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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33화 (233/372)

233화

“이미 구했어.”

황태자가 차분한 표정으로 바위 뒤에서 풀을 뜯던 포리쉐를 가리켰다. 그는 이마를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입을 뻐끔거리다 힘없이 어깨를 내렸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3분. 저번 기록을 갱신했군.”

옆에 선 기사가 손목시계를 보며 기록을 알리자 마법사의 얼굴에 허무함이 떠올랐다. 잠시 허탈해하던 그를 지켜보던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끊어진 다리를 타고 어떻게 왔는지, 이게 마차를 타고 건너 온 건지, 추락하다가 가까스로 절벽에 걸려 살아남은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며 실비아를 힐끗거렸다.

‘무사히 건너왔으면 됐지. 거, 더럽게 불만 많네.’

실비아는 속으로 툴툴댔지만, 겉으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자 일행과 실비아에게 다시 마차에 타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대충 옆에서 엿들어보니 공중 부양 마법을 마차에 시전 할 셈인 듯했다. 실비아는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계곡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패대기친 자이언트 악어는 무사한가 싶어서였다.

‘없네? 다행히 살아서 도망쳤나 본데.’

무른 바닥엔 자이언트 악어의 몸 자국만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흘린 실비아는 황태자와 기사, 그리고 포리쉐가 마차에 낑겨 탄 걸 확인하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마부는 제정신을 차린 듯 실비아에게 이번엔 절대 운전하지 말라며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재밌었는데, 아쉬워라.’

공중 부양 마법으로 붕 날아오른 마차는 무사히 절벽 너머로 갔고 20년 마차 운전 경력의 마부 덕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유지하며 무사히 사파리 월드 입구로 돌아왔다. 어느새 소식을 들은 엘리셔스 월드 직원들이 단체로 나와 황태자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저하,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안전장치를 제대로 마련해 놨어야 했는데….”

“안전 점검을 더 철저하게 하라는 저하의 분부가 있으셨다.”

역시나 황태자의 말을 전해 들은 기사가 간부를 포함한 직원 일동에게 일갈하자 그들은 이제 땅에 닿을 듯이 머리를 조아리곤 사과했다. 놀이동산의 대표로 보이는 간부 한 명이 곧바로 시정하겠다고 빌 듯이 말했다. 숱한 사고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놀이동산 간부들의 안전불감증이 황태자의 시찰 한 번에 싹 낫는 광경이었다.

“좀 피곤하군.”

우라엘 황태자는 포리쉐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모두들 안절부절못하며 차를 가져오거나 어깨를 주무르려고 하며 난리를 피웠다. 이를 지켜보던 실비아는 우라엘 황태자가 왜 저런 성격이 됐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한숨만 조그맣게 흘려도 알아서 척척 원하는 걸 가져다주니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거기다가 굳이 웃지 않아도 다들 친절하니까 일부러 웃을 필요도 없고 말이야. 누구는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미소 짓고 있는데….

황태자 일행 앞에서 하루종일 영업용 미소를 지어야만 했던 실비아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속마음과 달리 그녀의 겉껍데기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흘렀다.

하회탈처럼 하염없이 미소만 짓고 있으려니 황태자의 최측근 심복인 기사가 실비아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하의 반려마가 많이 놀란 것 같아 시찰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네. 오늘 안내를 도와줘서 고맙군. 실비아 양.”

“아닙니다. 저하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 대충 예의 차려 말한 실비아는 기사의 눈치를 봤다. 표정이 흡족한 걸 보니 예의 바르게 말한 것 같았다.

기사들과 시종들이 엘리셔스 월드를 떠날 채비로 분주했다. 사파리월드 입구엔 아까 본 적 없는 화려한 사두마차가 있었는데 아마 황궁 마법사가 급히 엘리셔스 월드로 오며 함께 끌고 온 마차인 듯했다.

“히잉….”

시름시름 앓는 표정의 포리쉐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힘없이 마차로 먼저 들어갔다. 황태자는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다가 실비아에게 몸을 돌렸다. 미간을 좁히고 고심하는 듯하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너.”

“네?”

실비아가 반문하자 우라엘 황태자는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린 그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실비아는 분명히 들었다. 설마? 방금 ‘고마워’라고 했지? 저만 아는 것 같던 고고한 황태자가 감사 인사도 할 줄 알다니.

“아, 저하…. 엇, 가버리셨네.”

우라엘 황태자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없이 단호하게 몸을 돌리곤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비록 대답할 새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감사 인사를 들은 게 어디야. 싸가지 없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괜찮은 남자네….‘

실비아는 감동한 눈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저 오만한 우라엘 황태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역시 목숨 바쳐 포리쉐를 구한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우라엘의 ‘고마워.’라는 한마디에 감동을 느끼는 제 허벌가슴을 잠시 한탄했지만,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때 아련한 눈빛으로 황태자가 탄 마차를 바라보던 실비아의 눈앞에 띠링,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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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엔딩 <모가지가 싹둑>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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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

실비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치워버렸다. 손을 휘휘 젓고 있으려니 마차 곁에 서서 황태자의 명령을 전해 들은 기사가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실비아 양. 황궁에서 어떤 일을 할 건지 정했나?”

“네? 아아. 황제 폐하의 황송한 제안에 어떻게 현명하게 답해야 할지 몰라 아직 고민 중입니다. 빨리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압니다만, 저한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인지라…. 신중하게 고민하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실비아는 대충 이것저것 가져다 붙여서 길게 말했다. 그래야 예의 바르게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흡족한 미소를 지은 기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아무래도 신중히 결정하는 게 좋긴 하지. 혹시 포리쉐를 돌보는 업무는 어떤가? 저번에 공연장에서 들으니 외제마도 길러본 경험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하께서 이번에 그대가 용기있게 포리쉐를 구한 모습을 흡족하게 보신 듯하네. 강요는 아니고 권유라고 말씀하셨으니 편하게 생각해보게.”

말을 끝낸 기사가 가만히 검집을 쓰다듬었다. 그는 잠시 딸깍거리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권유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실비아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생각, 생각해보겠습니다….”

“생각? 생각을 해본단 말인가?”

“긍정적으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아. 긍정적으로, 말이지.”

형형한 눈빛이 투구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실비아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곤 다시 대답을 정정했다.

“아뇨. 하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전 정말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고, 포리쉐는 예쁘고 완벽하고, 황태자 저하도 기품이 넘치시고, 하여튼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잘 생각했어. 그럼 다음 주부터 바로 황궁으로 오는 건가?”

“아, 아뇨. 잠시 여행 계획이 있어서….”

“계획?”

기사가 다시 검을 딸깍거리자 햇빛에 반사된 칼이 희게 빛났다.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만고불변 최고의 변명거리를 써먹기로 했다.

“네. 부, 부모님을 뵈러 가야 해서. 원래 인턴 끝나면 부모님을 뵈러 갈 계획이 있었거든요. 고향에서 제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시는지라…. 바로는 무리고 그, 다음 주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 아! 그럼! 그런 일이면 당장 가봐야지. 부모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길 바라네. 크흠, 그럼 실비아 양. 푹 쉬고 황궁에서 보자고!”

기사는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검집에서 손을 뗐다. 그는 허둥지둥 떠날 채비를 마친 황태자 행렬로 뛰어갔다. 효과 좋은 변명거리 덕에 실비아는 <심해에 잠긴 도시> 공략을 여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

“황궁으로 출발한다!”

기사의 명령과 함께 사두마차가 출발했고 그 후에 기사들도 준비된 다른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욱한 먼지가 다 가라앉을 때까지 모든 임직원 일동과 실비아는 머리를 조아린 채 황태자 일행을 배웅했다.

그들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지고 동물원 부장이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휴우, 실비아 양. 수고했네. 듣자 하니 자네가 황태자 저하의 말을 구했다면서?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했어. 저하의 반려마가 잘못됐다면 우리 엘리셔스 월드는 징계를 면하지 못했을 거야.”

“아닙니다. 불쌍한 동물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실비아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공손하게 답하자 동물원 부장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성공하는 사람은 남들과 생각이 달라! 이리 겸손을 떨다니! 조금 아쉽긴 하네. 자네가 동물원 부서에서 정식 직원이 됐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동물에 진심인 직원이 잘 없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저도 아쉬워요. 황궁에 가서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돌보는 업무를 맡게 됐으니 동물원 부서에서 배운 경험을 십분 살려보겠습니다.”

“어우, 실비아 양. 대단한데? 우라엘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돌보는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다니. 그분은 곁에 두는 사람을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하신데 말이야!”

“반려마를 구한 공을 높이 사신 것 같습니다.”

부장은 놀라워하며 칭찬 세례를 마구마구 던졌다. 실비아는 반려마를 돌보는 게 그렇게 중요한 업무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등등 적절한 리액션을 하자 동물원 부장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메리 할머니도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황궁에 가게 된 걸 축하했다.

“축하해. 실비아 양.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전서구 둥지 주소 알지? 내가 이래 보여도 힘이 좀 세거든.”

“아, 감사합니다. 할머니.”

대놓고 힘이 센 메리 할머니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하니 실비아의 가슴이 든든해졌다. 그 외에도 짧은 시간 정이 들었던 수많은 직원들과 차례차례 덕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라커룸의 짐을 모두 챙기고 입구에 도착한 그녀는 모두의 따스한 배웅을 받으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실비아 양! 짧은 시간 고마웠어. 언제라도 힘들면 엘리셔스 월드로 돌아오고!”

“제가 엘리셔스 월드로 돌아온다면 그건 아마도 시체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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