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실비아의 말에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마부가 반박했다. 강가가 있다고? 메리 할머니를 따라 그동안 많이 돌아다녔지만, 늪지대는 봤어도 강가는 본 적이 없었다. 실비아가 더 말해보라는 듯 쳐다보자 마부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죽음의 계곡이 있어요. 그곳에 강가…가 있습니다. 가파른 절벽을 타고 내려가면 강이 있어요.”
“죽음의 계곡이요?”
계곡 이름이 엄청나게 불길했다. 실비아가 되묻자 마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죽기 딱 좋은 계곡이라 죽음의 계곡입니다. 보통은 가파른 곳을 좋아하는 산양 아니면 굳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정신 나간 동물은 없죠. 근데 외제마라면… 속도가 워낙 빨라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강가로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계곡까지 가는 길이 워낙 험준해서 이 마차로는 무리일 것 같네요.”
“정확한 좌표 아세요?”
실비아의 손이 고삐 근처를 서성였다. 마부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첩을 보며 상세한 좌표를 읊었다.
“북위 xx도 동경 xx도인데요. 왜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실비아는 마부가 들고 있던 고삐를 뺏었다. 그냥 운전하겠다고 하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이판사판, 어차피 세이브도 해놨으니 잘못되면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겐 <손은 눈보다 빠르다>가 있으니까. 스킬명을 속으로 외친 실비아가 고삐로 말들을 채근했다. 순간 이게 될까 싶었으나 됐다. 말들은 실비아가 미친 듯이 채찍질하는 것에 맞춰 발을 빨리 놀렸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칸막이 너머로 기사가 당황해 소리쳤다. 실비아는 말을 채찍질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죽… 포리쉐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꽉 잡으세요.”
죽음의 계곡으로 가겠다고 했다가 황태자네가 기겁할까 봐 실비아는 급히 말을 바꿨다. 자신만만한 척 소리쳤지만, 그녀는 살짝 쫀 상태였다. 죽음의 계곡에 포리쉐가 없으면 어쩌지. 그 이전에 초보운전인 자신이 마차를 무사히 계곡까지 몰고 갈 수 있을까?
그녀가 걱정하는 순간 눈앞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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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게임을 시작합니다. <이랴 이랴 신나는 마차 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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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런 미니게임이 있었어?’
메시지가 사라지고 그녀만 볼 수 있는 미니 지도가 옆에 떠올랐다. 친절하게도 죽음의 계곡이 어딘지 표시가 되어있었다. 거기다가 내비게이션처럼 안내하는 목소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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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100미터 앞에 아름드리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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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를 힘껏 옆으로 꺾어 아름드리나무를 피하자 그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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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50미터 앞에 바위가 있습니다. 점프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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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말을 탄 것도 아니고 마차를 몰고 있는데 점프가 가능하려나? 시스템이 점프하겠냐고 물어본 걸 보면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판단력으로 고삐를 위로 힘껏 추어올렸고 놀랍게도 말들이 바위를 폴짝 뛰어넘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뒤에 달려있던 마차는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와장창 부서졌겠지만, 물리력을 무시하는 게임 세계의 법칙에 따라 마차도 말이랑 한 몸처럼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아이고, 내 꼬리뼈!”
옆에 앉아있던 마부가 비명을 지르고 마차칸 안에도 놀란 기사의 고함소리가 뒤따랐다. 황태자는 체면이 있어서 그런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조용했으나, 기겁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차의 차체가 점점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세상에, 이 넓은 사파리 월드에 오르막길이 있을 줄이야. 그때 내비게이션 목소리가 전방에 급커브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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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급커브 구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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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 구간에 사활을 건다!”
실비아는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고삐를 힘껏 당겼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으나 어디 레이싱 만화에서 본 대사를 읊고 싶었다. 운전의 짜릿함을 처음 맛본 실비아만 신이 났고 나머지는 죽을 맛이었다.
“아이고! 실비아 양! 이러다 마차 뒤집어져!”
마부는 벌벌 떨었지만,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에겐 시스템의 목소리가 있으니까. 급커브 구간 근처로 오자 시스템이 ‘드리프트를 시도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드리프트 설명 메시지. 고삐를 끝까지 당기면서 몸을 옆으로 꺾을 것. 실비아는 오락실에서 레이싱 게임을 했던 실력을 되살려 드리프트를 시도했다. 끼이이이익- 덜컹! 하고 마차가 크게 돌면서 땅바닥에 바퀴 자국을 남기고 무사히 코너를 돌았다.
“됐어!”
“아이고!”
실비아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마부가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신음했다. 실비아가 신나게 달리는 동안 마부의 엉덩이는 쉴 새 없이 엉덩방아를 찧길 반복했더니 걸레짝이 된 듯 너덜거렸다. 사색이 된 그는 문손잡이를 잡고 지탱하며 실비아에게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실비아 양. 빨라서 좋긴 한데, 마차는 몰아봤나요?”
“아뇨. 오늘 처음 몰아봐요.”
“아이고, 엘베우스 님!”
마차는 쏜살같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가 쭉 직진코스가 이어졌다. 이제 힘든 구간은 끝인가? 그때 메시지가 한 번 더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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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100미터 앞에 끊어진 다리가 있습니다. 힘껏 점프하시면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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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실비아가 시선을 멀리 던져보니 그녀만 볼 수 있는 홀로그램으로 바위에 화살표 그리고 공중에 화살표가 하나 더 있는 게 보였다. 저기를 차례차례 밟으란 소린가?
“간다! 꽉 잡으세요!”
“가긴 뭘 가! 아이고, 나 죽네!”
실비아는 힘껏 채찍질을 하며 옆에 상비돼있던 당근 낚싯대까지 요란하게 흔들었다. 마차가 미친 듯이 빠르게 속도를 내며 바위를 밟았고 그 후에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는 게임 세계, 현실에선 절대 따라 하면 안 된다.
‘저기 화살표!’
쾅- 하고 마차가 공중에서 부딪치더니 어디서 많이 본 게임의 효과음이 띠링-하고 울리며 책 모양의 아이템이 나왔다. 위에는 안 보이던 상자가…. 이거 딱 슈퍼마리x잖아. 책 아이템을 먹은 마차는 다시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고 다행스럽게도 반대편 절벽으로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쿵!
“콜록콜록, 어우, 먼지 봐.”
창을 열어두는 바람에 자욱한 흙먼지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실비아는 격하게 기침하며 손사래를 쳐 먼지를 쫓아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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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의 지력이 2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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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래서 남신이 분배 포인트를 쓰지 말라고 한 거구나!’
죽을 고비를 넘긴 덕에 지력을 20이나 얻었다. 상태 창을 켜보니 지력은 680. 이제 20만 더 올리면 700 달성이었다. 이것도 아마 분배 포인트를 안 쓰고 채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실비아는 신이 나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행복한 그녀와 달리 마차 안은 난장판이었다. 마부는 단시간에 폭삭 늙어 헛소리를 주절거렸다. 손을 휘휘 젓는 걸 보니 헛것이 보이는 듯했다.
“엄마, 깨우지 말라니깐…!”
…내버려 두면 돌아오겠지. 칸막이 너머로 마차 안을 살피려던 실비아는 문이 덜컹-하고 열리는 소리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기사가 우라엘 황태자를 부축한 채 땅으로 내려오다가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운전, 똑바로 안 해? 이, 이….”
“읏….”
기사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실비아를 향해 삿대질했고, 옆에서 부축받고 있는 황태자는 별말 없이 입을 가린 채 신음했다. 기사의 흉흉한 기세를 보니 금방이라도 실비아를 요절낼 것 같았다.
‘아우, 미니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황태자가 뒤에 타고 있단 걸 잠시 잊었구나. 이걸 어쩐다.’
실비아가 안절부절못하며 마차에서 내리자 기사가 황태자를 바위에 기대게 하곤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다. 다행히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말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히이잉, 히잉!”
“포리쉐!”
“저하, 포리쉐입니다!”
포리쉐의 울음소리였다. 황태자는 반가운 얼굴로 크게 포리쉐의 이름을 외쳤다. 매사가 심드렁해 보이던 그는 반려동물을 대할 때만큼은 표정이 풍부해졌다. 옆에 선 기사도 황태자를 호위하며 포리쉐의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와 동시에 실비아만 볼 수 있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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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계곡 입구에 도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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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도착했구나. 근데 인간적으로 초보운전자한테 이런 정신 나간 코스는 아니지 않니? 아무리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면 된다지만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도 아니고!’
늘 그렇듯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실비아는 마차 안에서 여전히 엄마를 찾는 마부는 내버려 둔 채 급히 황태자 일행을 쫓아갔다. 황태자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위에 앉아있었고 옆에 선 기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하, 큰일입니다. 계곡 아래에 있는 포리쉐를 어찌 데려와야 할지…. 대체 저것이 무슨 수로 아래로 내려갔을까요.”
“하….”
뒤따라온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계곡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강가에 서성이던 포리쉐가 위쪽을 쳐다보면서 애달픈 울음소리를 내는 게 보였다. 아마도 얼떨결에 내려갔다가 어떻게 올라와야 할지를 몰라 울부짖고 있는 듯했다.
절벽을 보니 사이사이 툭 튀어나온 돌부리들이 있어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써서 이곳저곳을 밟으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내려가다가 미끄러지면 그냥 그대로 머리가 깨지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