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아직 바다는 아니구나…. 잠깐, 생각해보니 심해도시에 쉴 곳이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네. 도시 전체가 오염되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 말이야….’
원래는 바로 심해도시로 가려고 했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여러 가지 데드엔딩을 막기 위해서 사전 점검을 하고 전투 불능 상태인 <영광의 상처>도 해제된 뒤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실비아는 목을 가다듬고는 위를 보며 외쳤다.
“크흠, 블루야! 잠깐만 어디 쉬었다 갈 곳 없을까? 이대로 바로 던전에 가기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
“블루야악!! 쉬었다 가자고옥!”
대답 없는 블루의 모습에 불길해진 실비아는 목청껏 소리쳤다. 비행에 집중하던 블루가 그제야 고개를 내려 그녀를 살폈다.
『응? 알았어.』
블루는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조그만 산꼭대기의 너른 바위 위에 착지한 그가 손을 내리자 실비아가 셀프 결박을 풀었다. 그녀는 한 바퀴 구르며 낙법을 써 땅에 무사히 착지했다. 두리번거려 보니 주변은 본 적 없는 낯선 지역이었다. 그동안 본 거라곤 바닷가 마을과 수도, 그리고 노엘의 별장에 있는 시골 마을 말고는 없으니 당연했다.
“블루야. 너희 부모님들이 계신 곳으로 바로 가긴 무리일 것 같아. 바닷속이기도 하고 어떤 곳인지 너도 잘 모르잖아. 내 몸 상태도 완전 엉망이고.”
『안 그래도 쉴 곳이 없나 찾고 있었어.』
“오…. 그렇다면 다행이야. 여기서 묵을 곳을 찾아볼까?”
실비아의 말에 블루가 고개를 주억였다. 날개를 접고 한껏 옹송그린 블루의 몸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눈부시게 빛나던 몸이 점차 작아지더니, 곧 익히 보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커다랗던 몸이 조그매지는 광경이 신기해 홀린 듯이 보던 실비아는 순간 몸이 기우뚱했다.
“어어!”
『조심해.』
그런 그녀의 허리를 블루가 단단히 받쳐주었기에 다행히 무릎이 깨지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허리를 감싸는 따뜻하고 단단한 손길에 실비아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아, 아니! 아니야. 설레지 않았다고! 상태 이상으로 비주얼이 노파인 상태에서 로맨스 분위기를 조성하다간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라도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해.’
그러나 망할 놈의 허벌가슴은 블루가 노파인 자신의 모습을 맘에 들어 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상시 개장됐다. 그녀는 망토를 깊숙이 눌러쓰며 제 발그레해진 얼굴을 숨겼다.
마을로 내려온 둘은 오래 지나지 않아 숙소를 하나 잡을 수 있었다. 실비아가 돈을 내려고 했으나 블루가 그동안 일일 알바를 한 돈을 모아놨다며 자랑스럽게 숙소비를 지불했다. 투숙객이 많아 방이 하나인 곳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배정된 방에 들어온 실비아는 도와주겠다는 블루를 극구 뿌리친 뒤 혼자서 목욕했다. 이제 공략도 코앞에 왔겠다, 원래라면 목욕을 도와주겠다는 블루를 뿌리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도움에 선한 의도가 담긴 건지 위험한 욕망이 담긴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더 그랬다.
“휴우.”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실비아는 천천히 제 몸을 씻었다. 몸을 씻는 사이사이 불안함에 문 쪽을 힐끗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도 목을 꺾어 뒤를 보는 바람에 담이 온 그녀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혼자 캑캑거렸다.
‘휴, 왠지 나 혼자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망할 놈의 시스템! 왜 이상한 메시지를 보여줘서는.’
겨우 목욕을 마친 실비아가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블루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실비아. 너 오늘 정말 예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나중에 이런 모습이 된다니…. 믿기지가 않아.』
“어? 어어….”
실비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한 뒤 욕실 문을 열어놨다. 목욕하란 뜻이었는데 블루는 싱글벙글거리며 가만히 있었다.
“안 씻어?”
『난 마법이 있잖아. 잊었어? 너도 내가 씻겨줄 수 있었는데!』
아, 간이샤워기처럼 작동하는 블루의 목걸이를 잠시 잊었다. 그래도 마법이 익숙하지 않은 실비아로선 급할 때가 아니면 직접 씻는 게 더 개운한 것 같았다. 그녀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대답했다.
“아아. 그 목걸이? 다음에는 부탁할게.”
실비아는 머리를 말리며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했다.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여기저기 쑤시는 건 많이 가라앉았다. 얼굴이 아직 덜 회복돼서 문제지. 그동안은 <영광의 상처>가 정말 노파처럼 보인다는 걸 애써 부정하고 살았는데, 카를 단장의 반응을 보고 나니 제 꼴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히 알게 됐다.
‘루카의 부하들은 이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 그 사람들도 내가 멀쩡할 때를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런가?’
루카의 부하들은 자신과 루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기에 그냥 많이 수척해졌나보다, 하고 넘어갔던 게 아닐까 싶었다. 반대로 카를 단장은 원래 모습의 저를 짧게 보기도 했고,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후줄근한 노파라는 사실에 충격을 입고 자세히 안 보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이 모습이 아무렴 진짜 노파 같으려고.’
실비아는 제 후줄근한 얼굴을 매만지며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카를 단장을 생각하다 보니 아까 블루에게 무언가 한참 얘기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실비아는 블루의 곁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카를 단장, 아니 그 중년의 인간 마법사 있잖아. 그분이랑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응? 아.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어. 그냥 앞으론 뭣도 모르고 제국 상공을 날아다니지 말아라, 날개 함부로 꺼내지 말아라….』
블루의 말에 의하면 카를 단장은 대뜸 선제공격을 한 게 미안했는지 아들 같다며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투머치토커답게 기승전 자기 자랑이 한참 이어져서 나중에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고. 나이가 몇 살이냐 묻기에 100년 넘게 살았다고 했더니, 아들 같다는 소리는 취소하겠다고 했단다.
“너 언제 그렇게 제국어를 익힌 거야. 며칠 새에 그렇게 대화할 정도로 늘다니 대단하다.”
『난 별로 대답한 게 없는걸?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다 말한 거야.』
“그랬구나….”
뭐 보나 마나 블루의 성격상 안 중요한 얘기다 싶은 건 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실비아가 심드렁하게 답하는데 블루의 말이 이어졌다.
『미안하다면서 다음에 제국에서 마주치면 인사나 하자고 하던데? 유희 잘하라면서 어깨도 토닥여줬어.』
“그렇구나. 되게 호탕한 분이셨네.”
얘기를 들어보니 카를 단장은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 다음에 만났을 때 노파가 아닌 걸 설명하면 자신에게도 사과할까? 실비아는 순간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카를 단장이 오해해주는 게 고마운 상황이었다. 오늘 마주친 노파와 실비아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나중에 혹시나 다른 남주랑 있다가 카를 단장과 마주쳐도 곤란한 일이 안 생길 것 아닌가.
‘망할 놈의 게임이 던전도 공략해야 하고, 남주도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을 공략해야 하고, 심지어 알바까지 해야 해, 이젠 들킬까 봐 피해 다니기까지. 대체 이게 죽어서 뭔 고생이냐고.’
살아서 못 한 일을 죽어서 10배 넘게 하는 기분이었다. 실비아는 잠시 시스템을 켜 게임 몇 일차인지 확인했다. 고작 62일 차…. 그동안 아주 심하게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라니, 놀라웠다.
‘휴, 엄청나게 빡센 두 달이었어. 그래, 바로 나태 지옥으로 직행 안 하고 천국에 갈 기회가 주어진 것만 해도 어디야. 정신 바짝 차리자!’
다시 기합이 바짝 들어간 실비아는 어쩐지 설레는 표정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블루를 알아차리고 흠칫했다. 이 모습에 얼굴을 붉히는 남주라니,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실비아는 내일 던전 공략을 위해서 블루가 심해도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잘 모르고 사지로 걸어가는 건 아니어야 할 텐데.
“블루야, 우리 내일 너희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잖아. 어떤 곳인지 알고 있어?”
『응. 가끔 둥지에 오는 애들한테 물어봤었어. 부모님이 보내 주신 편지에도….』
블루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드래곤만 사는 게 아닌, 수인화가 가능한 여러 해양생물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해양생물들 중에 운 좋게 마나의 영향을 받은 애들은 수인화가 가능하다던가? 그 말을 들으니 딱 동양 전설의 영물들이 생각났다.
저번에 새우잡이 배에서 동대륙에서 온 덕팔 선원을 만났을 때 짐작했던 거지만, 이 망할 놈의 노점 게임은 동양과 서양을 완전히 짬뽕해놨다. 아마도 개발자는 서양에서 히트 칠 경우를 대비해서 한국의 멋을 알리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온갖 것을 다 집어넣은 거지. 하지만 플레이어는 실비아 한 명뿐이니 참 애석한 일이었다.
‘드래곤과 해양생물 수인들이라니, 마치 용궁 같네. 가만, 지금 보니 블루가 입고 있는 옷도 동양풍 옷이잖아.’
실비아의 눈이 블루의 특이한 옷에 머물렀다. 조선시대 옷은 아닌 것 같고, 고구려인지 신라인지…. 대충 어디서 짜깁기한 동양풍 옷이었다.
‘동양풍이면 무슨 몬스터들이 있으려나? 설마 그곳 수인들과 드래곤들이 다 몬스터화 된 거면…. 해양생물 몬스터는 그렇다 치고 드래곤은 지금 내 수준으론 절대 못 이길 것 같은데.’
그것도 그거고 제일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아가미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숨 쉴 수 있으려나. 혹시 익사엔딩도 준비돼있는 건 아닌가 겁났다.
“그 도시로 가는 거, 안전하겠지? 아무래도 바닷속으로 가는 거니까. 나는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 영 걱정이 돼서 말이야. 거기서 숨은 쉴 수 있는지 뭐 그런 거….”
『그 도시엔 바다에서 숨 쉴 수 없는 수인들도 종종 간다고 들었어. 거길 가는 과정이 힘들 뿐이지. 그리고 부모님도 나도 물에서 오래 숨 쉴 수 없어. 그러니까 실비아도 갈 수 있을 거야.』
블루가 물에서 숨 쉴 수 없다는 건 의외였다. 바다랑 친숙한 걸 보니 아가미라도 있나 했더니, 고래와 비슷한 호흡법으로 바다를 돌아다니는 걸까? 가는 과정이 힘들다는 말이 조금 맘에 걸리긴 했지만 섬에 갈 때 새우잡이 배에서 개고생도 했었던 그녀였다. 얌전히 블루를 타고 가는 것쯤이야 고생 축에도 못 끼겠다 싶었다.
“그래. 그렇다면 안심이네. 그러면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걸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