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실비아가 비실비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힘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방은 하나였지만 카운터에서 고집을 부려 침대를 하나 더 배치했다. 평소의 실비아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트윈베드….
다른 남주들의 경우엔 실비아가 반폐인이 된 꼴을 보면 그냥 쉬라고 해줄 테니, 적당히 설레하며 옆에서 같이 자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블루는 좀 위험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벌써 자게? 아직 저녁인데.』
블루가 아쉬운 얼굴로 창문 밖을 힐끗거렸다. 그는 놀이동산에서 지내다가 인간 세상에 제대로 나온 게 처음이라서 호기심이 넘쳤다. 낯선 인간 마을에 왔으니 한껏 귀여운 모습(?)이 된 실비아랑 마을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대화도 더 하고 싶었는데 벌써 자겠다니 아쉬웠다.
블루의 풀이 죽은 모습에 실비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옆으로 누운 그녀는 눈꺼풀을 힘없이 깜빡거리며 블루를 응시했다.
“나도 더 놀고 싶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은걸. 내 모습을 봐. 지금 상당히 힘들어 보이지?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놀자…. 정말 죽을 것 같아.”
실비아가 힘없이 팔을 풀썩거리자 블루의 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끔뻑거리는 실비아 곁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얘가 또 뭘 하려고…. 실비아가 불안한 눈초리로 블루를 훑었다.
“왜?”
『그냥. 실비아 자는 거 지켜보고 나서 나도 잘래.』
뭘 또 자는 걸 지켜본다는 걸까. 만사가 귀찮은 실비아는 맘대로 하라는 듯 대충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귀에 메시지 알림음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씨, 뭐야. 자려고 하니까 웬 메시지가 뜬담. 이불을 꽉 움켜쥐며 눈을 뜬 그녀는 황당함에 입을 멍하니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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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블루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자!
- 블루는 지금 무척 심심한 상태.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몸으로 블루와 뭘 할 순 없잖아. 그러나 몸뚱어리가 엉망이라도 실비아에겐 입이 남아있지! 심심해하는 블루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자. 열심히 말해줄수록 그는 즐거워할 것이다.
성공 보상 : 블루의 호감도 5 상승
실패 시 : 블루와 야간산책 이벤트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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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퀘스트가 다 있어? 블루가 내 손주도 아니고, 옛날이야기를 해주라니. 상태 이상 때문인가 별일이 다 있구나. 엥? 호감도가 상승하네. 실패하면… 밤 산책이라니.’
피곤해 죽겠는데 이런 퀘스트라니. 살짝 짜증 나긴 했지만, 아직 블루의 호감도가 풀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선 놓치기 아까운 퀘스트였다. 하필 할머니가 손주한테 할 법한 이상한 퀘스트로 호감도가 오르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니겠나.
실패 시에는 블루와 야간산책 이벤트 발생이었다. 움직이기 싫었던 실비아는 꼭 퀘스트를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놈의 시스템은 어떻게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지. 한숨이 나오지만 하라니 어떡하겠어, 해야지.
띠링. 퀘스트가 뜨고 나서 블루의 머리 위에 절반만 찬 상태 바가 하나 떴다.
‘으휴, 저 바를 풀로 채우란 건가. 가지가지 한다. 정말 또 말하기 지겨운 단어지만 가지가지 해!’
실비아가 피곤에 지친 눈꺼풀을 억지로 부릅떠 블루를 바라보자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실비아, 이제 잠 다 깼어? 나 심심해.』
“알았어.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줄게.”
실비아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뒤 블루를 불렀다. 그가 귀를 쫑긋거리며 가까이 붙어 앉았다.
『정말? 들을래.』
“옛날 옛날 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실비아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어디서 들은 전래동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의욕 없이 대충 시부렁거리기를 한참, 블루의 눈썹이 점점 힘없이 내려가더니 상태 바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을 열어 아무 말이나 떠들던 실비아는 무심결에 블루의 머리 위를 살폈다가 상태 바가 위험수위까지 내려간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우! 안 돼. 이러다간 꼼짝없이 야간산책행이로구나.’
성의 없는 구연동화에 블루는 지겨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라 머릿속 세포들이 각자 따로 노는 상태였다. 이런 그녀가 어떻게 활기차게 재미난 이야기를 하겠는가.
이거 어쩌지, 상태 바를 풀로 채울 방법이 없을까? 진땀을 흘리던 실비아는 잊고 있던 스킬을 하나 떠올렸다. 맞아, 그게 있었지. <헛소리를 온 누리에 진지하게>!
광역기로 업그레이드까지 해놓고 아예 쓸 생각을 안 했다니. 그 스킬이야말로 이 퀘스트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실비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잠깐, 사람들에겐 이 스킬이 통한단 걸 이미 확인했지만, 신비의 종족 드래곤에게도 과연 스킬이 통할까? 실비아의 얼굴이 다시 거무죽죽해졌다.
아냐, 한번 해보자. 실패해도 호감도가 감소하거나 배드엔딩이 찾아오는 게 아닌, 야간산책이라는 몸이 살짝 고통스러워지는 사소한 페널티가 있을 뿐이니 한 번 시도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가상의 이야기를 하는데 스킬을 쓰는 거니까 블루를 속인다는 죄책감은 없지. 참신한 이야기가 생각이 안 나서 큰일 난 줄 알았더만, 사용하면 입에서 헛소리가 줄줄 나오는 스킬을 까먹고 있었다니. 이거 딱 여기다 쓰면 되겠네! <헛소리를 온 누리에 진지하게> 사용!’
신이 난 실비아가 속으로 스킬 사용을 외치자, 잠시 후 실비아의 머릿속은 뭐 이상한 거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강제로 일어난 뇌세포들이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이야기들을 여기저기 뇌 주름에서 파내어 꺼냈다. 점점 뇌가 살아나는 걸 느낀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이 얘긴 좀 별로였나?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줄게.”
『응. 다른 이야기 해줘.』
감색 눈이 묘하게 멍해졌다. 아니, 그녀의 눈에 멍해진 걸로 보였다. 스킬의 효과가 먹힌 걸까? 자신감을 얻은 실비아는 뇌세포가 건네준 얘기를 대충 조합해서 입 밖으로 다다다다 내뱉었다.
“원 리틀, 투 리틀, 쓰리 리틀 인디언. 포 리틀, 빠이브 리틀….”
썩은 뇌세포가 활성화되어봤자 활성화된 썩은 세포일 뿐. 상태 이상인 현 상태에선 그랬다. 그녀는 주인만큼 팍 상해버린 뇌세포들이 대충 배웠던 외국 동요를 주절거렸다.
동요를 듣던 블루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어서 더 말해보라는 듯 실비아를 재촉했다. 상황에 안 맞는 이상한 동요를 흥얼거리는 데도 좋아하다니? 스킬의 효과가 엄청난 듯했다.
『실비아, 더 해봐! 너무 잘하는데?』
블루의 칭찬에 실비아는 하찮은 노래를 불렀음에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 으쓱할 건 아닌가? 그래도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법.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인 실비아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 그래? 그럼….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블루에게 스킬이 먹혔다고 확신한 실비아는 어디서 들은 고리짝 동요와 잡다한 이야기는 죄다 끄집어내서 말하기 시작했다. 현생에서 들은 노래들을 부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팔을 들썩거리며 율동도 첨가했다. 효과가 확실히 있긴 있는 게, 블루의 상태 바가 점점 차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역시 스킬의 힘이 굉장한 걸까?
“팅팅팅팅 탱탱탱탱, 팅팅탱탱….”
『너무 재밌다. 다른 이야기도 해줘.』
실비아는 내친김에 대학 때 했던 술 게임 구호를 율동과 함께 신나게 했다. 왜 이야기는 안 하고 이상한 술 게임 구호를 외치냐고? 어차피 스킬 때문에 무슨 헛소리를 해도 상관없으니까! 역시 스킬의 덕인지 블루의 상태 바가 거의 다 차오른 게 보였다.
마무리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어쩌고저쩌고 신나게 말하고 나니, 블루의 머리 위 상태 바가 풀로 차오르며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빵빠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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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블루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자!> 성공. 블루의 호감도가 5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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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성공이다. 재미난 이야기가 아닌 이상한 동요만 실컷 주절거렸지만, 어떻게 됐든 성공하면 된 거지.’
블루의 머리 위에 있던 상태 바가 스르륵 사라졌다. 이제 야간 산책을 피할 수 있게 된 실비아는 만족한 표정으로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실비아, 자는 거야?』
“응. 계속 떠들었더니 너무 피곤하네…. 이야기 재밌었지? 두고두고 기억하라고…. 그럼, 잘자.”
실비아의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감기고 몸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방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그녀를 내려다보던 블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갖은 애를 쓰면서 자신을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블루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딱 봐도 많이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는데 칭얼거리는 자신을 위해 이런저런… 아무튼 알 수 없는 노래에 신기한 춤까지 추다니.
사실 실비아의 스킬은 블루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헛소리를 온 누리에 진지하게>라는 스킬은 성공 확률이 50프로인 스킬. 블루는 지금 인간화를 한 상태이지만 본체는 집채만 한 드래곤이므로 스킬이 먹힐 확률이 더 낮았다. 거기다가 실비아 자신도 상태 이상에 걸려있었으므로 스킬의 성공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했다.
안타깝게도 스킬이 먹히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뜨지 않는 바람에 완전히 착각한 것이다. 결국, 블루의 상태 바가 차오른 이유는 스킬이 먹혀서가 아니라, 그녀의 노력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해서였다.
블루는 실비아의 숨소리가 완전히 고르게 변할 때까지 가녀린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인간을 모른 채 100년 동안 둥지에서만 지내던 드래곤 블루는 실비아를 만나면서 점차 여러 가지 감정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이와 함께 하는 기쁨,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격.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그의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실비아는 블루의 손길을 받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완전히 잠이 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블루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뒤 조그맣게 속삭였다.
『잘 자 실비아. 오늘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