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50화 (250/372)

250화

실비아가 거절하려는 노엘의 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엘은 눈치껏 입을 닫고 사장의 안내에 따라 실비아를 부축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상황을 보아하니, 망토를 걸친 데다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하게 선 실비아를 할머니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순간 어이가 없긴 했지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는 법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 앉으세요. 어머님 오래 서 계시면 무릎 시리잖아요.”

실비아네를 안내한 사장은 훈훈한 일을 하나 했다는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사라졌다. 이상한 오해를 받은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둘은 달콤한 케이크와 음료수를 시키고 소곤소곤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노엘 님, 이거 맛있어요. 먹어봐요.”

“실비아 님께서 맛집을 잘 찾은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선 크게 떠들고 싶었던 실비아지만, 목소리가 쉬어서 큰 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거기다가 기껏 사장한테 오해받아 일찍 들어왔으니 철저하게 할머니 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훈훈한 둘의 모습에 옆 테이블 중년 아주머니들이 속닥거렸다.

“잘생긴 청년이 어머니도 잘 모시네.”

“어휴, 그러게. 요즘 젊은이 같지 않아. 살뜰히 챙기는 것 봐.”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원래 자기 얘기는 잘 들린다고, 아주머니들의 수다는 노엘의 귀에 다 들어갔다. 본의 아니게 효심 깊은 청년이 된 노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기다리지 않고 일찍 들어온 건 좋긴 한데, 이래서야 간만에 둘만의 시간인데 마음 편히 즐길 수가 없네요.”

“크흣, 죄송해요. 노엘 님. 이런 꼴이 되지만 않았더라도….”

실비아가 케이크를 먹다 말고 컥컥대며 대답했다. 상태 이상 때문에 입가로 빵이 계속 흐르는 기분이었다. 노엘은 급히 냅킨을 들어 빵가루가 묻은 실비아의 입을 정돈해 주었다.

“아닙니다. 이게 다 욕구를 못 참은 제 불찰입니다. 실비아 님 몸이 다 삭아버릴 정도로 해댔으니….”

노엘은 입술을 깨물며 침음을 흘렸다. 이 꼴이 될 정도로 실비아 님을 몰아세우다니. 전부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니에요, 노엘 님. 이건 정말 하루 지나면 괜찮아지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우리 재밌게 놀아요.”

“그건, 후우…. 네. 그래야죠.”

노엘은 침울한 표정으로 실비아의 턱에 손을 받친 채 케이크를 먹여주었다. 늘그막에 아들내미에게 효도 받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가 아니라, 노엘과 이렇게 정상적인 데이트를 하니까 너무 행복했다.

경로우대 할인을 받아 저렴하게 디저트를 즐기고 나온 둘은 점심시간이 지나 다소 한적해진 백화점 내부를 산책하듯이 여유롭게 걸었다. 그때, 지팡이를 짚으며 열심히 재활 치료를 하던 실비아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어떤 물건을 찾고 계세요?”

“수세미 좀 사려고요. 전단지에서 묶음 할인 행사를 보고 온 건데요…. 할인 행사는 이미 종료됐나요?”

실비아는 잘 안 돌아가는 목을 삐걱거리며 억지로 돌렸다.

저 살림꾼 같은 멘트하며, 검은 머리통 위에 쫑긋하게 솟은 검은 귀! 마주칠 거라고 생각조차 안 했던 인물인 세비스였다. 3층 디저트 가게 근처에 상시 할인 매장이 있었는데, 세비스가 ‘990 행사’라고 적힌 매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고심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쟤는…. 이제 살만해졌는데도 저렴한 것을 찾아다니다니, 내가 비밀상점에서 과소비한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나. 그건 그렇고 나를 알아채기 전에 얼른 돌아 나가야겠어. 내가 이미 던전에 간 줄로 알고 있을 텐데 마주치기라도 하면 상황이 이상해지지.’

실비아가 목을 돌리곤 뒷덜미를 부여잡고 있자 옆에서 부축 중이던 노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비아 님, 어디 편찮은 곳, 아니 불편한 곳 있으세요?”

“아, 그게 아니라…. 건물 안에 오래 있었더니 가슴이 좀 답답하네요.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고 싶어요.”

실비아가 지팡이로 바닥을 여러 차례 두드리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노엘이 냉큼 그녀를 부축해서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걸으며 힐끗 뒤를 돌아보니 세비스는 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뒷모습을 보이며 판매원과 여전히 대화 중이었다.

‘휴, 다행히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갔네. 백화점에서 최대한 멀어져야겠어. 루카를 볼까 봐 걱정했지, 설마 세비스를 마주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코너를 돌아 세비스가 안 보이는 곳까지 오자 엘리베이터 여러 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인파가 바글바글했다. 잠시 후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 뒤에 붙어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실비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금빛 눈동자에 타는 듯한 붉은 머리, 루카였다!

다행히 루카는 회색 망토를 입은 구부정한 실비아를 바로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인파 사이에 둘러싸인 채 일행과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아, 진짜. 뭔 놈의 새끼들이 죄다 백화점에만 몰려있어.”

“루카야. 사람들 많을 땐 늘 말조심 하라고 했지?”

사람들 사이에 가려져 일행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로 보아 중년의 남자인 듯했다. 저번에는 VIP룸에 가는 바람에 외따로 떨어진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기에 여기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에나, 왜 VIP룸으로 안 가고 여기서 내리지? 산 넘어 산이로구나.’

실비아는 온몸을 오돌오돌 떨며 노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심상찮은 그녀의 상태에 노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실비아 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이 상태로 다녔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사,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지럽네요. 앉아서 쉬고 싶어요.”

아무리 망토를 입고 있어 얼굴이 잘 안 보이는 상태라지만 루카가 내리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노엘은 고개를 끄덕인 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이 다 내리기 전에 실비아를 복도 끝에 있는 벤치로 데리고 갔다.

구석진 벤치로 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루카는 매장들이 늘어서 있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행의 모습도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뒷모습을 보니 루카랑 똑같은 붉은 머리와 건장한 체격. 뭐로 보나 루카의 아버지 카를 단장이 분명했다.

이 순간에 황궁 개방 축제 때 봤던 웅장한 메테오 마법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리고 진짜를 보여줄 수도 있다고 했던 루카 아버지의 말…. 실비아는 푸르딩딩해진 낯으로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시발, 뭐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다 있담. 가만, 저번에 루카가 보낸 편지에 내 얘기를 아버지한테 했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마주치면 두고두고 겜생이 힘들어질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걸.’

급하게 뛰어가 근처 카페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 온 노엘이 그녀에게 내밀었다. 실비아의 시체 같은 낯빛에 노엘의 안색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제가 괜한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실비아 님의 몸이 많이 상한 걸 알았을 때 집에 바로 보내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아까 말했듯이 하루 버티면 괜찮아져요. 노엘 님은 오늘까지 시간이 나신다고 하셨잖아요. 오래간만에 봤는데 어떻게 바로 헤어져요.”

“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긴 합니다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군요.”

“그럼, 달달한 거 하나만 사 와 줄래요? 잠깐, 이 상하지 않을 만한 부드러운 걸로 부탁해요.”

실비아의 부탁을 받은 노엘은 주전부리를 사기 위해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근처 기둥 뒤에서 대기 중이던 참둘기가 뒤뚱뒤뚱 걸어왔다.

“구구국….”

“옳지. 잘 숨어있었구나.”

미니 백을 열어 참둘기에게 옥수수를 급여한 실비아는 블루에게 보낼 편지를 급하게 써 내렸다. 내용인즉슨 지금 유토피아 백화점에 있으니 그 근처 분수대로 2시간 후에 오란 거였다.

몸 상태도 엉망이라 더는 노엘과 섹스할 여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데이트를 계속할 상황도 아니었다. 근처에 세비스와 루카까지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사바나 같은 백화점에서 무슨 데이트를 하겠는가.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이 몸으로 계속 데이트를 하는 건 노엘에게도 못 할 짓이야. 계속 걱정하게 만들고 있잖아. 그냥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몸이 불편하다고 헤어진 뒤 블루랑 만나서 던전을 가는 게 낫겠어. 가는 길에 숙소 하나 잡아서 쉬면 몸이 나아지겠지.’

참둘기의 발에 편지를 묶은 실비아는 블루에게 날아가라고 명령했다. 참둘기는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더니 포르르 날아서 행인의 머리 위에 앉았다. 워낙 가벼운지라 눈치채지 못한 행인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렇게 참둘기는 실비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2시간 후니까, 우선은 노엘이 돌아오면 백화점을 나가서 어디 룸카페라도 가자고 하든가 해야겠다. 몸이 이런데 거기 가서 또 섹스하자고 하진 않겠지…. 휴.’

“실비아 님, 여기 엿 좀 드세요. 깨물지 마시고 천천히 녹여 드시면 됩니다.”

“아아, 네. 고마워요, 노엘 님.”

잠시 기다리자 노엘이 호박엿을 사서 돌아왔다. 노엘의 어깨를 다독인 실비아는 호박엿을 열심히 빨며 당분을 보충했다. 기력이 좀 돌아온 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아 엘리베이터에 탔다.

혹시나 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세비스나 루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백화점은 넓어서 엘리베이터 타는 곳이 반대편에도 하나 더 있었지. 세비스가 이쪽으로 오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장을 보고 있거나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탄 거겠네. 아마 루카는 한창 아버지와 함께 백화점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테고 말이야.’

실비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라리 세비스에게 들켰으면 들켰지, 루카한테는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카의 성격상 실비아와 노엘을 마주치게 되면 어떤 폭탄 발언이 나올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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