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예?”
실비아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되묻자 루카의 눈꼬리가 더 화사하게 휘었다.
“그 신관님 좀 소개해주라. 요새 세상도 뒤숭숭하겠다, 이참에 신실해져 보려고.”
“아…. 그분이 많이 바쁘셔서요. 짬을 내서 소개해 줄 시간이….”
실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루카가 되받아쳤다.
“응. 당연히 바쁘신 건 알지. 엘베우스 신전 신관에다가 몸을 보니 아마도 전투 신관인 거 같던데, 요새 제국 도처에 던전이 생겨서 할 일이 많을 거 아냐. 그냥 이름만 알려줘. 신전에 직접 찾아가서 말씀 좀 듣게.”
“아.”
실비아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소개 자리도 필요 없고 이름만 알려달라니. 이름을 알려줬다간 던전 공략하는 사이에 무슨 참사가 벌어질지 몰랐다.
‘거절, 거절을 어떻게 하지. 아니지, 그냥 말을 돌려야….’
실비아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블루를 찾았다. 그러나 아까 전만 해도 옆에 서 있었던 블루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닌가.
‘얘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두리번거리던 실비아는 카를 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블루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카를 단장에게 일방적으로 한 소리 듣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어른 앞에서 훈계 듣는 비행 청소년 같은 자세의 블루는 어깨에 퍼랭이를 얹은 채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대체 저기서 왜 저러고 있담? 싸우는 것보단 낫긴 한데.’
실비아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쥐새끼>의 귀때기를 귀에 꼈으나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빙산에 깔려있어서 그런 듯했다. 빙산이 아직 다 녹지 않았기에 하수구에 숨어있는 <쥐새끼>가 무사한가 확인할 길이 요원했다.
‘큰일이네. 자그마치 10만 골드인데 일회용 아이템이 되는 건 아니겠지.’
루카는 팔짱을 낀 채 실비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뭐야,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곤 다시 실비아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실비아, 그 신관 이름만 좀 알려달라고.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왜, 못 알려줄 이유라도 있어?”
“아….”
그때 망설이는 실비아의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루카 앞에서 선택지가 떠오른 걸 보니, 여기서 잘못 선택하면 게임 루트가 제대로 삐끗할 거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실비아는 루카 보라고 일부러 가엾은 표정을 지으며 티 안 나게 선택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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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가 노엘의 이름을 묻는다. 뭐라고 말할까?
1. 네.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죠. 노엘 신관님이에요.
2.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분이 그걸 원하실지 모르겠어서요.
3. 시이발, 니가 알아서 뭐 하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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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번은 아주 정상적인 답이야. 3번은…. 제정신이 아니군. 이걸 선택했다간 루카랑 주먹다짐을 하게 될 수도 있겠는걸.’
주먹다짐이라, 실비아는 루카를 공략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퀘스트 실패 한 번에 호감도가 마이너스 100이 돼서 적대관계가 될 뻔한 적도 있었고, 호감도가 높을 때도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염전 노예가 될 뻔하지 않았던가. 숙적 루트는 또 어떤가. 그러니 선택지 한번 잘못 고른 거로 주먹다짐하는 관계도 충분히 가능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3번은 절대 선택하면 안 되고, 1번도 싫었다. 이름을 알려준다니, 그랬다간 던전 공략하는 사이에 두 사람이 만날 수도 있었다.
‘2번을 선택하겠어.’
그녀는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괜히 보이지도 않는 파리를 쫓는 척 2번 선택지를 터치했다. 터치하자마자 늘 그랬던 것처럼 저절로 입이 열렸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분이 그걸 원하실지 알 수 없어서요.”
사실 실비아가 제일 원하지 않았다. 저 없는 장소에서 노엘과 루카가 만난다니.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마도 노엘은 차라리 루카를 만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진상을 알고 싶어 할 수도 있겠지.
루카도 뭔가 싸한 느낌을 받아서 계속 추궁하는 것일 테고 말이야. 망할 놈의 시스템이 결국엔 두 남주를 만나게 하겠지만, 가능하면 그 만남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루카는 실비아의 대답을 듣곤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하, 그럼 뭐, 같이 만나는 자리라도 만들어 주겠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당장은 좀….”
이 선택지가 아니었던 건가. 실비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끝을 흐리자 루카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한 듯 치켜 올라갔다.
“그래. 당장은 아니라 이거지? 사실, 엘베우스 신전의 신관인 것도 알겠다, 찾아가려면 오늘 당장 찾아갈 수도 있어.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단 소리야. 아리센트 가문의 힘을 사용하면 찾는 건 식은 오트밀 수프 먹기지.”
충격적인 발언에 실비아는 순간 비명을 지를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렇네. 이미 엘베우스 신전의 신관인 것도 알고 있겠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암흑가를 주름잡고 있는 아리센트 가문의 후계자인 루카가 맘만 먹으면 노엘이 어딨는지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암흑가니 뭐니, 그런 흑염룡 같은 힘을 쓰지 않더라도 아리센트 가문 자체가 제국에서 유명한 마법사 가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뭔 놈의 게임이 한 가문에 이것저것 다 때려 박아 넣었는지 설정 과다였지만, 지금은 우선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차라리 1번을 선택할 걸 그랬나? 그럼 루카가 기분이 안 상했을 수도.’
루카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실비아는 한숨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을 보니 죽기 딱 좋은 날씨라는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휴우…. 차라리 3번을 선택한 뒤에 루카한테 실컷 처맞고 콱 뒈져 버릴걸. 그랬다면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갔을 테고, 불안에 떨면서 카페에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멀리 도망쳤을 텐데.’
불안에 떨던 실비아는 3번을 선택할 걸 생각하며 후회했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3번을 선택해도 죽진 않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루카가 날 죽을 정도로 팰 일은 없지. …아니겠지? 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차라리 소개해주겠다고 하고 시간을 좀 끌자. 그러다가 자기들끼리 만나면 그땐, 그땐….’
두 남주가 만나면 혹시 그대로 배드엔딩이 뜰 수도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암담함에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안 돼! 비록 사후부터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태 지옥에 떨어질 순 없다고…. 실비아는 안 그래도 폭삭 늙은 상태인데 더 폭삭 늙어버린 얼굴로 힘없이 입을 달싹였다.
“그….”
그때 곤란한 실비아의 마음을 헤아린 건지 선택지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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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로 내몰린 실비아. 그녀의 선택은?
1. 알겠어요. 던전 갔다 온 뒤에 꼭 그분을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도록 할게요.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2. 타코야키 사제를 소개해주겠다고 한다.
3.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그 신관님과 루카 님은 사실 같은 걸 공유했는데 그게 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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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아래로 내리던 그녀는 3번 선택지를 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저런 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냐고! 미친 시스템 같으니.
1번은 제일 무난한 선택지였고, 2번도 나쁘지 않았다. 종교를 가지고 싶다고 했으니 수완 좋은 타코야키 사제를 알려주면 될 것이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머리가 벗겨진 사제를 소개해주겠다고 하면 될 것 같기도….
잠시 생각하던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루카의 의도는 노엘을 만나서 대화해보고 싶은 거인데, 타코야키 사제를 소개해주겠다고 하면 또 다른 이유를 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또 대화는 원점으로 돌아갈 터.
실비아는 1번 선택지를 택하기로 했다.
“알겠어요. 던전 갔다 온 뒤에 꼭 그분을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도록 할게요.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흐음. 그래? 자리를 마련한다니까, 뭐. 기다려 줄게. 오래는 못 기다려줘. 알지?”
이 대답이 맞았나 보다. 루카는 팔짱을 푼 뒤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가 작정만 한다면 노엘과 따로 만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기다리겠다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기다려주세요. 제가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볼 테니….”
“어. 알겠다니까.”
루카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더 말하지 말자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실비아는 찝찝한 기분이 되었지만 일단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뭐, 안고 비빈다거나 미인계를 써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현재 몸뚱이로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었으니.
‘서럽다, 서러워. 어쩐지 상태 이상 때문에 자신감도 감소하는 기분이야.’
실비아가 부르르 몸을 떨고 있자 루카가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목을 꺾으며 제 아버지와 블루에게로 다가갔다. 말로 표현하진 않지만, 몸짓언어로 봐서는 ‘너 내가 다 아는데 봐준 거야.’라는 기색을 잔뜩 풍겼다.
“아버지, 저….”
카를 단장은 루카의 얘기를 한참 듣더니 실비아를 한번 보고 블루를 한번 그렇게 번갈아 봤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구나. 이 드래곤이 제국 상공을 휘젓고 다닌 건 잘못된 일이긴 하지만, 불가침조약을 맺은 종족을 건드리는 건 우리 입장에서도 신중히 해야 할 일이지. 이번엔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지. 알겠니? 이번엔 넘어가겠다는 소리란다.”
“응. 알겠어.”
제국어로 대답한 블루는 카를 단장이랑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무척 온순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블루는 힐끗 실비아를 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쟤는 또 왜 저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살펴보던 실비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블루의 찝찝한 태도에 실비아의 미간이 좁아지는 와중에,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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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의 상태 이상 <영광의 상처>를 처음 본 블루의 호감도가 2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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