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교황 후보라…. 그 생각에 이르자 노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역대 교황들은 대부분 공식적으로는 연인이 없었다. 비리로 임명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자신은 신탁을 받지 않았는가? 실비아는 그 신탁의 주인공이고 말이다. 이러면 문제가 어떻게 되는 건지.
‘법을 뜯어고치는 건 어떨까. 그러려면 더 열심히 맡은 바 일을 해내야겠지. 그래야….’
노엘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무래도 오늘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신관 교육을 받았기에 규율대로 정해진 삶만 살아가던 노엘은 점점 스스로 생각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를 스스로 서게 하는 자가 영웅’이라는 신탁은 아래가 발기한다는 망측한 뜻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성장을 뜻하는 거였지만, 노엘이 제멋대로 오해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실비아를 만나기 전과 달리 주체적으로 제 삶을 바꾸기로 마음먹게 된 노엘의 밤이 깊어갔다.
“아버지! 정말 아니라니까요. 제 말 좀 믿어주세요.”
아리센트 가문 저택. 카를 단장의 개인 서재에서 루카는 화가 단단히 난 그와 독대 중이었다. 카를은 듣기 싫다는 듯 신문에 고집스레 시선을 내리고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제 아들이 처음으로 관심 가진 여자가 노파라니, 당장 실성을 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더 얘기하기 싫으니 나가거라. 난 지금 살펴볼 일이 많아. 안 그래도 피곤한 아비를 계속 달달 볶을 셈이니?”
“그게…. 아버지가 오해하고 계시니까 그러죠. 저도 계속 변명해야 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단 말입니다!”
“쯧!”
카를은 신경질을 내며 보던 신문을 덮었다. 앞에서 난동 부리는 아들 때문에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한참이었다. 안락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위로 꺾었다. 더는 듣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간을 문지르던 카를 단장의 굳건한 입매가 한숨과 함께 벌어졌다.
“여기서 더 변명하겠다면 내 소중한 아들이 실성한 거로 간주할 수밖에. 내 눈으로 실비아란 여자가 노파란 걸 확인했는데 네 눈엔 여전히 사랑스럽다니까 말이야. 대체 누가 미친 건지, 한번 끝까지 따져볼까?”
“그게 아니라! 후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듯한 아버지의 모습. 루카는 오늘은 더 대화할 수 없다고 판단 내렸다. 그는 아예 회전의자를 뒤로 돌려버린 아버지의 뒤통수에 대고 공손하게 인사한 후 제 방으로 돌아왔다.
‘미치겠네, 정말.’
아버지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고, 마나가 있고 이종족이 있는 한 모든 대륙인들은 사물을 이해하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하고많은 이상한 일 중에 실비아가 무리한 다음 날엔 수척해진다는 건, ‘와, 이런 일도 있구나!’하고 넘어갈 정도의 일이었다.
아버지도 아마 남 일이었다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다름 아닌 아들의 일인지라 저렇게 분노하시는 거겠지. 차라리 실비아를 소개한 후에 그녀가 그리되는 모습을 보았다면 아버지도 ‘별, 특이한 체질도 다 있구나.’하면서 허허 웃어넘기셨을 터였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간단히 몸을 씻은 후 우울한 낯으로 와인을 홀짝였다. 형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로 부모님은 한동안 깊은 시름에 잠겨 계셨다. 부모님을 다시 웃게 만들어드리고 싶어서 밤낮으로 노력한 끝에, 요즘 들어서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웃는 낯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어이없는 오해로 아버지의 심기 불편한 모습을 오랜만에 보게 되다니, 기가 막혔다. 나중에 오해를 풀면 웃고 넘어갈 촌극이 되겠지만 한동안은 언짢게 지내실 걸 생각하니 무척 속상했다.
‘한동안은 아버지 앞에선 실비아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야겠어. 후,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혹시나 계속 설득하려고 시도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며 자유롭게 내버려 두고 있던 아버지가 자신의 혼사 자리를 알아보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에 실비아가 돌아오면 그때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만날 자리를 만들어서 오해를 풀면 되겠지. 그러면 되는 건데….
‘네, 당장은. 꿈도 이뤄야 하고 아까 말한 대로 우리는 좀 더 천천히 알아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지금 우린 무슨 사이야?’
‘이런 사이.’
루카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실비아에게 청혼했을 때 했던 애매한 대화가 생각나서였다. 관계를 정립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넘어갔던 그녀의 말. 로맨틱한 분위기에 정신이 빠져 더 따져 묻지 않고 그냥 넘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했던 말들은 하나같이 언제라도 무를 수 있는 허울뿐인 약속이었다.
만날 때마다 좋아하는 기색에 그녀와 저 사이엔 행복한 미래만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오늘 마주쳤었던 노란 머리 신관 때문에 그 확신이 어그러졌다. 실비아의 태도로 미뤄 보아 둘은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날 만나기 전에 만났던 남자인가? 최근에는 쉬는 날마다 거의 나랑 만났었잖아. 다른 남자와 만날 틈이 없었을 텐데.’
실비아의 말로는 노란 머리 신관과 던전 공략을 함께 했다고 했었다. 그럼 그 당시 좋은 감정을 가지다가 어그러진 사이인 걸까? 아니면, 설마….
불길한 가정을 떠올린 루카는 잔에 남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 아니겠지. 실비아가 워낙 착하고 마음이 여린지라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오해를 산 것일 터. 워낙 귀엽고 매력적인 여자인지라 자신이 괜히 불안해하는 걸지도 몰랐다. 노란 머리 신관이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거고, 착한 실비아는 대놓고 거절하기가 뭣해 받아 주고 있는 것일 수도….
루카는 애써 희망적인 가정을 하며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렸다. 와인을 다시 따르던 그는 노란머리 신관에게 정신이 팔려서 신경도 안 썼던 하늘색 머리 드래곤이 뒤늦게 떠올랐다. 같이 던전을 간다고 했었나? 드래곤이면 드래곤답게 도마뱀처럼 하고 다닐 것이지, 잘생긴 인간 꼴로 돌아다니다니. 괜히 불안해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잘생겼다는 말은 취소. 루카는 그냥 사람처럼 생긴 블루 드래곤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실비아는 그냥 던전 안내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설마 그 도마뱀이 실비아에게 개수작을 부리진 않겠지?
루카는 블루의 개수작을 실비아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괜한 걱정을 이어가며 와인을 홀짝였다. 술기운이 살짝 돈 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어차피 어떤 남자가 꼬이든 저보다 잘난 남자는 없으니 상관없으려나….
한동안은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사업에 집중해야 할 듯했다. 실비아와의 밝은 미래를 위해선 우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일 순위였으니까. 루카는 아버지가 혹시나 실비아를 끝까지 반대한다고 해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든, 부모님이 반대하든, 그는 실비아가 없는 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 * *
“아함! 완전 개운하다.”
어제 일찍 잔 덕에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실비아는 기지개를 켜며 제 몸을 살폈다. <영광의 상처>는 완전히 사라지고 생생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얼른 몸을 씻고 나온 그녀는 아직 꿈나라에 빠져있는 블루의 어깨를 흔들었다.
혹시나 자는 사이에 수상한 짓을 시도하진 않았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건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블루는 실비아만큼 머리가 썩어 있는 애가 아니었기에 자고 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멀쩡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곤 다시 블루를 흔들었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 깊이 잠들어 있던 블루의 눈매가 점점 찌푸려졌다. 제 몸을 흔드는 걸 견디지 못한 신비로운 감색 눈이 눈꺼풀 사이로 드러났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눈을 끔뻑거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실비아…. 일어났구나.』
“어머머!”
그가 살짝 몸을 비틀자 이불이 스르륵 내려갔다. 세상에나, 고맙게도 블루는 옷을 홀딱 벗고 자고 있었다. 보기 좋게 그을린 상반신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드래곤들이 다니는 헬스장이라도 따로 있는 걸까. 근육이 어찌나 잘 발달했는지 트레이너가 있다면 누군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디 하나 부족함 없이 꽉 들어차 있는 옹골진 상체에 실비아의 안압이 높아졌다. 곧 코피가 쏟아질 것 같아 코를 부여잡고 있는데, 블루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갔네. 어제 그 모습, 귀여웠는데…. 아쉬워라.』
“으응. 어젠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됐었대도. 이제 원래대로 돌아와야지.”
얼떨결에 블루의 품에 안겨 눕게 된 실비아가 콧김을 뿜으며 대답했다. 블루는 방긋 미소 짓더니 스르륵 눈을 감았다.
『더 자고 싶어…. 어제 네가 자는 걸 계속 지켜보다가 늦게 잠들었더니…. 싸움도 너무 힘들었고, 아직 피곤해.』
“더… 더 잘까?”
『응….』
실비아는 은근슬쩍 블루의 생가슴에 기댔다. 블루의 상의 탈의는 처음 보는 거였다. 이것 참 산삼보다 귀하구나. 블루는 비몽사몽인지 실비아가 두툼한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드래곤이 피곤함도 느끼는 생물이었구나. 좀 의외였다.
좀 더 자신을 알아채 주길 바란 실비아는 이불을 살짝 들어 몸을 들이밀었다. 발을 살짝 놀려보니, 아쉽게도 사각거리는 바지의 질감이 느껴졌다.
‘얼레? 바지를 챙겨입고 있네. 홀딱 벗고 자야 안 답답할 텐데, 땀띠 날라….’
작게 혀를 찬 실비아는 괜히 어지럽게 흐트러져있는 하늘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블루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는 정말 피곤한 듯 실비아가 옆에서 성가시게 구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적극적으로 들이대더니, 참나. 밥상 다 차려놨으니 떠먹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리 지쳤다지만 기절한 듯 자는 걸 보니 기분이 영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