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구국?!”
“이놈들! 얌전히 망토 안에 들어가 있어.”
기둥에 숨어서 대기하던 실비아는 통창으로 들어온 퍼랭이와 참둘기를 단번에 낚아채곤 그것들을 망토 안에 급하게 숨겼다. 망토 속에 들어간 앵무새가 부리만 밖에 내밀고 소리쳤다.
“알았대. 온대. 좀 있으면…!”
아마도 편지 내용인 듯한데, 발에다 묶어서 가져올 것이지 부리로 떠들건 뭐람. 실비아가 화들짝 놀라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쉬이, 착하지. 부리 닫고 얌전히 들어가 있어라, 좀.”
실비아는 앵무새의 부리를 잡고 진정시켰다. 자유분방한 부리에 너무 당했더니 또 제 이름을 크게 외칠까 봐 겁이 난 그녀는 옥수수를 급여하며 거듭 조용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곤 두 남자에게 인사할 정신도 없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 새끼들을 잡는 순간 밖을 힐끗 봤는데, 루카 부자가 카페 쪽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봤나? 아니면 새 새끼가 여기로 들어와서 그냥 쳐다본 건가? 모르겠다, 일단 튀고 보자!’
지팡이를 연달아 헛짚으며 실비아가 허둥지둥 발을 옮겼다. 차분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걸음을 걸으면 될 텐데, 머릿속에 경보가 켜진 상황이라서 침착한 판단이 불가했다.
“실비아 님, 방금 낚아챈 거 참둘기 아녀요? 앵무새는 또 뭐고, 잠깐! 어디 가세요?”
“실비아 님!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같이 있던 두 남자는 영문을 모르고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은 채 열심히 뒷문으로 뛰었다. 다행히 반대편 계단이 있어서 루카 부자를 피할 수 있을 듯했다.
아무 설명도 못 들은 남자 두 명은 대답 없는 실비아의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실비아 님! 그러다가 넘어지십니다.”
“실비아 니임! 어디 가세요?”
“아휴, 오늘 만남은 여기서 파할까요? 허억, 저 이제 던, 던전을!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실비아가 헐떡이며 외치자 두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 몸으로 당장 어떻게 던전을 간단 말씀이십니까?”
“실비아 님, 걸음 좀 멈춰봐요!”
실비아는 뒷길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두 남자에게 따라잡혔다. 평소의 실비아라면 모를까, 지금은 상태 이상이 걸려있는지라 도망치기가 쉽지 않았다. 실비아는 헉헉거리며 죽을 듯이 헐떡였지만, 몸이 멀쩡한 두 남자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으아, 이거 놔!”
뒷골목에서 두 남자에게 양팔을 제압당한 실비아는 버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했다. 기실 두 남자는 이성을 잃은 실비아를 제어하려고 부드럽게 팔짱을 낀 거지만,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는 실비아가 느끼기엔 그랬다.
도망,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던가. 골목 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당신들! 돈 없어 보이는 할머니한테 지금 뭣들 하는 짓인가?”
절망스럽게도 루카의 아버지인 카를 단장의 목소리였다. 다행히 그는 망토를 쓴 데다가 상태 이상에 걸린 실비아를 불쌍한 할머니로 본 모양이었다. 돈 없어 보이는…이 불쌍하단 의미와 동의어 맞겠지? 하여튼 그랬다.
저 사람이 나타났다는 건 근처에 루카도 있단 소리. 실비아가 격하게 몸부림치자 노엘과 세비스가 당황해 팔을 놓았다. 팔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경계 태세를 갖춘 실비아는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찾았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인데다가 카페로 다시 올라가는 길목은 두 남자가 막고 있었고, 앞에는 카를 단장. 도망칠 곳이 없었다.
“저희는 불한당들이 아닙니다. 이분은 모르는 할머니가 아니라 저희 일행이고요.”
노엘은 정중하게 항변했지만, 할머니를 양쪽에서 제압하고 있는 모습을 본 카를 단장은 쯧쯧 혀를 차며 물러서지 않았다. 세비스는 실비아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번 축제 때 봤던 마법사단장 아닌가요?”
“맞아.”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곤란하네요.”
그때 카를 단장 뒤에서 실비아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그게 말이다….”
붉은 머리에 황금안, 루카였다. 그는 아버지를 설명을 듣곤 어슬렁거리며 골목 안으로 진입했다. 금색 눈이 가늘어지더니 루카가 한심하단 듯 그들을 바라봤다.
“쯧쯧, 그래, 이놈들아. 돈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골라야…. 잠깐, 혹시 실비아?”
금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비아가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갈색 머리카락이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는 데다가, 아무래도 루카는 실비아가 상태 이상 <영광의 상처>에 걸렸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회색 망토를 입었음에도 그녀를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응? 아들아, 설마 네가 말한 여자가….”
망했다! 실비아는 카를 단장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저 입에서 나올 말을 무슨 미친 짓을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악, 아악! 아이고!”
“실비아 님, 괜찮으세요?”
“괜찮으십니까, 실비아 님!”
두 남자가 깜짝 놀라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루카도 놀라서 황급하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를 단장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아들의 뒤를 따랐다. 결국 네 남자가 그녀를 에워쌌다.
루카가 가까이 다가오자 세비스가 그를 경계했다.
“당신은 옥장판 사장 아냐? 당신이 왜 우릴 아는 척해.”
“뭐? …이게 누구야. 검은 늑대족이네. 맞아, 실비아 집사! 하, 머리가 좀 많이 컸다?”
뒤늦게 세비스를 알아본 루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그는 많이 자란 세비스를 몰라봤었는데, 세비스가 먼저 아는 체를 하는 바람에 눈앞의 검은 머리 늑대수인이 예전에 봤던 꼬맹이 세비스인 걸 깨달은 것이다.
루카와 세비스가 서로를 알아보든 말든, 그건 지금 실비아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비아는 혹시나 노엘과 루카가 서로가 실비아랑 무슨 사이인지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루카의 날카로운 시선이 순간 노엘과 마주친 순간, 실비아는 다시 악을 질렀다.
“으악, 악, 나 죽어!”
차라리 말한 대로 진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닥에 드러누울 게 아니라 벽에 머리 쾅 박고 죽어버릴걸. 실비아는 게임 빙의 내도록 할 생각이 없었던 스스로 목숨 버리기를 처음으로 떠올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카를 단장과 루카가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계속 아픈 척하는 건 멈출 수 없었다.
“아이고, 아악, 나 죽네!”
실비아가 엄살을 있는 대로 부리며 크게 신음하자 네 남자가 걱정해왔다. 이 난관을 어떻게 타계하지? 도저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상태 이상만 아니었어도 스킬을 써서 탈출할 텐데.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상태 이상이 있는 상태에서 써볼까?
잠시 생각한 실비아는 곧 몸부림치는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없어진 상황에서 남자들끼리 통성명을 하면 어쩔 것인가. 거기다가 이 상태에서 스킬을 써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실비아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카를 단장을 제외한 세 명은 그녀를 서로 업으려고 난리였다.
“실비아 님! 병원으로 가요.”
“신성력으로 치유하겠습니다. 실비아 님, 신전으로 가시죠!”
“아버지, 주치의를 불러야겠어요!”
“이게 무슨 상황인 게냐.”
“아니, 괜찮아요, 아이고, 그냥. 잠시 쉬면….”
안 그래도 상태 이상으로 목 상태가 안 좋았는데 비명까지 연거푸 질렀더니 실비아의 목소리가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갈라졌다. 스스로 목숨 버리기도 타이밍이 있다고. 실비아가 탈 날까 봐 단단히 에워싼 네 남자로 인해 이제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갈 길도 텄다, 완전 텄다.
그러나 늘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닥친다고 하던가. 실비아가 애써 루카와 카를 단장의 입을 막기 위해 앓는 소리를 내며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가운데, 공중에서 실비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새 새끼는 망토 안에 단단히 넣어놨는데, 이 망할 목소리는 누구지?
“실비아! 실비아 어딨어!”
얼굴 모를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실비아의 이름을 크게 외치자 네 남자의 시선이 공중으로 향했다. 실비아도 잠시 비명을 자제하며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상태 이상으로 인해 눈을 가늘게 떠야 분간이 가능했다. 저 먼 상공에서 날아오는 하늘색 머리, 그의 등 뒤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잠깐. 날개? 하늘색 머리에 날개 달린 남자는 실비아가 알기론 단 한 명, 블루뿐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블루가 날개도 펼칠 수 있었다니.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쟤가 지금 이 난리 통 한구석으로 들어오려고 한단 끔찍함이 먼저였다. 거기다가 차라리 드래곤의 언어로 실비아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면 될 텐데. 엘리셔스 월드에서 며칠 인턴십 했다고 블루는 어눌한 제국어로 실비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하필 배운 걸 여기다가 써먹냐고!’
“오, 오지 마! 이런 씨…!”
실비아는 격하게 도리질 치며 블루를 바라봤지만, 무슨 상황인지 알 리 없는 블루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차라리 기절하는 게 훨씬 나을 거 같은 상황이었다.
‘아니지?’
실비아는 번뜩 이 상황을 타개할 묘안이 떠올랐다. 세비스, 노엘, 루카는 자신이 던전공략을 해야 한단 걸 알고 있으니 블루를 던전 인도자로 소개하면 될 것 아닌가.
실제로 블루랑은 아직 진한 관계는 가진 적 없으니 켕길 것도 없었다. 역하렘 여주로 모럴 없이 살다 보니 합체하는 거 아니면 진도로 치지 않게 된 문란 여주 실비아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는 다가오는 블루에 대해 설명하려고 네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 저….”
그러나 실비아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블루의 모습을 보는 루카와 카를 단장의 눈빛이 누구 하나 잡아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야, 드래곤? 아버지, 저거 설마 드래곤입니까?”
“그런 거 같구나. 불가침 조약을 맺은 지가 언젠데, 우릴 뭘로 보고 제국 상공을 휘젓고 다녀? 아주 요절을 내버리든가 해야겠어.”
부자의 대화를 들은 실비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오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절절하게 외쳤다.
블루는 흉흉한 부자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여전히 실비아의 이름을 쩌렁쩌렁 외치며 공중을 날았다. 그는 지붕 위에 앉은 뒤 날개를 접곤 아래를 향해 외쳤다.
“실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