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한편, 실비아네 아파트에선 세비스가 끙끙 앓고 있는 중이었다. 오한이 들 때부터 심상치 않다 싶더니 집에 도착하고 나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열이 들끓었다. 눈앞이 핑핑 돌고 몸을 온전히 가누기가 힘들어서 물 한 번 마실라치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렸다. 저번에 성장했을 때보다 비교도 안 되게 통증이 심한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세비스는 주방에서 겨우 찬물을 마신 뒤 힘없이 기어가 자기 방 침대에 드러누웠다. 노엘을 봤을 때부터 몸 상태가 심상찮았는데, 옥장판 사장과 실비아의 대화가 결정타였다. 눈치를 보아 보통 사이가 아닌 게 분명했다.
침대에 드러누운 그의 눈가로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둘째치고, 포기하려고 생각해도 포기는커녕 점점 감당 안 되게 커지는 제 마음이 힘겨워서였다.
‘포기하고 싶다고 쉽게 포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탁을 받아서 제 주인을 돕는 것까지가 자신이 할 일. 더는 선을 넘고 바라면 안 되는 건데, 계속 주제넘은 기대를 하게 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건 다 배부른 생각이지.’
그의 머릿속에 도망치듯 떠날 때 봤던 황폐한 늑대 왕국이 떠올랐다. 세비스는 평소엔 즐겁고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굴었지만, 가끔 밤에 혼자 잠들 때마다 떠나온 늑대 왕국을 떠올리며 베갯잇을 적시곤 했다. 실비아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티 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계속 제 고향을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한다고 답이 나오는 일은 아니니까. 확실히 실비아 님은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성장하셨어. 옆에서 도와주라는 게 신탁의 내용이었으니 과한 참견을 할 수는 없어.’
세비스는 처음보다 많이 강해진 실비아의 기운을 떠올렸다.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던전 공략이랑 상관없는 일만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녀는 많이 성장했다. 신탁대로 옆에서 가만히 돕기만 하면 된다는 게 아직도 미심쩍긴 하지만, 한낱 늑대 수인일 뿐인 자신이 고고한 신의 뜻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실비아 님은 알아서 잘하고 계시니 이대로 계속 옆에서 돕기만 하면 돼. 문제는 나지. 내 마음.’
세비스의 눈가가 다시 붉어지더니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고 너무 싫은데 통제가 되지 않았다. 왜 이런 별거 아닌 감정 때문에 이토록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까마득한 심정이 되는 걸까.
더 어이없는 건, 이렇게 한탄하는 사이사이에도 실비아가 돌아왔을 때 어떤 맛있는 요리를 해줄까, 혹시 이 몸살 후에 성체가 되면 그녀가 무척 놀라고 기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웃기고 슬프게도 몸이 커질수록 실비아를 향한 마음도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후우….”
세비스는 짓무른 눈가를 꾹꾹 누르며 이불을 더 깊이 덮어썼다. 더는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유 없이 이 정도로 고통스러운 건 높은 확률로 또 몸이 자라려는 거였다. 이번이 마지막 성장통이길 바라며, 그는 몸을 한껏 옹송그렸다.
“…이상한 일이네.”
야심한 밤. 노엘은 샤워를 마친 뒤 가운을 입은 채 자신의 방 소파에 앉았다. 그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낮의 일을 떠올렸다. 비상 연락망인 목걸이가 급하게 두 번 울리길래 외제마를 몰아 정신없이 신전으로 향했다.
막상 대신관님에게 찾아가 여쭤보니 비상 연락망을 건드린 적이 없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저녁 회의까진 시간이 남았기에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 봤지만, 실비아는 이미 사라지고 광장을 복구하는 인부들과 황궁 마법사들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붉은 머리 남자가 생각난 노엘이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자리를 떠난 뒤인 모양이었다. 그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 실비아에게 직접 듣고 싶었건만. 하필 그 순간에 목걸이가 처음으로 오작동을 하다니. 그는 내일 신전의 전속장인에게 찾아가 목걸이를 교체해달라고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실비아 님은 지금쯤 던전으로 가셨으려나? 그 몸으로 어떻게…? 누구랑 간단 거지. 세비스는 몸이 아파서 집으로 갔고, 그 붉은 머리 남자랑도 던전을 갈 것 같진 않았어.’
같이 갈 사람이 없을 텐데, 그 몸으로 혼자 갈 리도 없고…. 그 순간 노엘의 머리에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었던 하늘색 머리의 드래곤이 떠올랐다. 실비아를 외치면서 다가오기에 그녀와 아는 사이인가 했었는데, 그 후로 정신이 없어서 까마득히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 드래곤과 함께 간 것일 수도 있겠군. 그녀는 신탁의 영웅이니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믿지만, 신의 뜻에 반하는 오염된 기운으로 잘못되진 않을까, 순간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함께 있어 줄 수가 없으니 노엘은 자신의 방법대로 그녀를 돕기로 했다. 그는 기도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절절하게 기도를 읊조렸다. 실비아가 무사히 던전에서 돌아오길, 그녀의 앞날에 축복만이 함께하길. 그리고 조금의 이기심을 담아, 그 앞날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이건…!”
땀 흘리며 기도하던 노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느끼고 눈을 떴다. 비록 하체는 진작에 타락했지만, 신의 사랑을 받는 고위 신관인 노엘의 기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성스러운 빛이 기도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절절한 기도에 신이 응답한 것이다.
빛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 노엘은 그녀가 무사히 돌아올 것이란 예언을 들었다. 그와 함께 무슨 일이 있든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도 머릿속을 울렸다. 빛이 곧 사라지고 노엘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이 응답했으니 실비아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이해해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인 걸까.’
설마 실비아가 이상한 짓이라도 저지른단 걸까. 살인, 방화, 납치…. 온갖 위험한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실비아가 사회가 용납하지 못할 몹쓸 짓을 저지른다면? 그렇다면 노엘은 그녀와 야반도주할 수도 있었다. 탈옥을 도운다거나 해서 말이다.
이미 신탁대로 실비아에게만 서는 자가 된 노엘로선, 세속의 도덕관념과 법률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집어던질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왠지 그런 일을 이해하라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순간 낮에 봤던 경우 없는 붉은 머리 남자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설마…. 아닐 거야.’
이어지려는 망상을 단호하게 물리친 그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이불을 덮었다. 노엘다운 한껏 절제된 자세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부자리를 흩트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붉은 머리의 부자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국 내에서 워낙 유명한 가문인지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중년 남자가 입은 황궁의 인장이 새겨진 하얀 로브는 마법사단장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붉은 머리에 마법사단장이라면 떠오르는 가문이라곤 아리센트 가문뿐이었다.
붉은 머리 남자가 어느 가문 사람인지도 이제 알겠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아리센트 가문의 저택을 찾아가 실비아와 묘한 관계로 보였던 그 남자를 추궁하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이해하라는 신의 말씀이 이걸 말하는 걸까? 한낱 신의 종일뿐인 내가 그 심오한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싶지만…. 우선, 실비아 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믿고 기다리자. 그녀가 던전에 간 사이에 뒤를 캐는 건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니까.’
노엘은 일단 실비아를 믿고 그 남자를 찾지 않기로 했다. 당장 실비아에게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던전에 들어간 그녀는 한동안 연락할 길이 요원할 터였다. 오염된 기운으로 둘러싸인 던전은 보통 안쪽 세상과 별개의 세상이 되는지라 바깥세상과 차단된다. 그러니 전서구로 실비아에게 연락한다고 해도 한참 후 던전에서 돌아와서야 대답이 돌아오겠지.
더 걱정해봤자 소용도 없고 이제 잘까…. 다시 반듯하게 자리를 잡은 노엘은 곧 넘치는 상념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떴다. 실비아가 자신의 저택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아들일까 싶은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 스스로가 온전히 결정한다면 아마 틀림없이 저택으로 이사를 오겠지만, 자신처럼 신탁을 받은 세비스가 변수였다. 예전보다 어른스러워진 세비스는 겉으론 무감해 보였지만, 실비아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날카로운 직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으니까.
그런 이를 실비아 옆에 계속 둬도 되는 건지. 아이 같을 때야 별생각이 없었지만, 오늘 본 모습은 매우 불안했다. 어째서 신께선 실비아를 볼 때마다 스스로 서게 만들어 놓고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미간을 찌푸린 노엘은 평소엔 말하지 않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짜증… 헙.”
그는 순간 자신이 중얼거린 혼잣말에 화들짝 놀라 입을 굳게 닫았다.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지 않던가. 이런 마음을 가져서야 교황 후보로서 실격이었다.
물론 엘베우스 신은 예외적으로 원수는 주먹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몬스터도 아닌 멀쩡한 늑대 수인에게 주먹을 쓸 일은 없었으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왜 이런 과격한 생각을…!’
실비아와 관련된 일이면 원래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교황 후보 중 하나로서 규율을 철저히 따르는 신실한 신관이었을 뿐인 자신이 질투도 하게 되고 가끔 못난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나쁜 생각을 하고 난 후에는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한 마음도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상하지, 정말. 교황 후보인 내가 이렇게 세속적인 감정을 가져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