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아니, 아니야.”
아, 이게 아닌데.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져 버렸다. 그래도 진도를 더 나가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최근에 세이브를 안 했으니 데드 엔딩이 온다면 한참 전으로 돌아갈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옷을 단단히 여민 실비아의 눈에 제 체액으로 끈적해진 블루의 손이 들어왔다. 블루는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채 젖어있는 손가락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워진 실비아가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손, 손은? 씻어야지.”
『응? 아! 이거?』
블루는 마치 흙이 묻은 손을 보는 아이처럼 순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전 한큐에 다 해치워 버리려는 불도저 같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가만히 바라보던 손 위에 갑자기 물보라가 생성됐다. 세탁기 돌리듯 물보라가 손을 한 바퀴 휘감더니 금세 사라졌다. 블루의 손은 언제 변태짓을 했냐는 듯 보송보송해졌다.
“뭐야?”
『아아. 워시 마법. 이 목걸이로 하는 거야.』
블루가 차고 있는 목걸이가 은은하게 반짝이는 게 보였다. 맙소사, 완전 휴대용 샤워기! 루카의 손목시계 못지않은 꿀템이었다. 저거면 앞으로 어디서 뭔 짓을 하든 아무 문제 없을 거 같은데? 역시 19금 뽕빨겜. 믿고 있었어.
실비아가 반짝이는 눈빛을 눈치챈 블루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신기해 보여? 너도 씻겨줄게.』
블루가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뭐라 속삭이자 목걸이가 붕 뜨더니 환하게 빛났다. 실비아의 몸이 물보라로 감싸이더니 건조기에 돌린 것처럼 보송보송해졌다.
“우와! 근데 난 왜 몸을 씻겨주는 거야?”
『음, 나 때문에 몸이 더러워졌으니까.』
블루의 대답에 잠시 벙쪘던 실비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괜히 시선을 피했다. 한참 뒤 겨우 진정한 실비아는 블루에게 주말이 지나면 만나자고 다시 한번 약속했다. 그녀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블루를 내보냈다. 그는 문을 나서면서도 대담하게 실비아의 입술에 뽀뽀했다. 친구끼리는 꼭 헤어질 때 뽀뽀를 해야 한다나 뭐라나. 이미 친구의 개념을 잘못 알다 못해 오용하고 있는 블루였지만, 실비아는 정정해주지 않고 그를 배웅했다.
갑자기 블루가 라커룸에 난입하는 바람에, 뒤늦게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로 향했다. 실수 없이 잘해야 할 텐데. 기사들의 호위를 뚫고 황태자가 공략 캐릭터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으로 그녀의 머릿속이 혼잡했다. 떨리는 맘으로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동물원 부장이 찾아왔다. 그는 실비아를 데리고 입구로 빠르게 걸어갔다.
“실비아 양. 황제 폐하는 갑작스러운 일정이 있어서 오늘 못 오신다고 하셨어. 황태자 저하만 안내하면 될 거야.”
“아, 네네.”
실비아가 손을 비비며 긴장한 티를 내자 부장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황태자 저하한테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는 거 알지? 흑기사들…. 본 적 있어?”
“네. 봤어요. 무섭더라고요.”
“그래. 봤다니 다행이네. 조심해야 돼. 안 그러면….”
부장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실비아는 오돌오돌 떨면서 알아들었다고 대답했다. 목숨이 날아갈까 무서웠던 그녀는 시스템을 불러내 세이브를 했다.
’섹스하다가 죽는 거면 몰라. 이런 거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지.‘
입구에서 직원 일동들과 함께 긴장한 채로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놀이공원 입구 바깥에서 빵빠레 소리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우라엘 에스티나 디 엘리셔스 황태자 저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히이잉!”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갑옷이 덜그럭대는 소리와 함께 곧 저번에 봤던 포리쉐를 타고 들어오는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양쪽으로 악명이 자자한 7인의 흑기사들이 그를 호위하며 함께 걸어 들어왔다.
실비아를 포함 모든 직원들이 황급히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설마 황궁에서부터 황태자는 말 타고 기사들은 걸어온 건 아니겠지. 그럼 참 웃기겠다.‘
실비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러나 저번처럼 목에 칼이 들어올까 봐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건 잊지 않았다. 황태자는 간부들의 인사를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받더니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사무실까지 향했다. 실비아는 <동정 레이더>를 켠 채 은근슬쩍 기사들 근처로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기사의 흉흉한 눈빛을 받고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 상태 창이 뜨나 안 뜨나 확인만 하려는 건데 역시나 쉽지 않았다.
거참 까다롭다 까다로워. 실비아는 고개 돌려 티 안 나게 입을 삐죽거린 뒤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를 살폈다. 순간 말 위에 탄 황태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그 사이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어, 눈 마주쳤다. 음, 좀 싸가지 없지만 잘 생기긴 했네.‘
방긋. 실비아가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어 보였지만 찰나였다. 황태자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런…. 눈을 왜 저렇게 뜨고 지랄이람. 야멸찬 태도에 실비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근데 설마 말을 탄 채로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 걸까? 말을 탄 데다가 기사들이 계속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면 상태 창의 유무를 확인하려던 계획이 실패할 터였다. 다행히 사무실 앞에 다다른 황태자는 포리쉐 위에서 내렸다.
“히이잉!”
포리쉐는 샴푸 광고 모델처럼 말갈기를 찰랑거리며 말머리를 흔들었다. 바로 옆에 선 시종이 고풍스러운 도자기 잔에 따끈한 차를 부어 말 주둥이에 가져다 댔고, 포리쉐는 무슨 교육을 받은 건지 후루룩거리는 소리도 안 내고 차를 음미했다.
“실비아 양, 우리는 가 볼 테니까 안내 잘 해줘. 어디 어디 들려야 하는지는 잘 적어놨지?”
“네. 걱정 마세요.”
실비아의 곁에 서 있던 부장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물러났다. 직원들도 모두 사라지고 사무실 앞에는 황태자와 기사단, 그리고 실비아만 남았다. 황태자와 그녀의 거리는 눈대중으로 봐도 꽤 멀었다. 이걸 같은 공간 안에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
기사들은 하나같이 투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가 없었고, 그 주인인 황태자 또한 무표정이라서 투구를 쓴 거랑 진배없었다. 그들은 황태자가 눈을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 모습이 가히 물아일체의 경지라고 봐도 좋을 듯했다. 긴장으로 손에 밴 땀을 옷에 닦은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황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우라엘 황태자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오늘 엘리셔스 월드 안내를 맡게 된 실비아라고 합니다.”
“알아.”
’저 저, 싸가지. 길게 말했는데 돌아오는 건 딱 두 음절이네. 휴….‘
실비아는 속에서 불이 올라왔으나 옆에 선 기사들의 흉흉한 눈빛을 보며 억지미소를 유지했다. 황태자가 그녀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포리쉐의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순간 제가 말을 걸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을 무시하려는 의지가 완연한 태도였다.
실비아가 머뭇거리며 즉각 안내하지 않자 흑기사가 검을 겨누었다. 저번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이놈의 막돼먹은 황실은 커뮤니케이션을 검으로 하는 듯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날카로운 검 끝에 실비아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저하께서 바로 안내하라고 하십니다.”
“아이고, 그럼요. 어서, 어서들 따라오세요.”
실비아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황태자 행렬이 따라왔다. 앞장서 가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거둬지고 서서히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그렇지. 뭘 잘못했다고 위협부터 하고 보는 건지. 상태 창 확인이고 뭐고, 안내를 맡다가 목숨을 부지할지 걱정될 정도였다.
우선 실비아는 사전에 부장이 일러준 대로 엘리셔스 월드의 5대 놀이기구를 황태자와 함께 둘러봤다. 거리가 있는지라 뒤돌면서 간간이 목소리를 크게 해 안내를 해야 했는데, 이러고 있으려니 관광지 가이드가 된 거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기는 관람차입니다!”
“여기는 이용객이 가장 많은 특급 열차고요!”
열심히 안내하다 보니 실비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엘리셔스 월드가 원래 황태자 관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매년 시찰을 나왔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하나하나 다 보는 거지. 힐끗 멀리서 그의 표정을 살피니 황태자는 놀이기구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시찰을 처음 나온 건가? 궁금하긴 한데 옆에 선 기사들 때문에 좀 무서워. 그래도 궁금증은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
실비아는 목을 가다듬고 황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왜 계속 목을 가다듬느냐면, 황태자가 저 멀리 있기 때문이었다. 고함치는 것과 말을 거는 것, 그 어딘가의 경계 정도로 적당한 데시벨의 목소리를 내야 했다.
“우라엘 황태자님! 여기는 귀신의 집입니다. 놀이기구 안내는 여기까지 할까요? 이미 여러 번 보셨을 테니까요!”
대놓고 물어보기엔 꺼려졌던 실비아는 살짝 떠봤다. 황태자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기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실비아의 말에 대신 답했다.
“안내를 더 하라고 하십니다. 우라엘 황태자 저하께서는 첫 시찰을 나오신 거니까요.”
“아아, 네!”
왜 계속 직접 답하지 않고 기사를 대신 시키는 걸까? 황태자는 상등신인 걸까? 실비아는 앞 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며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가늠했다. 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 실비아나 기사나 서로 말할 때 큰 목소리로 외치는 상황이 반복됐다. 아마도 황태자는 채신머리없게 큰 목소릴 내기 싫어서 기사에게 대신 말을 전달하게 시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가까이 오면 되잖아. 하…. 귀하신 몸이라 이거지. 대체 얼마나 귀하게 자랐기에 저렇게 싸고도는 거야.‘
실비아는 속으로 툴툴댔지만, 겉으로는 충실하게 안내를 계속했다. 놀이기구 안내가 끝나고 이제는 다른 주요 건물들을 돌아볼 차례였다. 앞장서 걷던 실비아의 앞에 갈림길이 보였다. 아쿠아리움과 사파리월드. 어디로 먼저 갈까? 그 순간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