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그 순간, 말을 이어갈 듯하던 백골의 눈구멍이 위험하게 반짝이더니 실비아의 몸이 크게 떠밀렸다. 백골이 있는 힘껏 실비아를 밀친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마도구를 꺼내 땅에다 꽂았다.
“절대 말할 수 없다! 크하하! 지옥의 왕 루카스 님 만세! 나태 지옥 만세!”
땅 위에 선 백골이 양손을 들곤 사악하게 외쳤다. 마도구가 꽂힌 바닥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더니 지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갈 거면 한 대 맞고 가!”
“아이고!”
급히 몸을 일으킨 실비아는 망치를 꺼내 스킬을 발동시켰다. 전용 무기인 망치가 부메랑처럼 날아가 백골의 두개골을 강하게 때렸다. 그는 호기롭게 외치다 말고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그대로 땅 구멍 사이로 추락하듯 사라졌다.
뻥 뚫렸던 구멍이 다시 메꿔지고 판판한 땅바닥에 이상한 옥수수들이 떨어지더니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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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의 누런 옥수수>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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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웬 아이템? 상상도 못 한 소득!’
생각도 못 한 아이템 획득에 실비아가 휘파람을 불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모으니 누런 옥수수같이 생긴 치아들이었다. 본의 아니게 백골의 강냉이를 제대로 턴 모양이었다. 아이템의 상세설명을 터치한 실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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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의 누런 옥수수
- 나태 지옥의 망령이 흘리고 간 치아이다. 게임 내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망령을 공격할 시 낮은 확률로 획득 가능하다. 소지하고 있으면 안 좋은 일을 앞두고 있을 시 가끔 이를 알리듯 몸에 소름이 돋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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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안 좋은 일을 미리 알려주는 아이템인 건가? 그놈이 몬스터는 아닌 거 같은데, 공격한 덕에 아이템을 얻었네. 잠깐, 근데 저 뼈다귀가 얻어맞기 전에 이상한 말을 했었지?’
실비아는 생각을 우선 멈추고 새로 얻은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기로 했다. 길바닥에서 쇼핑백을 푼 실비아는 <완벽한 인벤토리>를 꺼내 인벤토리를 완벽하게 만들고 구매한 아이템들을 다 집어넣었다. 이제 인벤토리가 완벽해졌으니 잡동사니까지 집어넣을 수 있게 됐다. <망령의 누런 옥수수>를 인벤토리에 넣은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지은 뒤 뼈다귀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지옥의 왕이니, 나태 지옥 만세니 하는 거 보니 아무래도 이 뼈다귀 놈은 나태 지옥에서 온 망령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공략 의지를 꺾기 위해서 방해를 하러 온 거겠지. 뼈다귀를 도망 못 가게 묶어놓고 취조를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지옥 왕의 계획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무슨 이름을 외쳤던 거 같은데. 루카…스? 루카랑 이름이 비슷하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의 뇌리로 루카의 형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나태 지옥의 왕이 루카의 형인 걸까? 게임의 법칙상 나름 남주의 형으로 조연격은 되는 루카의 형이 잡귀는 아닐 테고, 지옥의 왕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 그동안 나태 지옥의 왕이랑 계속 대화를 했단 말인가. 지난 대화를 떠올리던 실비아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가 정말 지옥의 왕이라면, 그동안 했던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어느 정도 말이 되는 거 같았다. 이 세계가 가짜라고 얘기하면서 제 마음을 흔들려는 속셈이었겠지.
‘다음에 루카를 만나면 형의 이름이 뭔지 물어봐야겠어.’
혹시나 아닐 수도 있으니 루카에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 그를 만날 때 물어보기로 결정한 실비아는 빈 쇼핑백을 버리려다가 바닥에 상자가 하나 더 있는 걸 발견했다.
‘어, 맞아. 사은품이 있었지. 이건 호텔에서 풀어보라고 했었나? 후후, 뭘까? 쇼핑백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상자만 우선 들고 가자.’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쇼핑백을 차곡차곡 접어 쓰레기통 옆에 있는 분리수거함에 넣은 실비아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 입구로 향했다. 바닥에 입구라고 크게 쓰여 있는 곳에 당도한 실비아는 가만히 서서 건너편 세계로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성질내면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으휴!’
힘겹게 슈퍼맨 자세를 3초 동안 유지하자 그녀의 눈앞이 희뿌예지더니 분수대 바닥이 나타났다. 눈치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실비아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러나….
“뭐야! 망토랑 내 신발 어디 갔어!”
벗어둔 망토와 신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주인이 없는 줄 알고 누군가 주워간 모양이었다. 아까 팔에 소름이 돋은 건 루카 형과의 대화를 떠올려서가 아니라 물건을 도둑맞을 거란 걸 미리 알린 <망령의 누런 옥수수>의 경고였던 셈이다. 누굴 탓하랴. 부주의했던 제 탓인걸.
‘버린 물건이라 생각하고 주워간 건가? 그래도 그렇지, 멀쩡한 물건을 들고 가다니! 여긴 한국이 아니라 이거지…. 으휴, 괜히 벗어놓고 갔네.’
현생에서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놔두고 다녀도 도둑맞을 일이 없었건만, 여기가 한국이 아니란 걸 잠시 잊은 게 화근이었다. 실비아는 터덜터덜 비밀상점에서 받은 사은품 상자 하나만 든 채 호텔로 향했다. 분수대의 물때가 묻은 데다가 맨발로 돌아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먼지 구덩이를 뒤집어쓴 떠돌이 개 같았다. 아무리 지금 눈 밑에 점을 찍어서 위장했다지만, 이런 꼴을 누군가 알아볼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점이나 한 번 더 찍자.’
실비아는 미니 백에서 검정 펜을 꺼내 눈 밑에 희미해진 점을 다시 또렷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드니 휘황찬란한 불빛이 보였다. 노엘이 예약해둔 호텔이었다. 아닌 밤중에 거지 난입에 잠시 경계하던 가드는 황금색 카드를 보곤 그녀를 입구로 들여보냈다.
최상층 스위트룸으로 들어온 실비아는 넓고 화려한 내부에 감탄하는 건 잠시 미뤄두고 얼른 욕실로 가서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내친김에 입욕제를 풀어 뜨거운 물에 반신욕도 했다.
‘후후. 노엘은 언제 오려나. 어떤 걸 해볼까나…. 아이참, 몰라 몰라!’
물장구를 치며 희희낙락거리던 실비아는 잡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되는 꿈을 꿨다. 한참 날아다니던 그녀는 돌풍에 휘말려서 추락했고, 팔을 휘저으며 눈을 떴다. 어라? 눈앞에 웬 황금이?
“으엇!”
점점 또렷해지는 시야에 레몬빛 금발머리가 들어왔다. 눈을 비비고 똑바로 보니 황금이 아니라 하얀 드레스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노엘이었다.
“어…. ”
“욕실에 계셨군요.”
사제복을 입지 않아도 노엘의 몸에선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신성력을 타고난 건지, 아랫도리는 진작에 타락했건만 저런 경건한 얼굴이라니 반칙이었다. 실비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의 평상복 차림을 잠시 감상했다. 온화하게 미소 지은 노엘은 그녀를 일으켜 바디타월로 몸을 감쌌다.
실비아는 몽롱한 표정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여기저기 부드럽게 토닥이며 젖은 몸을 말끔히 닦아준 노엘은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비아 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물이 차가워질 때까지 욕조에서 잠드시다니.”
“그랬나…봐요. 물이 너무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잠들었네요.”
아직 잠이 덜 깬 실비아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엘이 가운을 다 입혀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린 노엘은 그녀의 등허리와 오금에 손을 대 달랑 들어 올렸다.
“어머!”
갑작스러운 시야 변화에 놀란 실비아는 눈앞의 목을 더 단단히 감싸 쥐었다. 얇은 천 사이로 그녀의 몸과 닿은 단단한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고개를 숙여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사과 같은 양 뺨에 번갈아 가며 입맞춤한 노엘은 그대로 화장대 앞까지 걸어갔다. 실비아를 의자에 앉혀준 노엘은 젖은 갈색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려주며 사이사이 계속 동그란 뒤통수에 입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을 즐기고 있던 실비아는 차츰 고위 사제이자 백작가 집안의 차남인 노엘을 인간적으로 너무 부려 먹는 거 같아 민망해졌다. 그녀가 위로 손을 뻗어 수건을 당기자 노엘이 왜 그러냐는 듯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쳤다.
“이건 제가 해도 되는데….”
“실비아 님은 편안히 앉아 계세요. 제가 다 해드릴게요.”
실비아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거울 속 노엘이 제 머리를 말려주는 걸 지켜봤다. 머리가 얼추 마르자 노엘이 조그만 귓바퀴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그냥…. 아! 왜 이렇게 피곤한지 알겠다. 오늘 마차를 좀 몰았더니, 그래서 피곤했던 건가 봐요.”
욕조에서 괜히 기절하듯이 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자전거만 타봤지 대중교통만 이용했던 뚜벅이인 자신이, 자동차도 아니고 마차를 몰았으니! 그것도 그냥 몬 것도 아니고 무려 무면허 초보운전 주제에 드리프트를 하고 낭떠러지를 건너는 기염을 토했다.
어디 그뿐인가. 넝쿨만 허리에 감은 채 절벽까지 기어 내려갔지, 자이언트 악어한테서 포리쉐를 구하려고 고군분투했지, 황태자 일행의 눈치를 보느라 온종일 억지 미소를 입가에 머금기까지.
몸이 축날 만도 했다. 실비아가 눈을 끔뻑거리며 힘없이 대답하자 노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마차를 모셨다고요? 마차는 승마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운전하기 힘들다고 알고 있는데….”
노엘의 표정을 보니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면 기겁할 것 같았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
“에이, 알잖아요. 저는 신에게 선택받은 영웅인 거.”
실비아는 상체를 돌려 노엘을 말간 눈으로 올려다봤다.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그렇네요.”
노엘의 영문 모를 대답에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노엘의 시야에 가운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탐스러운 가슴이 들어왔다. 위에서 내려다봐서 그런지 그녀의 가슴골이 더 깊고 야하게 보였다. 방금 전 신전 집무실에서 저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고 맛봤던 기억을 떠올리자 노엘의 바지 천이 곧 찢어질 것처럼 융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