에 말라붙은 침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촉촉하네? 욕실에서 씻었어?”

『응. 마법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씻고 싶어서.』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거린 실비아가 구겨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는 사이 블루가 문 앞에 섰다. 빨리 나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실비아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직진남처럼 들이대길래 웬 떡인가 했더니 동정남이 맞긴 맞구나. 이런 좋은 기회를 저렇게 눈치 없이 날려버리다니. 정말 등신 같다.’

『얼른 나가자. 배고파. 밥 먹고 바다로 가야지.』

“알았어. 신발 좀 신고.”

숙소 일층으로 내려간 둘은 간단한 브런치 세트를 시켜 끼니를 해결했다. 이른 점심을 먹는지라 숙소 일층의 식당엔 손님이 몇 없었다. 찹찹거리며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데, 대뜸 사장이 다가오더니 NPC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이 마을엔 바다와 관련된 오랜 전설이 있지.”

“블루야, 이거 되게 맛있어. 한입 먹어 봐.”

『와, 진짜네. 엄청 맛있어.』

무시하고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으려니 사장이 헛기침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바다 너머엔 전설이 있다네.”

“후, 어떤 거요?”

두 번 무시하는 건 유교 국가 출신으로서 양심에 찔렸다. 대충 대꾸해주자 사장의 안색이 밝아졌다.

“바다 깊은 곳에 수인들이 사는 신비한 도시가 있다는 말. 그곳에 들어가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우리 할머니가 소녀일 적에 해변에서 거북이 등딱지가 달린 인간을 봤다고 하던데. 그 사람이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더군.”

“오…. 어떤 소리요?”

입에 달걀노른자를 묻힌 실비아가 호기심을 보이며 되물었다. 거북이 등딱지라니, 거북이 수인이 지금 갈 <심해에 잠긴 도시>에 있는 걸까.

“자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이야. 세상의 진리를 알고 싶다면 바다를 건너 자신을 찾아오면 다 알려주겠다는 말을 했다지.”

“그게 뭘까….”

실비아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사장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뒷짐을 진 채 물러났다. 뭐하나 지켜봤더니 하모니카를 꺼내 조그만 무대 위에서 을씨년스럽게 부는 게 아닌가. 삘릴리삐삐-. 축객령 같은 연주에 입맛이 떨어진 실비아는 빈 접시를 놔두고 일어섰다. 저 사장은 여타 게임의 ‘터치하면 단서를 흘리는 마을주민’ 같은 존재로 보였다.

‘저 말을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어 보이네. <심해에 잠긴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이 다 끝나면 거북이 수인을 찾아봐야겠어.’

숙소 밖으로 나온 그들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던전에서 신기 위해 조그만 상점에서 튼튼한 신발을 구입한 실비아는 바다로 출발하려다가 멈칫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대장간>을 한번 사용해 보는 건 어떨까? 블루를 데리고 으슥한 숲 뒷길로 간 실비아는 인벤토리에서 <대장간>을 불러냈다.

『실비아, 왜 여기로 온 거야?』

“잠깐 할 일이 있어.”

블루 앞에서 이런 걸 불러내도 될까? 잠시 걱정했지만 이미 노파가 되는 꼴도 보여 줬으니 뭘 보여줘도 얘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실비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미니 모루를 바닥에 놓은 뒤 터치했다. 뾰로롱, 소리와 함께 숲속에 조그만 대장간이 하나 생겼다. 모루가 커지고 기타 등등 제련할 수 있는 시설이 나타났다. 뭔가 지나치게 본격적이라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장간이네.』

“어? 이게 뭔지 알아?”

예상대로 블루는 갑자기 나타난 대장간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아니, 블루의 표정은 예상보다 더 차분하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이 도구가 뭔지도 아는 것 같았다. 도통 모르는 거 천지였던 애가 대장간을 알다니, 놀랄 노 자였다.

『응. 책에서 본 적 있어.』

“오, 네가 살던 둥지에도 쓸 만한 책이 있었구나.”

모르는 거 천지길래 대체 둥지에서 무슨 책을 읽었나 했더니 그래도 쓸 만한 책이 있긴 했나 보다. 대충 대꾸한 실비아는 모루를 문질렀다. 요술램프 문지르듯 슥슥 문지르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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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나 방어구를 올려놓으세요. 씨앗과 약간의 노동력을 소모하여 강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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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를 다시 볼까.’

실비아는 인벤토리를 다시 켜 씨앗과 무기, 방어구를 확인하기로 했다. 블루는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 허공을 휘젓는 실비아를 구경했다.

노엘의 씨앗은 저번 신전 집무실에서의 미치광이 짓거리와 기력이 쇠할 정도로 해댄 섹스 덕에 39개나 남아있었다. 루카의 씨앗도 18개. 그리고 방어구는 미역 원피스와 튼튼한 여성용 갑옷이 있었다. 무기는 보나 마나 덜렁 망치 하나.

‘그러고 보니 그동안 무기랑 방어구에 신경을 안 썼어. 아니다, 신경 못 쓸 수밖에 없었구나. 루카의 할당 던전인 <안개에 싸인 보물섬>을 갔다 오고 나서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났으니까 말이야.’

비밀상점에서는 무기, 방어구를 팔지 않았으니 돈이 있어도 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허접한 방어구를 입고 던전 공략을 하면서 점점 체력이 빨리 닳고 쉽게 지친다고 생각했었는데, 때마침 <대장간>이라는 아이템이 나타나다니 다행이었다.

실비아는 우선 망치를 모루에 올린 뒤, 어떤 씨앗을 쓸지 고민했다. 혹시나 해서 노엘의 씨앗 조각을 꺼내 망치에 가져다 대봤지만 ‘강화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만 뜰 뿐, 어떻게 강화된다는 설명이 없었다.

‘강화해봐야 안다는 건가. 현생이었으면 공략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되는 건데. 이건 실전이니 원.’

무기랑 방어구를 더 좋은 걸로 구할 순 없는 걸까? 기본 템에다가 씨앗을 쓰기는 아까운데. 씨앗은 할 때만 생기고, 한 번에 너무 많이 하면 상태 이상에 온종일 시달리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실비아가 망치와 미역원피스를 바라보며 고심하는 표정을 짓자 바위에 앉아있던 블루가 말을 걸었다.

『뭐 하려는 거야?』

“아…. 이건, 음. 간단하게 말해서 무기랑 방어구를 강화하는 마도구를 손에 넣었는데. 강화재료가 귀해서 신중하게 하려고 고민 중이었어.”

『그 미역같이 생긴 걸 강화 하게? 지금 꼭 해야 하는 거야? 심해 도시에 좋은 무기랑 방어구가 있을 수도 있는데.』

예상치 못한 말에 실비아가 놀라며 손에 든 방어구를 떨어트렸다.

“뭐?! 그 도시에 무기 상점이 있어?”

『상점은 아니고. 거기에 솜씨 좋은 수인족 장인들이 머무른다고 들은 적이 있어. 강화 재료가 귀하다며. 기왕이면 좋은 걸 얻어서 강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세상에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섹스를 하면 씨앗이 생기긴 하지만 실비아의 몸뚱이는 하나뿐. 허접한 아이템에 씨앗을 소모할 순 없었다. 쪼렙 때 받은 목도와 난닝구에 강화속성을 처바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실수를 저지를 뻔한 것이다.

‘무기와 방어구가 잘 나오지 않길래 기본템에서 강화하는 시스템인 줄 알았더니, 블루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좋은 걸 구할 수도 있겠네. <심해에 잠긴 도시>가 중간거점 역할을 하는 걸까?’

실비아는 우선 펼쳐놨던 <대장간>을 터치해 다시 조그맣게 만든 뒤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나머지 꺼내놨던 아이템들도 모조리 넣었다. 새 무기를 얻는 게 먼저일지 몬스터 처치가 먼저일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기본템으로 좀 더 버티다가 거기서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얻어서 업그레이드해야지!’

그다음, <심해에 잠긴 도시>로 가면 어떤 식으로 게임이 진행될지 알 수 없으니 마지막 세이브 지점을 이 마을로 잡아두기로 했다. 여차하면 데드엔딩을 겪고 나서 이 마을로 돌아와서 재정비하면 되니까 말이다.

‘던전 안에선 안전이 확실하지 않는 한 세이브하지 말자.’

실비아는 시스템을 켜 게임을 저장했다. 이 미친 게임은 점점 저 혼자서 발전을 하는지 후반부로 갈수록 보통 게임이라면 예산의 문제로 절대 넣지 못했을 온갖 게임들을 다 섞기 시작했다. 난이도도 이상하게 조절되는 것도 물론이었다. 하여튼 진짜 뭐 이딴 게임이 다 있는지!

아직까지는 몬스터를 무찌를 때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번 던전에서는 다를지도 몰랐다. 혹시나 공략난이도가 훅 올라가거나 한다면 일단 최대한 버텨보기로 했다. 그래도 안 되면 아깝지만, 씨앗을 이용해 착용템들을 업그레이드해야겠지.

“좋아. 네 말대로 그 도시에서 무기를 사도록 하겠…. 잠깐, 화폐가 제국이랑 똑같아?”

『인간의 화폐는 그 도시에서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음, 확실하진 않지만…. 장인들의 부탁을 들어주거나 원하는 걸 구해다 주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으음, 그렇지. 너도 그 도시에 가본 적 없으니까…. 그래. 일단 출발하자.”

블루도 심해도시에 가본 적이 없고 구전이나 편지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니, 정보가 확실하진 않을 터였다. 어쩐지 던전에 가면 주야장천 고생길이 펼쳐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차라리 돈을 달라고 했으면 좋겠건만, 다른 RPG 게임들처럼 퀘스트를 수행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드래곤이 되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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