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 쉰 실비아는 기록 창을 끈 뒤 인벤토리를 켰다. 어제의 씨앗 수확량이 어마무시할 터였다. 노엘과 함께 한 어젯밤은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뜻깊었다. 그러나 이젠 독기 가득한 여주답게 씨앗 획득량을 살펴볼 차례.
우선 기존 노엘의 것은 33개. 고위 사제 몰래 집무실에서 노엘의 것을 오랄한 미치광이 짓을 한 덕에 한 번에 25개의 씨앗을 얻었다. 그 후 집무실에서 한 것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2개의 씨앗을 획득했고, <악마 옷>을 입으며 역할극을 한 것은 참신함에 높은 점수를 얻어 한 번에 3개, 연거푸 한 번 더 한 건 2개. 그리고 욕실에서 두 번 한 것은 총 2개. 그리고 침실에서 한 두 번의 섹스는 총 2개를 얻었다.
어젯밤에 획득한 씨앗은 무려 36개. 이로써 노엘의 씨앗은 총 69개가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야릇한 숫자인 69개의 씨앗이 인벤토리에서 보였다.
‘이 정도 개수면 씨앗 30개를 소모해서 얻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자>를 개방하고도 남겠는데?’
이미 <씨앗 상자> 안의 노엘의 씨앗은 완성된 상태. 인벤토리 속 레몬빛 씨앗을 꺼내 스킬 창에 가져다 대자 새로운 스킬을 획득하겠냐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씨앗을 30개 소모해서 새 스킬을 획득하겠어!’
하겠다고 속으로 말하자마자 스킬 창이 눈부시게 빛나더니 곧 새로운 패시브 스킬이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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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일으키는 자>
- 높은 확률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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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얻은 스킬은 패시브 스킬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만독불침>처럼 터치 없이 효과가 발동되는 스킬이었다.
‘기적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때 플레이어를 구해준다거나 하는 거겠지?’
실비아는 다시 인벤토리를 켰다. 내친김에 그동안 모아놓은 <루카의 씨앗 조각>을 사용해 <씨앗 상자>의 붉은 씨앗을 완성 시키기 위해서였다. <씨앗 상자>의 빈칸에 붉은 씨앗을 가져다 대니 노엘 것처럼 하나하나씩 늪처럼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빵빠레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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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심기 위한 <암흑가의 후계자 씨앗의 결정체>가 완성되었습니다. <씨앗 상자>의 칸이 두 개나 채워졌습니다.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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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나’가 아니라 고작 두 개겠지…. 앞으로 남주 3명의 씨앗을 최소 10개씩 더 모아야 세계수를 심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이 완성된다니, 절망적이었다. 씨앗만 모으면 끝이냐, 진엔딩도 봐야 했다. 남신의 말대로 진엔딩은 우선 남주들한테 할당된 던전을 하나하나 정화해서 이 세계의 오염된 기운을 다 제거하는 것일 터. 그러려면 남주 3명을 공략하는 것뿐만 아니라, 던전도 하나하나 박살 내고 와야 했다.
‘언제쯤이면 5명을 다 공략하게 될까. 고작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뭔가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
아득한 기분에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남은 루카의 씨앗으로 <대장간>을 완성하기로 했다. 상세 설명을 보니 이 또한 30개의 씨앗을 소모하면 만들 수 있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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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이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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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축하며 손뼉을 짝짝 친 실비아는 <루카의 씨앗 조각>을 얻기 위해 해야 했던 험난한 과정들을 잠시 떠올렸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겨 얻은 씨앗이니만큼 <대장간>을 만든 게 뿌듯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더니, 맞는 말이었구나.’
조금 이상한 비유였지만 실비아는 명언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상태 창을 켰는데 이상하게도 <대장간>은 안 보였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지?
인벤토리를 켜보니 <대장간>이라고 쓰여 있는 아이템 칸이 보였다. 아이템의 생김새는 대장간에서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쓰는 모루 모양이었다. 아이템을 터치하니 바닥에 미니 모루가 나타났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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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 모루 모양의 아이템이다. 여기에 무기나 방어구를 가져다 대면 크게 확대된다. 씨앗을 소모하여 무기를 업그레이드 가능. 약간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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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모루 위에 미니 망치가 얹혀있는 게 보였다. 실비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메시지를 곱씹었다.
‘저런…. 약간의 노동력? 과연 약간일까. 느낌상 열심히 쇠가 빠지도록 두드려야 할 것 같네. 책 아이템처럼 내 노동력을 갈취하는 아이템이 또 생겼구나. 정말 가지가지….’
거기다가 업그레이드하려면 씨앗이 필요했다. 루카와 노엘의 씨앗을 소모하면 불 속성이나 신성 속성이 생기는 걸까. 그녀는 우선 미니 모루 모양의 <대장간>을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노엘이 함께 있는 공간에서 쇳소릴 뚱땅거리며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던전에 가서 무기나 방어구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면 사용하면 될 듯했다.
루카의 씨앗은 이것저것 쓰고 나니 딱 18개가 남았다. 그리고 노엘의 씨앗은 방금 전 30개를 써서 이제 39개. 집무실에서 미친 오랄을 한 덕에 노엘의 씨앗이 많아 남아있었다.
‘이제 할 거 없지?’
창을 다 닫은 실비아는 우선 구석에 벗어 둔 구두를 마른 천으로 정성스럽게 닦았다.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니나 고민하던 실비아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인벤토리가 이제 완벽해졌으니 뭐든 넣을 수 있었다.
‘구두는 넣어두자. 이 몸 상태로는 무리야.’
몸이 안 좋으니 구두 대신에 편한 신발을 사는 게 나을 듯했다. 어제부로 실비아의 페이보릿 신발인 <롤러 운동화>는 사라졌으니 편한 신발이 필요했다. 힘없이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허리를 콩콩 두드렸다.
“아이고…. 나 죽네.”
<영광의 상처>를 잠시 잊고 있었다. 이런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허리를 수그려 구두를 닦을 게 아니었는데. 실비아는 신발장을 열어 지팡이 할만한 걸 찾았다. 뒤적거리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노엘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실비아를 찾았다.
“실비아 님?”
“아, 저 여기 있어요!”
실비아가 크게 외치자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가운을 입은 노엘이 나타났다. 그는 눈을 비비며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곧 실비아를 단숨에 안아 든 노엘이 그녀의 정수리에 제 뺨을 비볐다.
“놀랐습니다. 어디 가신 줄 알고…. 뭐 하고 계셨나요?”
“아, 지팡이 할 만한 게 있나 해서요.”
“네?”
노엘은 상체를 뒤로 물려 실비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실비아의 말이 아닌 몰골을 본 초록색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노엘은 그녀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주…. 저주를 당하신 건 아니시겠죠?”
“네? 아녀요. 그냥 어제 너무 무리를 했더니. 휴, 신께서 더 무리하지 말라고 신호를 주시는 건가 봐요. 드물게 무리를 하면 이런 상태가 되곤 하네요.”
“신께서 벌을 내리신 겁니까? 신이시여, 사도에게 어찌 이런 잔인한 벌을!”
실비아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노엘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제 상태가 흉흉하긴 한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노엘의 부축을 받은 채 소파에 앉았다. 지팡이 좀 구해달라고 하자 노엘이 건넛방으로 사라지더니 곧 나무로 된 옷걸이 집게를 가져왔다.
“샅샅이 뒤져봤지만, 지팡이 할 만한 게 이것 말고는 보이지 않더군요.”
“쓸만하네요. 아, 맞다. 몸을 씻어야 하는데….”
실비아의 말끝이 흐려졌다. 폭삭 쉬어버린 목소리에 노엘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올랐다.
“목소리가…. 어제 제가 너무 과욕을 부렸나 봅니다.”
“아니,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고…. 하루 정도면 나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실비아는 욕실로 가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기우뚱했다. 노엘이 그녀를 부축하며 욕실로 데려가 정성스럽게 씻기고 일일 효자 노릇을 했다. 노엘의 목욕 시중을 살뜰히 받은 실비아가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띠었다.
노엘은 그녀의 젖은 몸을 닦아주며 흐뭇하게 물었다.
“시원하시죠, 할머니…가 아니라. 실비아 님, 이제 디저트 가게로 갈까요? 이는 성하신 거… 맞죠?”
“그럼요. 이는… 멀쩡한 거 같네요. 어서 가요.”
이를 손으로 톡톡 두드려 본 실비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옷을 차려입고 노엘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녀는 주변 옷 가게에서 저렴한 신발을 구입하다가 망토도 하나 마련했다. 아무 생각 없이 유토피아 백화점으로 가려다가 순간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만약에! 루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지금은 다행히 상태 이상 <영광의 상처> 덕에 허리가 구부정하니까…. 대충 망토로 가리면 루카라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
회색 망토를 걸친 채 얼굴을 한껏 가린 실비아의 모습은 딱 백설 공주에 나오는 마녀 같았다. 그녀는 노엘의 부축을 받으며 유토피아 백화점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유토피아 백화점은 역시 수도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라서 그런지 인파가 북적북적했다.
“저기, 제가 말한 맛집이에요.”
“역시나 맛집이라서 그런지 줄이 기네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 둘은 달콤한 케이크와 음료수를 파는 디저트 가게에 도착했다. 소문난 곳이라서 그런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줄의 끝에 서려는 찰나, 구부정한 실비아의 모습을 본 가게 사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무슨 일이십니까?”
노엘이 경계하며 묻자 사장이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를 훔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가게 사장입니다. 옆에 분을 보니 제 어머님이 생각나서요. 살아계실 적 효도 한번 못 해 드리고 속만 썩였는데…. 후우! 이리로 오시죠.”
“네? 사장님 어머님이랑 저희가 무슨 상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