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아, 던전을 가신다고 하셨었죠. 제가 일정이 없었다면 함께 도와드리러 갔을 텐데요.”
“아, 아뇨. 괜찮아요. 우선 바깥에 갈 만한 카페가 있나 찾아보죠.”
몸이 아프니 놀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블루가 좀 있다가 분수대로 올 테니 잘 보이는 곳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리면 될 듯했다. 이 세 명의 조합도 나름 재밌고 좋으니까. 실비아 빼고 두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눈이 침침한 실비아와 달리 둘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적절한 카페를 찾았다. 분수대가 보이는 2층 카페에 자리한 셋은 바깥을 여유롭게 쳐다보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다.
신탁을 받았다는 공통점과 던전 공략을 함께 한 경험이 있었기에 대화는 즐겁게 흘러갔다. 잠시 림보가 황궁 감시소에 있는 얘기를 할 때는 침울해졌지만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정확히는 실비아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고 생각했을 뿐, 둘의 사정을 달랐지만.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집에 돌려놓은 빨래도 널어야 하는데.’
세비스는 이대로 집에 가기 싫어서 둘과 함께 억지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 맘이 아파져 왔지만, 집에 가고 둘만 남는다고 상상하니 그건 더 괴로울 것 같았다.
실비아가 뭘 하든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이성과 달리 몸은 떠나길 거부했고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화거리를 계속 꺼내기 바빴다.
‘눈치 없는 심성은 몸이 자라도 한결같구나.’
노엘은 억지로 미소를 유지한 채 세비스와 대화를 나눴다. 만면엔 성자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테이블 밑에 내려간 주먹엔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실비아와 단둘이 있고 싶은데 눈치 없이 껴드는 세비스 때문에 은근히 짜증이 나 있었다. 그러나 신관 체면에 어떻게 대놓고 꺼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완곡히 돌려 말할 수밖에.
“잠깐,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실비아는 부축해주겠다는 둘한테 거듭 사양하곤 지팡이를 짚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진 순간 노엘은 세비스를 향해 허, 하고 짜증 섞인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순간 나타났던 헛웃음은 금방 사라지고 초록색 눈엔 다시 온화함이 감돌았다.
뜻 모를 표정에 세비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방금 뭐지? 잘못 본 건가?
“세비스 님, 바쁜 용무는 다 끝나셨나 봅니다.”
“아아, 네. 다 끝났어요.”
세비스가 곁에 둔 수세미 세트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노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시군요. 성체가 하루빨리 되시려면 일찍 주무셔야 할 텐데요. 혹시나 잘못 자라실까, 걱정되네요.”
붉은 눈이 환한 빛이 들어오는 통창으로 향했다. 아직 한참 대낮인데, 일찍 자라니, 완전 애 취급이었다. 세비스는 눈을 깜빡이며 난 네 말의 의미를 전혀 못 알아들었어요,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하루쯤이야, 뭐. 괜찮아요.”
이쯤 되니 노엘의 불편한 심기를 세비스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일부러 눈치 없는 척 꿋꿋이 버텼다. 지그시 바라보는 초록색 눈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라고 이 자리가 편한 건 아니었으나 가슴이 시키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세비스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이 악물고 노엘의 흉흉한 눈빛을 모른 척했다.
“하.”
기가 막힌 듯 헛웃음 친 노엘은 세비스가 실비아의 집사라는 걸 떠올리며 짜증을 티 내지 않고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려고 노력했다. 그는 실비아에게 집 열쇠를 준 사실을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세비스 님. 나중에 실비아 님에게 들으시겠지만, 좋은 결정 하시길 바라요.”
“네?”
세비스의 되물음에 노엘은 집 얘기를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 님이 말할 테니 굳이 자신이 직접 세비스에게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거기다가 사실 세비스는 그에게 있어서 원치 않는 군식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신이 이사를 오라고 그를 설득하는 그림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노엘은 간결하게 답하곤 차를 음미했다. 세비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아이스 초콜릿을 홀짝였다.
잠시 후 실비아가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으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녀는 뭔가 어색한 테이블 분위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실비아 님. 잠시 대화거리가 떨어져서 쉬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럼요. 입도 잠시 쉬어야죠.”
노엘과 세비스는 실비아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잠시 두 사람을 차례차례 살핀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아니라니까 그렇게 믿어야지, 별수 있겠는가.
“그래서 말이야, 그 악어를 내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참 얘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던 실비아의 시선이 무심코 통창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내부 공기가 살짝 갑갑했던 실비아는 낑낑거리며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실비아 님, 제가 열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오늘은 몸 상태가 영 아니라서….”
상태 이상에 시달리는 실비아를 안쓰러워한 노엘이 그녀의 손을 내리고 대신 창문을 열어주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사이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려왔다.
앞머리를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바람을 여유롭게 즐기던 실비아는 곧 익숙한 이름이 아스라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바람을 타고 제 이름을 애타게 외치는 낯선 목소리가 귓구멍으로 꽂혔다.
“실비아-, 어딨어?”
‘뭐야, 상태 이상 때문에 귀도 이상해진 건가. 이 목소리는 루카 목소리도 아닌데. 루카가 내 이름을 쩌렁쩌렁 외치고 다닐 리도 없고 말이야.’
블루인가? 하지만 블루의 목소리를 자기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이 골초 같은 목소리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던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상태 이상에 걸려있으니 환청이 들린 데도 이상할 게 없긴 했다. 그녀는 파리 쫓듯 귀를 털고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걸 무시했다.
그때 백화점 쪽을 살피던 실비아의 눈이 경악으로 홉떠졌다. 붉은 머리통 두 개. 멀리서 봐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머리의 루카 부자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호사스러운 4두 마차는 어디 놔두고 부자는 맨몸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해서 산책이라도 하는 걸까.
실비아는 루카 부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절절하게 애원했다.
‘마차 타고 얼른 집에 가 줘! 이 상황에서 맞닥트리면 끝장인데!’
실비아가 바깥을 살피는 사이 테이블에서 어색하게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쥐어 짜내며 대화를 나누던 노엘과 세비스가 한순간 대화를 멈췄다. 그중 노엘이 미간을 좁히며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님, 누가 실비아 님을 찾는 거 같네요?”
“그러게요. 실비아 님을 누가 부르는 거 같은데.”
“뭐?!”
둘 다 들었다니, 그렇다면 환청이 아니었다. 실비아의 눈이 급히 창밖을 향했다.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니 루카 부자도 실비아를 찾는 목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돌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있었다.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근원이 어딘지 확실해졌다. 공중! 공중에서 들려왔다.
“실비아! 실비아 어딨어?!”
‘시발, 대체 어떤 미친놈이 계속 내 이름을 부르는…. 퍼랭이?!’
멀리서 파란 점이 보이더니 점점 가까워지며 형체가 드러났다. 파란 날개와 화려한 색색의 몸통, 블루의 전서구. 앵무새 퍼랭이였다.
기가 막히게도 그 새 새끼는 여기저기 쩌렁쩌렁 실비아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를 찾았다.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루카 부자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멈춰서 위를 쳐다볼 정도였다.
“뭐야, 저건?”
“앵무새네!”
실비아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급하게 통창 가까이 있는 기둥 뒤로 숨었다. 저 새 새끼가 실비아를 알아보고 카페로 들어오는 순간 새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루카 부자도 따라 들어올지도 몰랐다. 블루가 앵무새를 전서구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실비아! 어딨냐고! 나 목 아파! 여기 있다며?!”
앵무새가 원을 크게 그리며 하늘을 빙빙 돌자 사람들이 혀를 차기 시작했다.
“불쌍한 새!”
“실비아인지 뭔지, 주인이 새를 엄청 고생시키는구만.”
실비아가 안절부절못하자 노엘과 세비스가 영문을 몰라 걱정해왔다.
“실비아 님, 왜 그러십니까? 저 새가 찾는 게 설마 실비아 님이신가요?”
“실비아 님! 땀을 왜 그렇게 흘리세요? 몸 상태가 심각해 보여요. 제가 저 앵무새한테 이리 오라고 손짓해 볼까요?”
“쉬, 쉿!”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속삭인 실비아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바깥의 동향을 탐색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보니 루카 부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카페 밑까지 다가온 모양이었다.
“뭐야, 실비아? 설마 저 새 새끼가 말하는 게 실비아는 아니겠지.”
“아들아, 네가 아는 이름이니?”
“네. 아버지. 제가 요즘 만나는 여자애 이름이 실비아예요. 근데 걘 오늘 시간이 없다고 했었는데…. 저 새 새끼는 실비아가 데리고 다니는 새가 아니거든요. 아마 동명이인 같습니다.”
루카의 대답에 카를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 실비아란 이름이 은근히 흔한 이름인가 보구나. 이 아비도 최근에 실비아라는 귀엽고 똘똘한 친구에게 사인을 해준 적이 있단다.”
“아버지, 제가 알고 있는 실비아도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똑똑한 데다가 아름다운 건 기본 장착이죠. 제가 선택한 여자니까요.”
“허허, 녀석.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구나.”
루카의 칭찬에 잠시 뿌듯해졌던 실비아는 곧 현재 처한 상황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칭찬한다고 마냥 좋아할 게 아니었다. 노엘과 루카가 대면하는 순간 엄청난 참사가…. 그녀의 생각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앵무새 퍼랭이가 날카로운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2층 카페를 향해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실비아!”
‘저 새 새끼가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기둥 뒤에서 살짝 눈을 내민 실비아는 퍼랭이의 등 위에 타고 있는 참둘기를 발견했다. 참둘기는 실비아를 오래 본지라 그녀의 체취를 감지하고 쉽게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두 전서구의 이상한 협동에 실비아의 낯빛이 울그락불그락했다. 저놈의 참둘기, 전서구 노릇을 하라고 보냈더니 웬 골칫덩이를 몰고 왔다.
“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