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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57화 (257/372)

257화

실비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루카와 블루의 싸움을 다시 지켜봤다. 블루의 물줄기가 닿는 족족 증발시키던 구가 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더니 점점 블루 쪽으로 가까워졌다. 이렇게 되면 블루의 물 속성 마법이 더는 소용없을 터.

‘배드엔딩 메시지에 ‘진(이긴)’이라고 되어 있었지? 누가 이기든 저대로 싸우게 놔두면 안 된단 소리야. 어쩌지, 어떡하면….’

이대로면 배드엔딩 이름대로 블루는 개가 물어간 하드바 처지가 될 것 같았다. 아예 싸움을 중단시키고 오해를 풀면 될 텐데. 아까 들어보니 블루가 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바람에 제국에 해꼬지를 하러 왔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마법이 난무하는 싸움터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곤죽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망할 놈의 게임은 ‘싸움터에 난입했다가 괜히 얻어터지고 사망’ 같은 엔딩도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고민하던 실비아의 머리 위에 전구가 켜졌다.

‘아! <부메랑 망치>를 쓰면 되겠네.’

그러나 망치를 사용하려던 실비아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상태 이상 때문에 <부메랑 망치>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떴기 때문이다.

‘이 몸으로는 전투를 할 수 없다는 거구나.’

낙담하던 실비아의 머릿속에 다른 묘안이 떠올랐다. 비밀상점에서 탄 같은 것들을 몇 개 주워 담지 않았던가? 돈 주고 산 걸 이런 때 써야지 언제 쓰겠는가. 그녀는 <신호탄>으로 주의를 돌려서 싸움을 중단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저렇게 싸우고 있는 걸 텐데, 누군가 남아있단 걸 알면 놀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싸움이 중단된 뒤에 블루는 던전 안내자일 뿐이고, 제국에 안 좋은 뜻이 없다고 설명하면 될 듯했다. 아마도 제국어가 유창하지 못한 블루는 상황설명도 하지 못한 채 싸우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쥐새끼>의 귀때기를 통해 블루와 루카 부자의 대화가 들려왔다.

“드래곤, 자네. 여긴 왜 온 건가?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보호막의 영향력 아래에선 현신이 불가능해. 그러니 원래 힘을 발휘할 수 없지.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네. 좋은 말할 때 물러가.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

『…….』

실컷 마력석을 써댄 것치곤 온건한 설득이었다. 수도 상공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니길래 아들과 함께 선제공격을 하긴 했지만, 정신없이 싸우고 나니 카를 단장의 이성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어린 드래곤 같은데 크게 다치게 했다간 제국으로서도 입장이 곤란했다.

불가침 조약이란 건 선조들 간의 약속. 드래곤은 일반인들에겐 거의 전설의 동물로 인식된 지 오래일 정도로 제국은 몇백 년 동안 평화로웠다. 모두 다 조약 덕분이었다.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오래 유지된 평화였건만. 제국이 어린 드래곤을 크게 다치게 했다간 자칫 잘못하면 가만히 있던 다른 드래곤들의 심기를 건드려 일이 커질 수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저 어린 드래곤은 제국어를 꽤 쓸 줄 알았다. 드래곤은 타고난 지혜가 상당해 낯선 언어를 금방 습득하고 알아듣긴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방금 쳐들어온 거라면 저 정도의 제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국에서 계속 살고 있었던 건가? 그럼 조용히 인간 사이에서 계속 숨어 있을 것이지…. 어린애라 뭘 모르고 날아다닌 거 같군. 수도 하늘 위를 날고 있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끝까지 정신 못 차리면 금제를 푸는 수밖에.’

그가 생각한 방법은 실비아의 배드엔딩 메시지에 떴던 영구추방 주문이었다. 웬만해선 쓰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어린것을 잠재우려면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카를 단장이 블루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차는데, 루카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 목적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저놈이 함부로 제국 상공을 휘젓고 다닌다는 게 문제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보기?』

블루가 빠르게 이어지는 루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본보기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흠,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계속 싸울 생각인가 보군. 너무 다치게는 하지 말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게 하거라.”

“네. 어차피 드래곤으로 현신도 못 할 테니 알아서 힘 조절하겠습니다, 아버지.”

루카의 말에 카를 단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싸움은 재개됐다. 붉은 구가 더 커지더니 열기가 강해졌다.

“쫄리면 도망가시던가.”

『윽….』

블루의 반듯한 이마에 어느덧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고위 클래스 마법사를 상대하려니 힘에 부쳤다.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되겠어. 가만히 듣고 있던 실비아는 인벤토리에서 폭죽 모양 아이템을 꺼냈다. 그러나 막상 바로 당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렇게 흉흉하게 싸우고 있는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안 돼. 용기를 내자. 내 하드바를 지키기 위해서!’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고 폭죽을 터트렸고 펑-소리와 함께 <신호탄>이 하늘 높이 쏴졌다. 굉음과 함께 짙은 푸른 연기가 멀리서 자욱하게 피어오르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뭐야?”

“저건 뭐…. 얜 어디로 사라진 거지?”

시선을 다시 블루에게 돌린 카를 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전만 해도 땀을 뻘뻘 흘리며 물 속성 마법을 유지하던 블루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대로 도망친 걸까? 근데 어떻게 찰나의 순간에 도망친 건지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콰광!

“으윽!”

집채같은 빙산이 블루가 있던 자리에서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실비아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에 비명을 지르며 귀에 꽂은 귀때기를 뺐다. 하마터면 귀가 먹을 뻔했다.

구경하던 실비아가 놀란 것과는 달리 싸우는 이들은 침착했다. 루카는 제 아버지를 데리고 순간 빠르게 이동해 거대한 빙산을 피했다. 붉은 구는 마나를 모아 만든 유형의 물질이었기에 빙산에 깔려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아, 저번에 썼던 마법이구나.’

실비아는 저번에 블루가 시전했던 마법을 떠올렸다. 물개를 데려오는 데 썼던, 제자리에서 물구덩이를 만든 뒤 바다로 이동했다가 돌아오는 마법. 그걸 이용해서 극지대로 가서 빙산을 가져온 듯했다. 아마도 얼음 속성 마법을 못 쓰니 나름 머리를 쓴 거 같은데….

문제는 실비아가 그들의 싸움을 말리려는 타이밍에 블루가 빙산을 가져왔다는 거였다.

‘아오, 기껏 <신호탄>을 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

<신호탄>에 잠시 눈이 쏠리려는 찰나 그거랑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빙산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모두들 회심의 푸른 연기를 잊었다. 가까스로 빙산을 피한 루카가 짓씹듯 내뱉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이 정도면 살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네?”

『…….』

블루는 많이 지친 듯 헉헉거리며 묵묵부답이었다. 항상 여유로운 날백수 같던 블루가 저렇게 힘들어할 줄도 알다니, 이상한 소리지만 어쩐지 보기 좋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실비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고생은 훗날 저 젊은이 삶에 밑거름이 되리라. 지팡이에 두 손을 의지한 채 열혈 청년의 노동 현장을 바라보듯 흐뭇하게 미소 짓던 실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휘저었다. 상태 이상 <영광의 상처>가 몸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도 지배하려 들었다.

‘내 소중한 돈들이 순식간에 공중분해 됐지만…. 이렇게 되면 남은 <신호탄> 한 개와 <이모티탄> 한 개를 함께 터트려서 주의를 끌어야겠어.’

우라엘 황태자에게 받은 보석 두 개로 고가의 아이템을 손쉽게 사서 그런지 욜로족 출신 실비아의 간덩이는 배 밖으로 나와 있었다. 순간 세일하는 수세미를 만지작거리던 세비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쓸 땐 써야 하는 법.

인벤토리에서 5천 골드짜리 남은 <신호탄> 한 개와 2천 골드짜리 <이모티탄> 하나를 꺼낸 그녀는 싸움이 더 심각해질세라 얼른 하늘을 향해 탄들을 쏘아 올렸다.

펑-! 퍼펑-!

도합 7천 골드의 탄 두 개가 하늘 위에서 장렬히 산화했다.

한창 험악한 기세로 대치 중이던 블루와 루카 부자는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탄들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하나는 푸른 연기의 <신호탄>이고, 하나는 빠큐 모양의 폭죽이 터지는 <이모티탄>이었다. 빠큐 모양을 보고 잠시 놀랐던 그녀는 이 세계 사람들은 빠큐를 모른다는 걸 떠올리곤 안심했다.

“뭐야? 아버지, 누가 남아있나 봅니다.”

“그런 것 같구나.”

『후우….』

루카 부자는 블루를 바라보며 마나를 거두었다. 블루도 인간적으로 아니, 드래곤적으로 눈치가 있는지라 그만하자는 신호를 알아들었다. 안 그래도 이미 녹초가 돼서 싸울 기력이 없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블루도 털썩 대리석 계단 위에 주저앉으며 더는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명했다.

“빠져나가지 못 한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싸움은 중지하도록 하지. 크흠, 자네. 제국어를 할 줄 아는 거 같은데, 좀 있다가 나랑 얘기 좀 하지.”

카를 단장의 말에 블루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진맥진한 걸 보니 센 척하긴 했지만, 인간화를 유지하며 두 마법사를 상대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품에서 꺼낸 흰 손수건을 지팡이에 묶어 백기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보면 전쟁터 한가운데 들어갈 때 이렇게 하는 거 같았기에 대충 따라 했다. 그녀가 백기를 흔들면서 나오니 루카는 반가워하고 카를 단장의 표정은 어색해졌다.

“실비아! 너였구나. 다들 도망갈 때 너도 갔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있었을 줄이야.”

“크흠, 어째서…. 도망가지 않고 계셨던 겁니까.”

아들의 반색하는 모습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카를 단장은 실비아를 향해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루카의 아버지에게 존댓말을 받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루카는 아버지의 태도에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곤 실비아의 상태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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