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크르르!”
“쉬익!”
실비아가 떠난다는 소식을 언제 들은건지 계곡에서 한 대 얻어맞았던 자이언트 악어와 사파리 월드에서 두개골을 빠개버렸던 독사가 정원에 숨어 그녀를 함께 배웅했다. 둘은 드디어 실비아가 엘리셔스 월드를 떠난다는 사실에 기쁨을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금방 메리 할머니에게 들켜 다시 쓰다듬기를 당한 건 조그만 비극이었다.
띠링, 하고 실비아가 떠나기 전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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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놀이공원 곳곳을 익히자.> 성공! 업적 <사회생활만렙>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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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좋아. 딱 적절하게 퀘스트 성공 메시지도 떠올랐네.’
퀘스트 자체가 지력을 마구마구 퍼주는 퀘스트라서 그런지 업적의 효과로는 ‘자신감이 넘칩니다.’라는 시시한 메시지가 있었다. 확실히 이번 인턴을 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생기긴 했다. 그거면 된 거겠지. 마침 석양이 붉게 지며 퇴장하기 딱 좋은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실비아는 나무작대기에 봇짐을 매단 채 손을 흔들며 멋지게 떠나갔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 * *
띠리릭-하고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나며 실비아네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 피로가 잔뜩 묻은 얼굴로 돌아온 실비아였다. 그녀는 신발을 벗으며 세비스를 찾았다.
“세비스! 나 왔어.”
“축하해요! 오늘 드디어 퇴사네요!”
세비스가 팡팡 폭죽을 터트리며 기둥 뒤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작게 입을 벌리며 기뻐한 실비아는 식탁에 차려진 잔칫상에 폴짝폴짝 뛰며 기쁨을 표출했다. 그녀는 가볍게 씻은 뒤 식탁에 앉아 그가 차린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아, 맞다. 세비스. 나 우라엘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돌보기로 했어.”
“반려마요?”
“응. 세비스는 모르겠구나. 우라엘 황태자 저하가 아끼는 반려마가 있거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실비아는 상기된 얼굴로 오늘 있었던 짜릿한 일을 브리핑했다.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마차를 몰았으며, 심지어 처음 몰았는데 절벽을 뛰어넘고, 급커브 구간에서 드리프트를 성공했으며, 심지어 낭떠러지까지 건너갔다고 떠들자 세비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 표정을 본 실비아는 뒤에 황태자도 타고 있었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다음 얘기로 넘어가서 갯강구처럼 빠르게 절벽을 내려가 포리쉐까지 구한 용맹한 얘기를 실감 나게 해주자 세비스가 손뼉을 짝짝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실비아 님. 엄청난 하루였네요.”
“그렇지. 그 덕인지 황태자 저하의 말을 돌보게 됐어. 던전 공략하고 돌아오면 바로 황궁 출근이야.”
“던전은 그럼 언제 가시나요? 오늘?”
“어, 그게….”
실비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 가는 건 아니지만 오늘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번에 루카랑 그랬던 것처럼 노엘이랑 밤을 보내고 나서 집에 또 들르면 괜히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것 같아서 싫었다.
‘세비스에겐 오늘 던전을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짐을 챙기고 나가서 노엘 님과 주말을 보내는 거야. 그 후에 블루를 불러서 비밀상점에 들렀다가 바로 던전으로 가면…. 완벽한 계획이네.’
“어, 맞아. 오, 오늘. 오늘 갈 거야.”
실비아는 뒤늦게 더듬거리며 대답한 뒤 식사를 마저 했다. 노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마음 반, 세비스에게 거짓말을 하니 찔리는 마음 반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급하게 먹었다. 짐을 챙겨서 밖을 나서자 세비스가 그녀를 격려했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실비아 님. 실비아 님 올 때까지 저는 림보에게 가끔 면회 가면서 황궁 출근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아 참, 밤 던전은 위험하니 꼭 환한 낮에만 들어가시고요!”
“그, 그래. 밤 던전 조심…. 다녀올게, 세비스!”
실비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휘휘 손을 저으며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완전히 벗어 난 뒤, 굳어 있던 입꼬리가 점차 위로 솟구쳤다. 드디어 노엘을 한 달 만에 보는구나. 태연하게 걸어가려던 그녀는 주위의 힐끗대는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벽 뒤로 숨었다.
‘아, 맞다. <라이징 스타>가 있었지. 스타는 자나 깨나 보는 눈을 조심해야 하는 법.’
눈앞에 라이징 스타든 징징이 스타든 신경도 안 쓰는 황태자 일행과 익숙하게 보는 놀이동산 직원들과만 대면하다 보니 새로 획득한 세간의 평가를 잠시 잊었다. 실비아는 미니 백에서 검정 펜을 꺼내 눈 밑에 큰 점을 찍었다. 점 하나 찍는다고 뭐가 될까 싶긴 했지만, 대로로 나가 보니 아까랑 달리 실비아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허술한 게임세계 같으니! 혹시나 해서 점 하나 찍어봤더니 아무도 날 못 알아보는구나. 후후.’
완벽한 분장에 흡족해진 실비아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기뻐했다. 그녀는 롤러 운동화를 타고 씽씽 신나게 수도 엘베우스 신전으로 바쁘게 향했다.
“허억, 헉….아이고, 나 죽겠다.”
실비아는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새하얀 첨탑 건물을 올려다봤다. 수도 엘베우스 신전은 바닷가마을에서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던 신전과 크기만 다를 뿐 똑같은 모양이었다.
댕- 댕-.
마침 청아한 종소리가 저녁 예배 시간을 알리자 신도들이 바쁘게 거대한 입구 안으로 빨려들어 가는 게 보였다. 아차,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신전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민머리에 드문드문 머리카락이 남아있는 사제 한 명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머리가 마치 타코야키에 가다랑어포가 흩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맑은 기운이 흐르세요.”
“그런가요.”
실비아가 건성으로 대꾸했지만, 그는 포기를 몰랐다.
“근데 그 기운을 누군가가 막고 있어요. 저희 신전에 오셔서 참된 기도를 하시면 선조께서 복을 주실 텐데요.”
“그래…요?”
게임 초창기에 자신이 한창 하던 길거리 전도를 반대로 당할 줄이야. 실비아는 대충 대답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지.’
멍하니 눈을 한번 깜빡였다 뜬 실비아는 어리둥절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신도 대열에 합류한 상태. 타코야키 사제는 온화한 얼굴과 달리 길거리 전도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어느덧 실비아의 손에는 사탕이 붙은 전도 쪽지가 들려있고, 발길은 신전 내부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탕이 붙은 전도 쪽지를 만지작거리던 실비아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타코야키 사제가 그녀의 옆에 서서 혹시나 대열을 중도 이탈할까 감시하며 떠벌떠벌 교리를 설파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예배당 벤치에 앉은 실비아의 옆에 타코야키 사제도 같이 앉았다. 안을 둘러보니 자신처럼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이는 새 신도들을 밀착 케어하는 사제들이 많았다.
‘역시 수도는 다르구나. 바닷가 마을은 전도하고 나면 각자도생이었는데. 가두리 어장처럼 몰아넣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바빴지. 근데 여기는 1대1로 케어하며 골수까지 뽑아먹을 생각인가 봐. 저 희번들하게 빛나는 사제들의 눈을 보라지!’
수도는 역수 수도, 사제들이 하나같이 관록이 상당해 보였다. 실비아는 ‘후우, 여간내기들이 아니군….’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타코야키 사제가 그런 그녀를 잠시 이상하게 쳐다봤다.
곧 기존 신도와 실비아처럼 길거리 전도 당한 새 신도로 예배당이 가득 차고 예배가 시작됐다. 엄숙한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실비아는 타코야키 사제가 찬송가 가사책을 펼쳐 억지로 들이미는 바람에 어색하게 노래를 따라불렀다. 그녀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며 노엘을 찾았다.
‘노엘은 이 예배에 참석 안 한 건가? 그럼 괜히 잡혀 들어온 건데. 밖에서 산책이나 하면서 기다릴걸!’
실비아가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찬송가가 끝나고 다음 차례가 왔다. 무심코 앞을 봤던 실비아는 단상 위로 올라서는 익숙한 옆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머리까지 온통 새하얀 사제복을 걸치고 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달 만에 보는 노엘이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온 뒤 낮고 경건한 목소리로 예배를 시작했다. 외모가 워낙 은혜로운 탓에 신도들의 난동을 감안해 코까지 가리는 순백색 가리개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리지 않은 싱그러운 초록색 눈과 레몬빛 금발 앞머리가 머리를 덮은 하얀 천 사이로 얼핏 보였다.
‘어쩜. 저렇게 꽁꽁 싸맸는데도 외모가 찬란하게 빛나는구나. 저 성스러운 말씀을 전하는 입으로 노엘은 내게 이것저것을 했…. 크흠, 예배당에서 천벌 받을 생각은 그만하자.’
노엘이 단상 위에 올라선 후 실비아가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타코야키 사제는 단단히 오해한 듯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도를 성공했다고 뿌듯해하는 모양이었다. 타코야키가 그러든지 말든지 실비아는 노엘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황홀경에 빠졌다. 별거 아닌 내용인데도 하나하나 핥고 싶을 만큼 달콤했다.
‘내가 여기 있단 걸 알아채 주시면 좋으련만! 눈 밑에 점 때문에 몰라보시려나?’
점도 점인데 애석하게도 실비아는 새 신도인지라 맨 뒤에 앉아있었다. 단상까지의 거리가 꽤 되는 데다가 노엘이 예배 중에 신도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리도 없으니 노엘이 그녀를 발견할 일은 요원해 보였다. 사탕 붙은 전도 쪽지를 훑어본 실비아는 이 예배 후에도 한참 동안 순서가 남아있는 걸 발견하고 탄식했다.
‘심심한데 사탕이나 먹을까.’
전도 쪽지에 있던 사탕을 떼어 껍질을 벗기던 실비아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고 노엘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날 알아봤구나! 실비아는 양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인사에는 반응하지 못하고 실비아의 손에 든 사탕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고개를 잘게 여러 번 저었다.
‘왜 저러지? ‘여기 들어오면 어떡해요.’라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