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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51화 (251/372)

251화

또한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 걸리는 순간 두 명의 공격을 동시에 받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기왕지사 뭉쳐있는 적은 피하고 싶은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나 할까.

‘둘 다 마법을 잘하는 데다가 얌전한 성격은 아니니, 화가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반면에 세비스는 던전을 간다고 거짓말한 게 좀 찔릴 뿐이지, 마주친다고 해서 별다른 큰일은 없을 것 같았다. 거짓말을 했단 것에 세비스가 실망하긴 하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둘러대면 된다. 설령 의심하더라도 별수 없는 노릇이고.

띵-.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울리고 실비아는 어깨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왔다. 불안함을 안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는 세이브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직까진 아무 일 없었으니 이쯤에서 세이브를 해놔야겠어.’

세이브를 하고 시스템 창을 끈 그녀는 어쩌다가 제 신세가 이렇게 됐나 싶어 한숨을 흘렸다.

‘아이고 머리야. 왜 하필 몸 상태가 엉망일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망할 놈의 역하렘 게임! 남주만 여럿 공략하는 줄 알았지,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될 줄 알았냐고.’

상태 이상 <영광의 상처> 때문에 걸을 때마다 실비아의 입에서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한참을 노엘의 부축을 받아 거북이걸음으로 걸어간 실비아는 겨우겨우 백화점 출구에 다다랐다. 이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노엘 님? 노엘 신관님 맞죠? 수도에서 노엘 님을 뵐 줄은 몰랐네요.”

“아! 세비스 님. 여기서 뵙네요.”

세상에나, 세비스가 1층에 있었던 것이다.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뒤돌지 않았다. 굳어버린 그녀를 놔둔 채 두 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반가운 얼굴의 세비스와는 달리 노엘의 얼굴엔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수도엔 무슨 일이세요?”

“아, 수도 신관 협회를 돕는다고 한 달 전부터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놀랍군요. 실비아 님에게 많이 자랐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는데, 이 정도로 성장하셨을 줄이야. 먼저 인사하지 않으셨다면 몰라봤을 것 같습니다.”

노엘의 놀라워하는 눈빛에 세비스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네. 근데 아직 성체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정식으로 의식을 받은 게 아니라서 속도가 느리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일반 성인 남자랑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요. 조만간 성체가 되실 것 같습니다.”

노엘은 감탄하면서도 속으로 살짝 씁쓸한 마음을 가졌다. 실비아에게 들었을 때는 경계하면서도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직접 대면해 보니 세비스는 거의 성인 남자 같았다. 아이 같던 예전과 달리 이 정도면 꽤 위협적인….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세비스와 내가 적대 관계도 아닌데. 위협이 된다고 느끼다니, 나도 참 못났군.’

세비스의 기분도 노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 노엘의 뒷모습을 봤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인사를 건넸지만, 막상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괜히 아는 체했나 싶어졌다.

실비아 님에게 많이 자랐다는 소식을 들었다니? 그 말인즉슨 노엘과 실비아가 꾸준히 연락했단 소리였다. 예전 오아시스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자 그의 가슴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비스는 애써 티 내지 않고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네. 조만간 성체가 되겠죠. 그게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노엘 님은 그럼 이 근처에 사시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노엘의 대답에 세비스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노엘은 뒤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실비아를 불렀다.

“실비아 님! 여기로 와보세요. 세비스 님이 백화점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어? 실비아 님이 왜 여기에?”

붉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든 세비스가 노엘이 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 이런…. 그냥 둘이 대화 나누는 사이에 어디 숨을 걸 그랬나. 큰일 났네.’

실비아는 한숨을 푸욱 내쉬곤 어쩔 수 없이 뒤돌았다. 노엘은 실비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부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솔직하게 말하기 민망해서 거짓말 해뒀다고 노엘 님에게 말해 둘걸.’

실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지, 후회해봤자 뭐 하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는 노파… 아니, 실비아의 모습에 세비스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 나왔다.

“실비아 님, 어째서 아직 수도에 계시는 거예요?”

“아, 그게…. 예상치 못한 일정이 생겨서 던전 가는 게 미뤄졌어. 이것저것 하다가 예배당에 들렸더니 노엘 님이 있더라. 하하….”

실비아는 주절주절 변명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변태치곤 은근히 부끄럼을 타는 사람이었기에 같이 사는 식구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솔직하게 말하기가 꺼려졌다.

이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세비스가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지도 의문이었다. 아무리 일정이 있다 해도 밤새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건 설명되지 않으니까.

‘노엘과 내가 수상한 사이라고 의심해도 어쩔 수 없지. 휴, 애초부터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실비아의 말에 세비스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입을 뻐끔거리며 무슨 말을 할 듯하더니 곧 그의 얼굴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군요. 전 무슨 사정이 있으신가 했네요.”

“아냐, 갑자기 일정이 생기는 바람에…. 집에 다시 들릴 틈이 안 나서 이렇게 백화점에서 널 마주치게 됐네.”

세비스는 시선을 잠시 위로 두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실비아 님. 설마 저한테 보고하지 않았다고 미안해하시는 건가요? 실비아 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저한테 다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제 도움이 필요할 때 저를 부르시면 된다고. 그거 아니면 실비아 님이 뭘 하시든 저는 관여 하지 않아요.”

“어…? 그래?”

“네. 처음엔 위험할까 봐 걱정했던 거지만, 이제 알아서 잘하고 계시니까요.”

머쓱해진 실비아가 제 뺨을 긁적였다. 배신감에 치를 떨 줄 알았더니, 세비스는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초반부의 모습을 떠올리며 늘 잊고는 하지만, 수도에 온 후의 세비스는 무척 어른스러워졌다. 실비아는 왠지 지레 도망칠까 걱정하던 자신이 민망해졌다.

‘내가 대체 무슨 오버를 한 거야. 걱정한 거랑 달리 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엘과 어제 뭘 했는지, 루카랑은 어떤 사이인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야.’

실비아의 짐작과는 달리 세비스는 속으로 무척 놀란 상태였다. <잊혀진 신전>에서 의도치 않게 밀회 장면을 본 후로 노엘과 실비아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에 와서까지 만남이 이어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번뇌의 날을 거치며 어느 정도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충격은 잠시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라앉다 못해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영웅의 옆에서 그를 도와주라는 신탁을 받았기에 엄한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건 머리로는 알았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사를 그르쳐선 안 되니까. 하지만 이성과 감정은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잘 지내는 실비아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속으로 씁쓸함을 삼킨 세비스의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그는 실비아의 몰골을 뒤늦게 파악하곤 경악했다.

“실비아 님?! 꼴이 왜 또 이래요?”

“죄송합니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노엘이 고개를 숙이며 세비스에게 사과했다.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저었다. 상태 이상의 디버프 때문에 황천 너머에서 손 흔드는 노파처럼 휘젓는 속도가 느렸다.

“아, 아니. 노엘 님이 왜 사과하세요! 으응, 이게 어제 일정을 소화하느라 또 너무 무리를 했더니. 휴우, 알잖아. 하루 지나면 다시 멀쩡해지는 거! 신께서 무리하지 말라고 자제시키는, 뭐 그런 거라고나 할까. 감수해야지.”

“네? 어디 노역장에 끌려갔다 오신 건 아니죠? 어휴, 완전, 제대로….”

할 말이 많아 보였던 세비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을 삼켰다. 그의 표정으로 뒷말을 짐작한 실비아가 제 얼굴을 쓰다듬으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세비스 표정을 보니 얼굴을 제대로 조졌나 보구나.’

세비스가 어른스럽게 대처한 덕에 삼자대면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의 속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지만, 겉으론 전혀 티 나지 않았기에, 실비아는 안심하며 밝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실비아 님은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키가 더 크니까요.”

“아니에요, 노엘 님. 더 어리고 쌩쌩한 제가 부축할게요.”

“어어, 발이 안 닿아!”

잠시 노엘과 세비스는 서로 실비아를 부축할 테니 그쪽은 쉬시라고 부드러운 언쟁을 벌였다. 키가 큰 남자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축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실비아의 발이 동동 떴다.

“잠깐, 부축은 안 해도 돼!”

“실비아 님. 사양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모습이 완전…. 아닙니다.”

“그래요, 실비아 님. 이 꼴론…. 하여튼 부축받으셔야 해요.”

둘은 말을 아꼈지만, 실비아의 몰골은 상당히 심각했다. 결국 조그만 몸 양쪽에 팔짱을 낀 두 남자가 그녀를 공중에 둥둥 띄운 채 백화점 밖을 나섰다. 실비아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안심하면서도 경계심을 풀지 않고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아직 루카 부자가 백화점에 있지. 그 둘은 마주치면 좋게 넘어가기 힘들 거야.’

“어디 가시게요?”

“응? 아, 그냥 백화점에서 최대한 멀…. 아니다, 잠시 카페 같은 곳에 머무르다가 몸이 괜찮아지면 던전 공략을 갈까 싶어서.”

실비아의 말에 노엘이 함께 가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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