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58화 (258/372)

258화

“아버지! 실비아는 노파가 아녀요. 정말 예쁜데, 지금 잠시 폭삭, 아니 좀 상태가 안 좋을 뿐이에요.”

“쯧, 어휴!”

크게 한숨을 내쉰 카를 단장이 화가 난 표정으로 루카를 응시했다. 사랑에 눈이 먼 미친 사람을 보는 표정이었다. 그는 결국 노파에게 푹 빠진 아들을 내버려 둔 채 답답한 듯 몸을 돌렸다.

“두 눈 뜨고 못 볼 광경이구나! 보고 있으려니 천불이 나서 원! 그래, 좋아 죽는구나, 아주. 얘기나 나누고 있거라. 난 이번 싸움으로 피해 입은 건물들을 살피고 있을 테니까.”

“아니, 아버지, 그게!”

카를 단장은 꼴 보기 싫다는 듯 루카의 대답을 더 듣지 않고 얼른 자리를 떴다.

루카가 답답함에 입을 뻐끔거리며 제 가슴을 쳐댔지만, 실비아의 상태 이상 전의 모습을 아버지가 본 적 없으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자신도 믿지 못했을 테니까. 웬만해선 남한테 지지 않는 루카지만 부모님에겐 예외였다. 그가 쩔쩔매는 사이에 실비아가 숨 막히는 분위기를 비집고 들어와 입을 달싹거렸다.

“저기, 루카님.”

“아, 그래. 실비아.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쏘아 올린 게 너지? 왜 그런 거야? 뭐, 덕분에 싸움은 중단되긴 했다만.”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쉰 루카가 저쪽 계단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블루에게 시선을 던졌다. 빙산이 거의 다 녹아서 주변이 죄다 물바다였다. 기물들도 여기저기 조각나거나 부서져 있었다. 루카의 뇌리에 아까 실비아의 이름을 외치던 블루가 번뜩 떠올랐다.

“잠깐. 너, 저 드래곤이랑 아는 사이야?”

“잠시만요. 찬찬히 설명할게요.”

보아하니 싸움도 일단락된 것 같고, 블루랑 아는 사이인 걸 이제는 밝힐 때였다. 실비아는 망토 속에 깊숙이 숨겨둔 퍼랭이를 꺼냈다.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퍼랭이는 어디서 익혔는지 블루보다 제국어가 유창했다. 그것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네 주인한테 가!”

푸드득 소리와 함께 퍼랭이가 비행하더니 블루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블루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퍼랭이를 보고 영문을 몰라 하다가 아까 봤던 노파가 퍼랭이를 날렸음을 알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어? 뭐야.』

블루의 눈이 실비아와 퍼랭이를 번갈아 훑자 퍼랭이가 솰라솰라 새소리를 내며 블루와 대화를 나눴다. 지저귐이 이어질수록 블루의 평이하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할머니가 실비아라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감색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블루가 놀라는 사이 루카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뭐야, 저 앵무새. 아까 네 이름 부르면서 날아다니던 걔 맞지? 지금은 또 드래곤한테 가 있네. 역시 짐작대로 아는 사이가 맞았구나.”

“네. 어떻게 된 거냐면, 아니다. 우선 싸움도 끝났으니 저 쪽도 불러서 같이 얘기하도록 하죠.”

실비아는 손짓해 블루를 불렀다. 블루는 일순 흠칫했다. 멀리서 보니 황천 너머에서 망자가 부르는 것 같아 꺼림칙한 기운이 흘렀다. 블루는 우선 퍼랭이의 말을 믿고 그들 근처로 날아왔다.

『어? 진짜 실비아 맞네!』

블루는 지척에 와서야 노파가 실비아란 걸 알아보았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와보니 좀 여러모로 놀랍긴 했지만, 실비아가 맞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늘 번갈아 끼고 다니는 반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초록색 반지를 노파가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라도 알아봐서 다행이구나.”

『이 반지 보니까 확실히 실비아 맞네. 이럴 수가! 내가 실비아를 못 알아보다니!』

블루가 그녀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블루가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더니 이상하게도 얼굴이 점점 발그레해졌다.

실비아는 블루의 얼굴색 변화에 흠칫 놀라 이중턱을 만들었다.

‘뭐지? 내가 노파가 된 모습을 보고 열 받았나? 몰라, 우선 내버려 두자.’

얼굴이 붉어진 블루를 내버려 두고 실비아는 우선 루카에게 말을 걸었다. 블루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 드래곤은 이번 던전 공략 때 길 안내를 해줄 친구예요. 제가 미리 설명을 했었어야 했는데, 아시다시피 몸 상태도 엉망이고…. 루카 님을 마주쳤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 했네요. 그래서 이런 오해가 생긴 거고요. 얘가 제국에 방문한 지 얼마 안 돼서 뭣도 모르고 하늘을 휘젓고 다닌 것, 대신 사과할게요.”

“그런 거였어? 아, 그래. 넌 신탁을 받아서 던전 공략을 해야 한다고 했었지. 이번에도 신탁을 받은 거구나?”

“네, 맞아요.”

루카는 금방 납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제대로 설명할 것을, 괜히 겁나서 모른 척했다가 수도가 엉망이 됐다. 그녀는 불안한 낯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 잔해들이 흉물스러웠다.

‘루카 부자가 선제공격했다고 했던가? 뭐, 어차피 내 일은 아니니까 저 부서진 건물들은 나랑은 상관없지.’

실비아의 시선이 한 바퀴 빙 돈 뒤 다시 루카에게 향했다.

“그래서 루카 님과도 만날 수 없었던 거에요. 오늘 던전 공략을 떠나려고 일정을 잡아뒀으니까요. 좀 엉망이 되긴 했지만…. 이제 오해도 다 풀렸으니 저 드래곤과 함께 던전 공략을 떠나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실비아가 블루의 어깨를 잡고는 말하자 그도 눈치가 있는지 대충 알아듣고 같은 의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뭐…. 드래곤이 생각 없이 상공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우리로선 당연한 공격을 한 거고. 그 때문에 막대한 피해가 있었어. 그러나 오염된 기운을 없애는 건 제국의 뜻과도 같으니, 도움을 줘야겠지. 우리 선에서 피해를 해결하도록 할게.”

금빛 눈동자가 참혹한 싸움의 흔적들을 날카롭게 살폈다. 루카의 대답에 실비아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서진 기물들을 보던 금빛 눈이 만능 레이저 반지로 내려갔다. 그는 덥석 실비아의 손을 잡더니 한쪽 눈썹 끝을 묘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실비아, 내가 준 반지는 안 끼고, 이 반지를 끼고 있구나. 음, 오늘은 새로운 얼굴이 좀 많았지? 흐음.”

의심을 담은 금색 눈이 블루를 향했다. 혹시나 이 수상한 반지를 준 사람이 블루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블루의 얼굴은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직감이 블루는 반지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누굴까?

실비아가 동네 할머니한테 받은 반지라고 말했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사과를 깎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 태도로 보아 반지는 동네 할머니가 아닌 다른 남자가 준 것일 확률이 높았다. 루카는 미세하게 떨리는 실비아의 손을 놔주고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실비아.”

“네?”

“아까 노란 머리 남자 말인데. 신전 얘기를 했던 거 같아. 혹시 신관이야?”

루카는 그녀를 떠보기 위해 아까 대치했던 노란 머리 남자 얘기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실비아의 낯빛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아하. 반지의 주인이 누군가 했더니, 혹시 그 남자일 수도 있겠는데.

루카는 아까 봤던 신관의 모습을 떠올리며 시선을 위로 올리곤 턱을 쓰다듬었다.

“신관 맞구나. 차고 있는 목걸이의 문양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어. 엘베우스 신전의 신관 맞지?”

“네? 아, 맞, 맞아요. 신관님!”

저 과한 반응. 짐작이 사실일 확률이 점차 높아졌다. 루카는 임팔라를 잡기 위해 수풀 속에 몸을 숨긴 표범처럼 날카로운 기분을 애써 감추곤 온화한 낯빛을 했다. 비록 입꼬리는 파들파들 떨렸지만, 상태 이상 때문에 눈이 침침한 실비아는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카의 금색 눈이 만능 레이저 반지를 날카롭게 훑었다.

‘저 반지를 언제부터 끼고 있었더라.’

실비아가 끼고 있는 액세서리에 처음부터 관심을 뒀던 건 아닌지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반지를 본 최초의 기억은 가문 소유의 섬에서부터였다. 루카는 흐린 기억을 참고해 낚싯대를 던졌다.

“아, 그래.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아. 얼굴이 낯설지가 않아. 바닷가 마을에서 봤던 거 같기도 하고.”

“아아, 전 또 뭔가 했네요. 네, 맞아요. 바닷가 마을에 계시던 분이에요.”

실비아의 대답에 루카가 화려하게 미소 지었다. 누가 봐도 위화감이 잔뜩 드는 미소였으나 안타깝게도 실비아는 노안에 시달리고 있어서 여전히 파악이 불가능했다.

“아아. 그렇구나. 어쩐지. 낯이 익더라고.”

“네. 음, 전에 던전 공략 때 세비스와…. 그러고 보니 세비스와 제대로 본 건 처음인가요?”

“아냐. 그 개새끼랑은 전에 한번 본 적 있어. 지그문트 호텔 앞에서 마주쳤었지. 걔가 자세한 얘긴 안 했나 보네.”

루카는 아까 마주쳤던 몸집이 훌쩍 커진 세비스를 떠올렸다. 키가 껑충 자란 게,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몰라봤을 정도였다.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그의 모습을 복기하던 루카는 그래도 자신이 더 잘생겼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얼굴을 따라올 순 없지.’

루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실비아가 ‘개새끼’라는 단어를 주의시켰다.

“개새끼라고 하지 말아요. 저번에는 세비스랑 잘 지내보겠다고 해놓고선.”

“응? 아, 그냥 개같이 생겼으니까 개새끼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걔, 키가 많이 컸던데? 그래도 나에 비하면 뭐, 그저 그렇지만.”

루카가 앞머리를 넘기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저 잘난 걸 아는 자의 미소였다. 하늘을 찌르는 외모부심에 잠시 고개를 저은 실비아는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저번 던전 공략 때 세비스와 아까 그 신관님이 동행했었어요. 덕분에 수월하게 던전 공략을 마칠 수 있었죠.”

“아, 개새끼도 같이 갔었다고? 으음, 신관님과 동행해서라…. 그렇구나. 참 고마운 신관 님이네.”

짐작이 틀린 건가? 루카는 가늘게 눈을 뜨곤 실비아의 표정을 살폈다. 당당한 태도를 보니 방금 한 말엔 추호의 거짓도 없는 듯했다. 루카는 환하게 눈웃음치며 가벼운 태도로 말을 내뱉었다.

“이참에 나도 종교나 가져볼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