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네. 실비아 님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기별 없이 갔었습니다. 근데 오두막집에 가보니 완전히 다 무너져 폐허가 돼버렸고 실비아 님은 보이지 않더군요.”
“아, 그건 던전 공략을 하러 갔던지라…. 많은 일이 있었어요. 걱정하실까 봐 말하지 못했지만요.”
실비아의 대답에 노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네. 안 그래도 던전 공략을 하러 가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바닷가 마을 사제님 말씀으로는 오두막 폐허에서 지박령을 구마 의식하느라 신전의 사제분들이 힘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아, 구마는 성공적이었다고 하시던가요….”
실비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묻자 노엘의 얘기가 이어졌다. 바닷가 마을 근황은 이미 루카한테 듣긴 했지만, 노엘 입장에서 들으니 또 새로웠다. 구마를 성공해서 흉가에 유령을 쫓는 비석까지 세웠단 얘기까지 들은 실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잘 됐다고 손뼉을 쳤다.
“그 얘기는 이쯤으로 해두고, 사실 사제님에게 들은 얘기가 더 있습니다. 실비아 님이 무주택자가 되신 후에 수도에서 전셋집을 마련했다고 하시더군요.”
“네?! 제 소식을 바닷가 마을 사제님이 어떻게 아시는 거죠?”
실비아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자 노엘이 머뭇거리다가 얘기를 이어갔다.
“아…. 실비아 님은 그 신전에서 일도 하셨고 신도로 등록도 하셨잖아요. 신도로 등록되면 주거지를 옮길 시 자동으로 센터에서 신전으로 보고가 들어오는지라…. 일부러 물어본 것은 아닌데, 사제님이 말릴 틈도 없이 얘기를 꺼내시더군요.”
“허…. 영원한 비밀은 없다더니, 조심해야겠네요.”
실비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개인정보 유출은 솔직히 별로 상관없었다. 게임 세계의 법도를 현실의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기도 하고, 이미 비밀상점 주인 시크릿이나 시스템이 자신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누가 또 제 사생활을 안다고 해서 놀랍진 않았다. 그녀가 표정이 안 좋아진 건 다른 이유였다.
세비스와 실비아가 입만 닫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부정수급…. 그래, 그게 문제였다. 자신이 사실 몰래 돈을 꿍쳐놨단 걸 알면 안 될 텐데.
‘노엘 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싫어.’
실비아는 노엘에게 부정수급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제로서 바르게만 살아온 그는, 물론 실비아를 이해해주긴 하겠지만 제법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실비아가 돈을 꽤 들고 있다는 걸 아는 건 백지수표를 교환해 준 루카뿐이었다. 노엘과 달리 루카는 자신이 부정 수급자란 걸 알게 되어도 놀라긴커녕 더 법을 악용하라고 부추길 것 같긴 했다. 어찌 됐든 편법은 최대한 아는 이가 적은 게 좋으니까 루카에게도 알려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웃기게도 시스템이 이런 것에는 업보를 올리지 않는단 말이지.’
시스템 나름대로 눈감아주는 일들이 몇 개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렴, 노점 게임인데 제 입맛대로 돌아가겠지.
‘이런 건 눈 감아 주면서 꼭 다른 데서 날 곤란하게 한단 말이야.’
집무실에서 봤던 메시지를 떠올린 실비아의 얼굴이 벌레 씹은 것처럼 찌푸려졌다. 그녀의 표정을 멋대로 오해한 건지 노엘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보였다.
“걱정 마세요, 실비아 님. 신도들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신전이 그걸 악용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물론 믿음이 흐려졌다 싶으면 하위신관들이 신도들을 계도하기 위해 집을 방문하긴 합니다만…. 부드럽게 회유를 할 뿐이고, 폭력을 행사하진 않으니 법에 저촉되진 않죠.”
“아,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녀요. 네, 신도들을 신실하게 만들려면 어느 정도 그런 가슴 아픈 채찍질은 필요하죠. 그건 아니고…. 음…. 그냥, 노엘 님을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해서요.”
실비아는 눈을 도르르 굴리곤 적절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 거짓말은 효과가 좋았는지 노엘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제가 자매님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늘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 실비아 님은 저한테 제일 소중한 분이시니까요.”
“노엘 님. 정말!”
소중한 분이라니! 실비아는 감격한 나머지 노엘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노엘은 마음만큼이나 광활한 가슴팍으로 그녀를 숨이 막히도록 꽉 껴안아 주었다.
“어쩌다 보니 옆길로 얘기가 샜네요. 그래서, 제 선물을 받아주실 건가요?”
“아…. 너무 큰 선물을 받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만 사는 게 아니라 세비스도 함께 살게 될 텐데 괜찮으세요?”
노엘이 집을 내준 건 고맙지만, 세비스가 맘에 걸렸다. 희미한 기억으로 노엘은 세비스와 데면데면했던 것 같은데, 괜찮을까?
노엘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고려했습니다. 어차피 저는 한동안 수도 신관 협회의 일이 바빠서 이 집에 자주 들르지 못할 거에요. 또,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제가 가진 집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물론 실비아 님이 살게 되시면 저한테 가장 소중한 집이 되겠지만요.”
“노엘 님….”
실비아가 고이 두 손을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을 하자 노엘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우선 세비스…. 그 아이의 의향도 물어봐야겠죠. 이 열쇠는 우선 받아주세요. 결정되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전서구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관리인들에게 말해서 입주 준비를 해놓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실비아는 노엘이 건넨 상자를 받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놓아뒀던 미니 백에 넣었다. 그녀의 가슴에 넘실넘실 감동이 차올랐다. 그와 함께 혹시나 하는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사려 깊은 노엘이라면, 자신이 사실 남자들을 공략하면서 강해지는 미친 설정을 가지고 있단 걸 알아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여기가 게임 속이란 건 말하지 않아도 노엘은 이미 저가 신탁의 영웅이란 걸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해줄 것도 같았다. 그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의지니까.
희망찬 가정을 떠올리던 실비아는 이내 다시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함께 만난다는 것. 그게 아무리 신의 의지라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까?’
그녀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절대 들키지 않고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만이 답이라는 결론이 섰다. 남주들과 좋은 관계를 개별로 유지하다가 비밀을 간직한 채 천국으로 가는 거지. 자신이 천국에 가고 나면 잠시 슬퍼하던 남주들도 곧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천국에 가서 소원을 쓰게 될 때 남주들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실비아는 변태지만 경우를 아는 변태였기에, 남주 다섯 명을 다 거느리는 구운몽 같은 엔딩은 바라지 않았다. 그럴 체력도 없었고.
‘진엔딩을 보고 난 후엔 양심상 놓아줘야 하지 않을까…. 휴, 지금은 천국, 천국 생각만 하는 거야. 여기서 실패하면 난 나태 지옥으로 가야 한다고.’
실비아가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 와중에 노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노엘이 시선을 딴 데 두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제가 사실, 하나 더 들은 게 있는데 말이죠.”
“어떤 거 말씀이세요? 전 괜찮으니까 말해보세요.”
노엘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듯한 입매가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예상해보려고 해도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실비아의 손에 땀이 배려는데, 노엘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음,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네. 어, 어서 말해보세요.”
불안한 나머지 말하는 사이사이 삑사리가 섞여 나왔다. 긴장한 맘으로 바라보는데 노엘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실비아 님이 결혼하셨다는 소문이….”
“예?! 으윽!”
실비아는 너무 놀라서 몸을 펄떡이다가 탁자에 무릎을 박았다. 무사히 넘어간 줄 알았던 세간의 평가 <안쓰러운 새댁>을 노엘이 들었을 줄이야! 그녀가 소리 없이 꿈틀거리며 고통을 삭이자 노엘이 안절부절못하며 붉어진 무릎을 매만졌다.
“실비아 님!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거 같네요. 이렇게 놀라실 줄이야….”
“아! 그건 헛소문, 헛소문이에요! 이웃들이 세비스와 제가 부부인 줄 착각하고…!”
“네? 그 아이랑 실비아 님을요?”
실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노엘이 반문했다. 헛소문이라고 하면 안심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네. 딱히 상황설명을 안 했더니 그런 헛소문이 퍼진 것 같더라고요. 그게 노엘 님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줄은….”
이놈의 수도는 좁은 거야, 넓은 거야. 루카는 모르고 지나간 소문을 노엘이 들어버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신전의 신도 관리 시스템 때문에 듣게 된 소식 같았다. 실비아는 머쓱해하며 화제를 끝내려고 했다. 근데 노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는 초조한 듯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실비아를 올곧이 응시했다.
“어째서죠? 그 아이는 많이 어리잖아요?”
아 참, 노엘은 세비스가 한창 조그마할 때 본 게 마지막이었지. 실비아는 노엘이 납득할 수 있게 세비스의 변화를 설명했다.
“음, 세비스가 늑대족이잖아요. 얘가 성체가 되려나 봐요. 노엘 님이 마지막에 보셨을 때보다 정말 많이 자랐어요. 다른 사람들은 얘가 어른인 줄 알 정도라니까요.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어요.”
실비아가 두 팔을 넓게 벌려 세비스의 몸집을 표현하자 노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해도 다 풀렸는데 왜 점점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까. 점점 의기소침해진 실비아는 넓게 펼쳤던 팔을 내리고 가만히 노엘을 관찰했다.
그 올곧은 시선에 뒤늦게 노엘이 표정을 풀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그렇죠. 성체가 된다니. 그럼 힘이 많이 세질 테니 여러모로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겠어요. 그럼…. 지금 사시는 집은 방이 충분한가요?”
“왜요? 집에 놀러 오시게요? 오랜만에 노엘 님을 보면 세비스도 좋아할 거에요. 저번에 노엘 님 별장에서 맛있는 것 많이 얻어먹었으니, 이번에는 저희가 대접할게요!”
“아뇨. 실비아 님 볼 시간도 겨우 낸 건데 집까지는….”
노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못난 생각인 건 알지만, 어린 늑대라고만 생각했던 세비스가 실비아와 부부처럼 보일 정도로 크게 자랐다니 기분이 묘했다. 전혀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늘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했었건만, 스스로도 충격적이었다.
실비아는 그런 그의 마음은 알아채지 못한 채 집에 놀러 오라고 말하기까지 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노엘은 아닌 척 은근슬쩍 실비아를 떠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