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실비아는 갑작스러운 굉음에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설마 바란 대로 벼락이라도 떨어진 걸까? 그런 거 치곤 소리가 꽤 묵직한데…. 굉음이 울리고 난 후 별안간 실비아의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몸이 왜 이렇게 떨리지?’
상태 이상이 심해져서 노환이라도 온 걸까. 왜 이런지 원인을 살펴보니, 실비아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게 아니라 망토 속 참둘기와 퍼랭이가 떨고 있는 거였다.
“너희들 왜 이렇게 떠니?”
그들은 완전히 겁먹었는지 실비아의 물음에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품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굉음의 출처는 광장인 것 같았다. 연이어 굉음이 터져나가자 그들은 까무러칠 듯이 푸드덕거리더니 망토 속으로 완전히 몸을 묻었다. 아무래도 광장에서 연이어 터지는 굉음에 작은 몸이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직 블루가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왠지 이 굉음의 원인이 그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블루가 어디 갔는지 찾을 겸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해야겠어.’
호기심을 못 이긴 실비아는 광장 쪽으로 조심조심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사람들이 급히 뛰어가거나 소리를 마구 지르는 등, 광장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눈을 요리조리 굴린 그녀는 곧 소란의 원인을 찾았다. 저 멀리서 블루와 루카 부자가 화려한 마법을 주고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고 한적해진 광장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하늘 위로 거대한 하얀 막이 생성됐다.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서 카를 단장이 마도구로 급하게 설치한 보호막이었다.
‘블루를 만나서 가는 것만 아니었어도 나도 그냥 도망치는 건데.’
실비아는 잠시 제 신세를 한탄하곤 구경을 재개했다.
블루는 몸집의 두 배는 될 법한 푸른 날개를 펼친 채 하늘 위에서 이리저리 빠르게 이동했다. 상대방의 시야를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고층 건물 위에서 점프한 그는 빠르게 활강하더니, 순간 경로를 꺾었다. 거울에 반사되는 빛도 아닌 것이, 인간에게선 볼 수 없는 기묘한 각도의 움직임이었다. 블루가 몸을 옮김과 동시에 원통형의 거대한 물줄기가 카를 단장의 머리 위에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움직임을 현란하게 해 적의 시야를 흩트린 뒤 빠르게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안 그래도 상태 이상 때문에 눈이 침침한 실비아는 블루가 왔다 갔다 하는 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거센 물줄기가 가차 없이 아래로 쏘아지는 것만 목격했다. 그녀의 입에서 숨죽인 경악이 터져 나왔다.
“헉, 안 돼!”
강력한 물대포를 머리에 그대로 쏘는 셈인데, 제아무리 마법사단장이라도 맞으면 즉사 각이었다. 그러나 카를 단장은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물대포 마법을 피했다. 마치 순간이동을 했다고 해도 믿을만한 빠른 몸놀림!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손에 땀을 쥐는 구경이었다.
4D 영화가 따로 없구나! 태곳적부터 팝콘 각이자 술안주로 불리는 2대 진미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다. 그중 하나인 싸움 구경을 놓쳐서야 아니 될 말이었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싸움에 집중했다. 그러나 대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답답했다.
‘아, 맞아. 비밀상점에서 산 <쥐새끼>가 있었지.’
인벤토리에서 회색 쥐 모양의 아이템을 꺼낸 실비아는 꽁지에 달린 꼬리를 태엽 감듯 빙빙 감았다. 소리는 어떻게 듣나 했더니, 동봉된 조그만 사용설명서에 <쥐새끼> 귀때기를 떼서 귓구멍에 넣으면 된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쥐새끼>의 귀때기 두 개를 떼어 이어폰 꽂듯 제 귀에 꽂았다. 아이템을 땅에 내려다 놓은 그녀는 굳이 외칠 필요 없는 구호를 조그맣게 속삭였다.
“가랏, <쥐새끼>!”
<쥐새끼>는 마치 진짜 쥐처럼 사사삭, 사사삭 뽈뽈거리며 기어가더니 무사히 싸움 한복판의 하수구에 숨었다. 잠시 기다리자 귓구멍에 넣은 귀때기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처럼 대화가 들려왔다.
블루가 공중에서 여유롭게 날면서 카를 단장에게 빈정거렸다.
“아쉽네. 이걸 피하다니.”
루카 부자의 몸은 블루의 마법 때문에 흠뻑 젖어있었다. 블루의 옷자락도 불 마법의 여파로 살짝 그을렸다. 카를 단장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형 마력 확장석이 없는 게 한이로군. 그래도 너 정도 어린애는 이걸로 충분하지.”
카를 단장이 루카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특이하게 생긴 돌을 건넸다. 마력 확장석도 아닌 것이, 저건 대체 뭘까? 실비아가 가늘게 눈을 뜨곤 카를 단장의 손을 주시하는데, 그가 손안의 돌을 깨트리더니 루카의 등에 남은 손을 댔다.
‘뭐지?’
그리고 두 명의 몸이 붉은 마나에 휩싸였다. 저건 1+1 같은 건가?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예상대로 카를 단장이 쓴 것은 마력 결합석. 대형 마력 확장석은 애석하게도 상비하고 있지 않았던지라, 루카의 시계 속 공간에 있던 마력 결합석을 쓴 것이다.
붉은 마나에 휩싸였던 루카는 아버지의 마나를 한꺼번에 받아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몸집의 3배는 될 법한 태양을 닮은 커다란 붉은 구가 생성됐다. 색으로 보아 불로 된 구 같은데, 블루의 속성은 물이라서 저게 먹힐까 싶었다.
‘불은 속성상 물을 이길 수 없는 법인데, 소용없는 짓 아닐까?’
커다란 구는 점점 붉게 타오르더니 시뻘게졌다. 그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실비아의 몸이 한증막에 온 것처럼 후끈해졌다. 신기하게도 주변 물건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인지, 손을 대고 있는 기둥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말이다.
구가 팽글팽글 돌더니 한순간 더 크게 몸집을 부풀리며 블루에게 날아갔다. 블루는 코웃음을 치고는 손 위에서 물회오리를 불러내 던졌는데, 손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그것은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물줄기가 거대해지더니, 붉은 구를 덮쳤다.
두 마법의 충돌을 지켜보던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붉은 구가 블루가 시전한 거대한 물줄기를 실시간으로 증발시키고 있었다. 물과 구가 만난 접촉면에서 수증기가 뿌옇게 피어오르더니 주변이 온통 사우나가 되어버렸다. 불이 물을 이기는 현장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불은 물을 이길 수 있었구나!’
실비아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감탄했다. 공중에서 둘의 마법이 치열하게 힘을 겨뤘다. 루카가 시계에서 돌을 하나 더 꺼내 깨트렸다. 카를 단장과 루카의 몸을 감싸던 붉은 마나가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불처럼 타오르는 마나에 감싸인 그들은 마치 지옥 불에서 걸어 나온 악마들 같았다.
“이 물처럼 네 몸도 다 증발시켜 줄게.”
아니,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실비아가 차마 소릴 내지 못하고 격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블루는 내가 공략해야 할 남주라고! 쟤가 죽는 순간 내 게임공략은 실패란 말이야.’
블루는 ‘증발’이란 단어를 알아듣진 못했지만, 상황으로 미뤄보아 나쁜 소리란 걸 알았다. 루카의 말에 블루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감색 눈이 순간 밝게 빛났다. 본체로 현신하려는 거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걸 막았다. 블루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하늘을 뒤덮고 있는 보호막을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거 때문인가. 본체로 돌아가면 저 두 사람을 상대할만했을 텐데.’
한숨을 쉬며 본체화 시도를 접은 그는 손에서 물을 더 콸콸 쏟아내더니 구를 향해 회오리처럼 강하게 회전하는 물줄기를 쐈다. 그러곤 어눌한 제국어 대신 유창한 자기 말을 써 이죽거렸다.
『저번에 내가 말했던가?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너야말로 오늘 살아서 못 돌아갈 줄 알아라. 이 수탉 새끼야.』
“뭐라는 거야?”
루카가 못 알아들을 말을 내뱉는 루카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블루가 물개일 때는 실비아만 알아들을 수 있는 물개 소리일 뿐이었지만, 인간의 몸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목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물론 드래곤어였기에 루카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블루는 못 알아듣는다는 걸 알고도 뱉은 말인 듯, 코웃음을 치며 루카를 무시했다. 그러곤 다시 인간의 언어로 내뱉었다.
“죽어, 그냥.”
블루의 말을 다 알아들은 실비아의 낯빛이 시퍼레졌다. 이러다가 남주 두 명이 오늘 다 없어지고 공략 캐릭터를 영영 잃은 실비아의 겜생도 이대로 마감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마치 동의한다는 듯 경고음과 함께 배드엔딩 예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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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낑낑대며 껍질 깠더니 개가 물어간 하드바>로 진입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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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낑낑대며 껍질 깠더니…뭐?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배드엔딩 명이야.’
엔딩 명을 보고 어이가 없어진 실비아가 상세 설명을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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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 <낑낑대며 껍질 깠더니 개가 물어간 하드바>
- 실비아는 블루와 루카의 전면전을 내버려 두다가 다 잡은 먹이, 아니 블루를 먹을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루카의 아버지, 카를 단장이 싸움에서 진(이긴) 블루에게 제국에서 영구추방 하는 주문을 걸었기 때문이다. 불가침조약을 근거한 강력한 추방 주문을 한낱 100년산 드래곤인 블루가 이길 순 없었고,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진 블루를 만날 길은 영영 요원해져 버렸다.
코앞에서 공략 캐릭터를 상실한 슬픔은 컸다. 낙담한 실비아는 영웅짓을 관두고 시골로 내려가 구멍가게를 차리게 된다. 그녀는 생을 마치는 80세까지 두고두고 전설의 종족인 드래곤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젊을 때 드래곤과 할 뻔했다고 말이다.
그 허풍을 믿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는 노망난 노인네 취급을 받았다. 실비아는 눈을 감으면서도 손녀에게 속삭였다. 하드는 껍질을 깐 즉시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개가 물어갈 수도 있으니까….
배드엔딩 조건 : 카를 단장이 함께한 <루카와 블루의 싸움> 이벤트 시 플레이어가 이를 방치할 경우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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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너무 싫은 엔딩이었다. 구멍가게 주인이 돼서 허풍쟁이 취급을 받으며 여생을 마감한다니. 이 배드엔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건 이번 싸움을 그냥 놔두면 블루를 못 먹게 된단 소리일까? 그건 곧 게임이 끝난다는 소리와 똑같았다.
‘뭐라도 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