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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32화 (232/372)

232화

실비아는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바위에서 일어나 초조하게 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걱정이 가득한 걸 보니 포리쉐를 구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걱정하는 듯했다.

지금 포리쉐를 구해주면 공략 불가인 황태자의 호감도가 급상승할 터였다. 저번에 보니 공략 불가 캐릭터라도 호감도는 착실하게 쌓였었으니까. 그거 아니라도 가엾은 포리쉐가 저 아래에서 구슬피 우는데 내버려 두기도 뭐 했다.

황태자는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기사에게 뭐라 속삭였고, 고개를 끄덕이던 기사가 전서구를 투구 안에서 꺼냈다. 안에서 고이 자고 있던 전서구가 푸드득 날개를 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급히 편지를 써서 전서구를 날려 보낸 기사는 실비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포리쉐를 찾아줘서 고맙네. 우리가 저 계곡까지 내려갈 방도가 없으니 우선 황궁에 도움을 요청했어. 기다리고 있으면 황궁 소속 마법사가 여기까지 올 걸세.”

“말을 구할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기사는 갑옷 안에서 보온병과 고급찻잔을 꺼내 쪼르르 뜨거운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차 받침대에 얹어 황태자에게 두 손을 모아 공손히 건넸다.

“우라엘 황태자 저하.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차 한잔하시죠.”

황태자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곤 찻잔을 받아 들었다. 우라엘이 차를 홀짝이는 모습은 무척 우아해서 순간 다과회에서 부채를 펼치고 깔깔 웃는 귀족 부인들의 환상이 뒤에서 어른거렸다. 실비아는 차를 음미하는 두 사람 주위를 서성였다. 여기 사람 하나 더 있는데…. 실비아는 입맛을 다셨지만 둘 다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

다시 절벽 아래를 주시하던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포리쉐 뒤편 강물 속에서 흉흉한 눈만 빼꼼히 내민 괴생물체가 서서히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어디서 많이 본 저 눈깔, 무척 익숙했다. 어디서 본 거지? 저 눈깔의 주인이 누구냐면 실비아와 메리 할머니가 여기 온 이래로 늘 여기저기 패대기쳐지던 자이언트 악어였다.

최근에는 블루에게 한 번 더 굴욕을 당한 그는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입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진 자이언트 악어는 포리쉐를 도륙 내기 위해 눈만 강밖에 내밀고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실비아의 비명에 기사도 절벽 근처로 와 상황을 살폈다. 그도 마찬가지로 포리쉐 뒤에서 다가오는 악어의 눈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저 망할 놈의 악어가 황태자 저하의 반려마를!”

그는 당장이라도 내려갈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다가 가파른 절벽을 보며 멈칫하곤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성질은 나지만 무사히 내려갈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하아, 이걸 어쩐담.”

어떻게, 포리쉐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 황궁 마법사를 기다릴 새가 없었다. 실비아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커다란 나무에 얽혀있는 넝쿨을 발견하고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겨보았다. 쉽게 끊어지지 않고 길이도 충분한 게 허리에 묶고 내려가기 딱 좋았다.

그녀는 몸뚱이에 넝쿨을 단단히 묶은 뒤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김이 폴폴 나는 찻잔을 바위에 내려놓고 그늘이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실비아는 찻잔을 황태자에게 건네준 뒤 비장한 얼굴로 선언했다.

“차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뭐?”

실비아의 영문 모를 말에 황태자가 미간을 좁히곤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절벽 앞에 서서 3, 2, 1 번지! 점프를 한 건 아니고 조심스럽게 절벽을 기어 내려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 발동!’

스킬이 발동되자 그녀는 마치 갯강구처럼 사사삭 사사삭- 빠른 속도로 절벽을 타고 내려갈 수 있었다. 실비아의 미친 이동속도에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기사가 혀를 내둘렀다.

“와! 저하, 저 여자 보통이 아닌데요?”

“알고 있어.”

황태자는 눈을 내리깐 채 멍하니 찻잔을 바라봤다. 우라엘은 겉보기엔 아주 평온해 보였지만 머릿속은 포리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저 평생을 황족으로 살면서 품위를 유지하는 법을 익혔기에 오두방정을 떨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저 여자가 과연 포리쉐를 제대로 구해올 수 있을까? 저번 공연 때 보니 보통 여자는 아닌 것 같던데. 그는 어느새 습관처럼 품위를 유지하는 것도 잊고 낭떠러지 아래를 걱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휴우!”

실비아는 무사히 계곡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넝쿨을 잠시 푼 뒤 저 멀리서 벌벌 떨고 있는 포리쉐 근처로 다가갔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포리쉐가 잔뜩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그래, 가뜩이나 불안한데 모르는 사람이 와서 무섭겠지….

그녀는 우선 포리쉐는 가만 내버려 두고 강가를 살폈다. 자이언트 악어가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게 보였다. 실비아는 메리 할머니가 자이언트 악어를 토닥이던 걸 떠올리곤 몸을 바짝 숙였다.

‘저놈이 튀어 오르는 순간 한큐에 처리하겠어.’

촤악-!

기다리기도 잠시 자이언트 악어가 죽을 길인지도 모르고 뭍으로 튀어 올랐다. 몸체가 포리쉐만한 그것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리고 포리쉐를 덮치려 했다.

“어딜!”

실비아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손을 뻗어 자이언트 악어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곤 경동맥을 잡아 치명타를 입히고 내팽개쳤다. 자이언트 악어는 찍소리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히잉?!”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포리쉐가 뒤늦게 바닥에 누운 자이언트 악어와 실비아를 번갈아 보며 놀랐다. 그러곤 곧 상황 파악이 된 듯 감격한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봤다. 마치 영웅 바라보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이었다. 감사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실비아는 넝쿨을 다시 허리에 휘감고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다시 올라갈 수 있겠어? 내가 손잡아줄게.”

림보 대하듯이 한 것인데, 아쉽게도 포리쉐는 그녀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진 못하는 듯했다. 실비아는 손짓하며 날개를 펴고 올라가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뒤늦게 포리쉐가 알아들은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잠시 꺼놨던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을 발동시킨 실비아는 포리쉐의 고삐를 잡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포리쉐가 갑자기 그녀의 옷깃을 물더니 부웅-! 쏜살같이 빠른 속도로 절벽을 탔다. 경황이 없을 때는 절벽을 올라갈 엄두를 못 내던 포리쉐가 자기를 구하러 온 인간을 보고 안심해 터보 주행을 쓴 것이다.

“으아악!”

“히잉!”

눈 깜짝할 새에 포리쉐와 실비아는 위로 올라왔다. 실비아는 포리쉐가 입에 물고 오는 바람에 마치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머리를 정리하며 힐끗 황태자의 손을 보니 아직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삼국지를 생각하며 따라 해 본 건데 정말 차가 식기 전에 돌아왔다니. 그녀의 가슴이 찌르르했다.

실비아가 저 혼자만의 퀘스트 달성에 기뻐하는 사이 기사가 얼른 다가와 포리쉐의 고삐를 잡고 황태자에게 데려갔다.

“포리쉐!”

황급히 찻잔을 바위 위에 내려둔 황태자는 활짝 미소 지으며 포리쉐를 껴안고 부비부비했다. 처음 보는 황태자의 밝은 표정에 실비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포리쉐를 많이 아끼나 보네. 황태자가 저렇게 진심으로 웃는 건 처음 봐.’

그는 포리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포리쉐도 제 주인을 만난 감격에 꼬리를 세차게 저었다. 감격스러운 상봉이었다. 옆에 선 기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눈가를 손으로 찍어눌렀다. 훈훈한 광경을 지켜보던 실비아는 뭔가 잊은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저기, 나는요? 실비아는 허리에 감은 넝쿨을 푼 뒤 황태자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다. 적당히 포리쉐를 껴안은 뒤 자신에게도 너무 고맙다며 최소한 손 잡고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길 바랐으나 원하는 일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갖은 고생을 다 하고 구해줬는데 지들끼리만 얼싸안고 기뻐하다니!. 참나, 황태자 쟤는 남주잖아. 포리쉐를 얼싸안을 게 아니라 여주인 나를 얼싸안고 기뻐하는 게 정상 아닌가? 구해준 공은 다 어디로 가고!

실비아는 속으로 울분을 삼키며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포리쉐를 쓰다듬으며 기뻐하던 황태자는 뒤늦게 제 곁에 서 있는 실비아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낯빛을 다시 진중하게 굳혔다. 무심한 눈길이 바위 위에 올려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에 잠시 머물렀다.

“정말이네?”

“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실비아가 뿌듯함을 숨기며 정중히 대답했다. 실비아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기다리고 있자 황태자가 기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갑주 안을 뒤적거리더니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건네는 주머니를 황송해하며 받은 실비아는 손으로 주물럭거려 봤다. 느낌상 저번과 비슷한 조그만 보석 같았다.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보석으로 때우는 건가? 휴, 그래. 이제 좀 익숙해지려고 하네.’

황족이란 원래 저렇게 거만한 게 디폴트인가 보다. 실비아는 애써 납득하려고 노력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미니 백에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그때 멀리서 ‘저하!’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잠시 잊었던 도움을 요청했던 황실 마법사였다.

그는 바람 속성의 마법사로 마법을 이용해 끊긴 다리 사이를 단숨에 뛰어넘어서 왔다. 도약과 하강을 반복하며 순식간에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는 실비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의 눈에는 펄쩍펄쩍 뛰며 다가오는 그 모습이 점프력 좋은 빈대…처럼 보였다. 입 밖으로 말하면 마법사가 길길이 날뛸 테지만 그녀 눈에는 일단 그렇게 보였다는 거다.

‘도약력이 엄청나네. 이 세계엔 내 생각보다 여러 가지 다양한 마법이 있나 봐.’

마법사는 초록색 로브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우라엘 황태자의 앞에 섰다. 꽁지가 빠지도록 뛰어왔는지 그는 한참을 헉헉거리며 숨 고르기를 했다.

“아이고, 우라엘 황태자 저하. 어딨습니까? 포리쉐는! …여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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