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실비아는 제 이름이 실비아가 아닌 것처럼 계속 자신을 찾는 블루의 시선을 외면했다. 모두의 눈이 저한테 쏠려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블루가 말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 그는 아직 제국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짧은 말밖에 구사하지 못했다. 고심 끝에 실비아는 블루를 아는 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안하지만 너 하나 희생하면 내가 살 수 있어. 미안하….’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방심한 사이에 퍼랭이가 망토 밖으로 부리만 내민 채 우렁차게 소리친 것이다.
“야! 여깄어, 실비…꽥!”
“브리 드드르그 흐쓰튼드.(부리 닫으라고 했을 텐데.)”
실비아는 손을 모아 퍼랭이의 부리를 잡곤 잇새로 씹어뱉듯 속삭였다.
“응? 방금….”
“실비아, 아까 그 앵무새가 네 새였어?”
루카의 질문에 실비아는 답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선 말을 많이 할수록 불리했다. 땅에 있던 네 남자들은 뜬금없는 새 새끼의 샤우팅에 무슨 일이냐고 웅성거렸다.
퍼랭이의 외침에 지붕 위에 있던 블루도 눈을 가늘게 뜨곤 아래를 살폈다. 블루는 실비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눈을 비비며 엑, 하고 못 볼 걸 봤다는 얼굴을 했다.
『에이, 설마.』
‘저거 무슨 반응이야? 아하, 블루는 내가 상태 이상에 걸린 걸 본 적이 없지. 망토까지 입으니 못 알아보고 있는 거구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실비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붕을 바라보는데, 카를 단장 제외 세 남자가 실비아에게 각기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퍼랭이의 외침 때문에 지붕 위 드래곤과 실비아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비아, 너 저 드래곤이랑 아는 사이야? 저거 왠지 놀이동산에서 본 재수 없는 물개 놈이랑 비슷하게 생겼네.”
“실비아 님, 저 자식, 아니 저분과 아는 사이십니까?”
흥분한 루카와 침착한 노엘부터,
“실비아 님! 저분은! 날개 색을 보니 블루 드래곤 종족이네요. 저분이 아까부터 부른 게 실비아 님 맞죠?”
같은 인외종족을 만나서 그런지 정중하게 ‘저분’이라고 지칭하는 세비스까지. 여러 명이 한꺼번에 말을 거니 정신 사나웠다. 땀을 뻘뻘 흘리던 실비아는 차라리 상태 이상인 걸 이용해서 귀가 먹은 척하기로 했다. 그녀는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뭐라고? 내가 지금 상태가 안 좋아서 귀가 잘…. 아우, 들리지가 않네.”
다행히 그녀의 연기에 남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카를 단장을 제외한 세 남자는 실비아의 상태 이상을 아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수법이었다.
실비아는 귀가 안 들리는 척하며 속으로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차 진정되자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블루는 어차피 퍼랭이를 입단속 시킨 뒤 먼저 아는 척만 안 하면 상관없을 듯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노엘과 루카의 통성명만 막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보아하니 둘은 딱히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루카만 입 닫으면….
그 순간,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루카가 노엘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저 늑대 새끼는 그렇다 치고, 그쪽은 누군데 실비아한테 아는 척하시나?”
“그런 당신이야말로 실비아 님을 왜 친근하게 부르시는 겁니까. 당신 같은 무뢰한과 실비아 님이 교류할 리는 없을 테고 말이죠.”
시비 거는 듯한 루카의 표정에 노엘의 한쪽 눈썹 끝이 못마땅한 듯 치켜 올라갔다. 노엘의 말에 루카는 턱을 느른하게 쓸더니 다 가진 자의 미소를 지었다.
둘의 대화를 바라보는 실비아의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대체 루카 쟤는 왜 가진 자의 미소를 짓는 거야? 누가 이기고 말 것도 없이 너희 둘 다 실컷 나랑 …했다고! 그러나 이 사실을 양측이 알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실비아가 될 터였다.
여유롭게 턱을 매만지던 루카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교류라. 음, 교류했다고 볼 수 있지. 어떻게 교류했는지 알려 줄….”
“저기! 잠, 잠깐만요!”
실비아가 급히 둘 사이로 뛰어들며 대화를 막았다. 언제까지 소리만 지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 비명을 지르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갑자기 난입한 실비아로 인해 들어야 할 걸 못 들은 노엘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더 말해보라는 듯 시선을 루카에게 던졌다.
“실비아 님. 잠시만요. 방금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거 같은….”
“아, 으악!”
이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때였다. 실비아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제 정강이를 세게 내리쳤다. 실비아의 이상 행동에 노엘과 루카가 황급히 그녀를 에워쌌다.
“실비아! 무릎이 아프다고 없애버릴 건 없잖아!”
“실비아 님! 괜찮으십니까!”
아, 뭔가 끝없는 도돌이표를 걷고 있는 건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둘의 대화를 정강이 하나 내준 덕에 막았다. 역시 백 마디 말보단 행동 한 번이 더 효과가 좋은 법이다. 행동의 방향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피가 철철 흐르는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난리를 피운 통에 노엘과 루카는 각자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장소에는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카를 단장이 루카에게 매섭게 호통쳤다.
“난 너 그렇게 안 키웠어! 연상도 정도가 있지. 노파는 안 돼!”
정신없는 와중에 카를 단장은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 제 아들이 요즘 만나는 실비아란 여자가 바닥을 뒹구는 노파(?)란 걸 깨닫고 그의 눈이 뒤집어진 것이다.
첫째를 허무하게 잃고 나서 매일 물고 빨며 정성스럽게 키워 낸 하나 남은 자식이건만, 노파를 반려라고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요망한 노파가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굽어진 허리에 잔뜩 쉰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적어도 제 아들과 나이 차가 60은 나 보였다. 아무리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봐도 60살의 연상녀를 아들의 반려로 인정하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어머니뻘도 아니고 할머니뻘이라니. 안 될 말이지.’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빛에 루카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손바닥을 뒤집어 보였다.
“예? 노파라뇨. 실비아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사랑스럽다고? 저, 저 모습을 보고도…! 네가 단단히 미쳤구나! 정신이 나갔어! 아이고, 내가 교육을 잘못시킨 탓이지!”
카를 단장의 노성에 루카가 황당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야, 날 노파로 오해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루카가 칭찬한 것도 있는데 이대로 오해받기는 억울했다. 내 남자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단 걸 증명해주지! 순간 해명하고 싶었던 실비아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해 카를 단장의 주의를 돌렸다. 그러곤 천천히 망토를 내렸다.
“흠흠.”
헛기침한 실비아는 머리를 손질하며 카를 단장을 바라봤다. 망토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살핀 카를 단장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고개가 홱 돌아갔다.
“더 말하지 말거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 그런 줄 알아!”
시도가 무색하게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카를 단장은 어쩐지 얼굴을 보고 나니 더 화난 것 같았다. 실비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망토를 다시 덮어썼다.
‘대체 이게….’
카를 단장의 눈가가 분노로 시뻘게졌다. 우리 집에 돈이 없나, 뭐가 없나. 어째서 아들이 저 지경이 된 건지. 노파랑 사랑에 빠지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었다. 집에 가서 아내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암담함에 벌써부터 카를 단장의 가슴이 선득해졌다.
“아버지!”
“으휴, 쯧!”
그는 차마 노약자한테 해코지하긴 뭐 했는지 실비아 쪽으론 다시 눈길도 두지 않았다. 흰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거칠게 뒤돈 그는 이대로 골목길을 벗어날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해명…. 전혀 안 통했나 보네. 얼굴이 좀 심한가.’
실비아는 씁쓸하게 제 얼굴을 어루만지며 카를 단장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루카는 실비아와 제 아버지를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실비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기다리고 당장 기회를 봐서 도망갈 거지만 우선 기다리는 척해야 했다. 루카는 당황한 얼굴로 멀어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뒤따랐다. 실비아가 상태 이상이 걸린 덕에 본의 아니게 루카 아버지한테 상당한 충격을 안겨 준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쩝. 내 꼴이 그렇게 심각한가. 망토를 벗었는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실비아의 기분이 영 별로였다.
루카 부자가 완전히 사라진 뒤 실비아는 다시 남은 이들을 살폈다. 이젠 남은 사람들의 처리방안을 고심할 차례, 그녀의 입안이 바싹 말라붙었다.
‘어휴, 하필 몸이 엉망일 때 떼거리로 몰려들 건 뭐람. 큰 싸움이 안 일어나고 이 정도에서 넘어가서 다행이긴 한데.’
그때, 아까부터 말이 없던 세비스가 어두운 낯빛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낯빛이 푸르딩딩했다. 그는 사실 노엘과 대화를 나눌 때부터 몸이 안 좋아지는 낌새를 느꼈다.
그래도 둘을 놔두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버티고 있었건만, 카를 단장과 루카의 대화를 들으며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에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사지에서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노엘도 모자라서 저 재수 없는 옥장판 사장까지 실비아와 꾸준히 알고 지냈다니. 심지어 대화로 미뤄보아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옥장판 사장 혼자서 난리 치는 거면 좋겠는데…. 근데 실비아 님의 반응을 보니 그건 또 아닌 거 같아.’
불길한 가정을 하는 세비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이 왜 이런 거지. 단순 몸살인지, 아니면 성체가 되려고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크게 몸살을 앓고 나면 다음 날 성장하곤 했으니까.
연거푸 충격을 크게 받아서 이런 걸까. 어쨌든 이 상태론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티고 있긴 무리였다. 그는 실비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