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구치소랑 비슷하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건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반대편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곧 누렇고 길쭉한 몸뚱이가 들어왔다.
“어, 어!”
“실비아 님!”
실비아가 멍하니 입을 벌리며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자 세비스도 따라 일어섰다. 실비아의 눈이 흔들리며 망막에 물기가 조금씩 차올랐다. 림보가 들어오는 순간이 그녀의 눈에 슬로우 모션처럼 펼쳐졌다. 귓가에는 이산가족 상봉 때 나오는 구슬픈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환청까지 들렸다. 저 재간둥이 같은 표정하며, 목에 달린 리본, 경망스러운 걸음걸이까지. 세비스가 말한 대로 림보가 맞았다!
실비아는 경비의 눈도 신경 쓰지 않고 유리에 착 달라붙어 림보를 애타게 불렀다.
“림보야!”
“히잉!”
림보도 그녀를 알아보자마자 말발굽을 유리 벽에 딱 붙이곤 눈물을 글썽였다. 실비아가 난간 위로 올라가서 유리창 위에 있는 환풍구를 뜯고 틈새에 손을 내밀었다. 림보도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 올라가 말발굽과 손이 만나는 이상한 쇼가 잠시 벌어졌다.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히잉!”
“거! 위에 환풍구는 뜯지 마세요!”
경비가 제지하는 바람에 둘은 가까스로 진정하고 의자에 앉았다. 세비스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그들의 상봉 장면을 지켜봤다. 실비아는 곁에 앉은 세비스에게 숨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림보가 무슨 말 하는지 나한테 알려줘.”
“네. 모든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동족이 아니니까. 뜨문뜨문 들을 순 있지만 자세히는…. 우선 최대한 해석해볼게요.”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림보는 입마개를 하고 있지 않았기에 세비스의 능력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림보야, 어쩌다가 여기 있는 거야.”
“히이이잉!”
림보가 제 가슴을 퍽퍽 치더니 눈 주위로 말발굽을 돌렸다. 그러더니 말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게 뭔소리지? 실비아가 세비스를 바라보자 그가 경비의 눈치를 보더니 실바아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음, 우선 억울하다고 하는 거 같네요.”
“히이잉!”
“그리고… 으음.”
“히잉, 히이이잉!”
세비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실비아는 초조한 눈으로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경비병이 그런 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기다리다 못한 실비아가 세비스를 재촉했다.
“뭐라고 해?”
“사랑… 사랑?”
“응?”
사랑이라니. ‘사랑해요. 주인님’이라고 하려는 걸까. 림보와 내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실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세비스는 눈을 여기저기 굴리다가 제가 들은 게 맞나 의심하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사랑에 빠진 게….”
“어?”
“죄는 아니잖아?”
뭐지. 무슨 뜻이지? 실비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실비아가 눈으로 묻자 세비스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림보를 바라보니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쩐지 림보 주변에 붉은 단풍잎이 쓸쓸하게 떨어지는 환상이 보이는 거 같았다.
구석에 서 있던 경비병이 남은 시간을 알렸다.
“2분 남았습니다.”
“아, 네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세비스가 들고 있던 티라미수 케이크 상자를 받아 림보 눈앞에 들고 흔들었다. 림보의 눈이 케이크 상자의 동선을 따라 굴렀다.
“림보야. 네가 좋아하는 티라미수 케이크야. 뭐 때문에 여기 있는지 모르니 빼낼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네. 나, 조만간 황궁에서 근무하게 되거든. 그때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
“히이잉….”
구석에 선 경비가 시간이 다 됐다며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실비아는 경비에게 티라미수 케이크를 전달해달라고 말한 뒤 뒤돌아 방을 나서는 림보를 향해 외쳤다.
“곧 다시 올게. 기다리고 있어!”
“잘 있어. 림보야! 가능한 자주 들를게!”
세비스도 림보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5분간의 짧은 면회가 끝났다. 아쉬운 얼굴로 면회실을 나온 둘은 은색 기사를 따라 다시 밖으로 향했다. 세비스가 은색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님, 림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죄명은 없습니다. 감시소는 죄를 지은 자가 수감되는 게 아니라….”
“네, 아니면요?”
기사가 말하기를 망설이자 세비스가 부드럽게 되물었다. 기사는 힐끗 실비아와 세비스를 바라보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황족이나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를 시에 수감됩니다.”
“세상에. 그럼 림보가 어떤 높으신 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거네요. 그럼 그분이 누군지는 알 수 있을까요?”
두 손을 고이 모은 실비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니. 누군지 알면 황궁에서 근무할 때 친하게 지내면서 림보를 풀어달라고 부탁해 볼 텐데. 그녀의 애원하는 눈빛에 기사가 잠시 흠칫했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저으며 알려주길 거부했다.
“어차피 알아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연말에 건국기념일이 되면 감시소에 갇혔던 이들을 풀어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셔야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너무 잔인해요.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연말까지 지내야 한다니.”
“척박하다뇨?”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출구 쪽이 아닌 다른 쪽 복도를 가리켰다. 거기서 뭔가 따끈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조금 있으면 수감자들과 수감동물들이 온천욕을 즐길 시간입니다. 그 후에는 황실 전속 마사지사들이 그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사지 시간이 있습니다.”
“예? 무슨 마사지….”
실비아가 의문스러워하는 도중에 복도 구석이 소란스러워졌다. 복도에서 하얀 요리사 복장을 입은 이들이 은색 푸드 커버를 씌운 접시를 가득 실은 수레를 바삐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는 저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사지 후에는 수감자들의 건강을 고려해 맞춤형 음식을 제공합니다. 물론 동물들은 건강을 고려해서 아까 사식으로 가져오신 티라미수 케이크 같은 건 잘 안 주긴 합니다만….”
“잠시만요.”
세비스가 손을 들으며 기사의 말을 막았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봤다.
“저희를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아까 지나가면서 수감자들이 철창 감옥에 갇혀 있는 걸 봤습니다만?”
“그건 하루에 일정 시간 겉치레로 가둬 두는 겁니다. 저희 감시소는 인권은 물론, 동물권을 챙기기로 유명한 곳이죠. 수감자들을 홀대하면 동물 보호 단체가 난리고, 반대로 잘 대해주면 암암리에 민원이 계속 들어오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희 감시소는 수감자들의 복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대답에 세비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침음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눈을 떴다.
“그래요, 좋습니다. 하…. 여기 수감되려면 어떤 죄를 저지르면 되죠? 아니지, 림보 대신에 제가 수감될 순 없나요?”
“그게 무슨 소리….”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억울한 림보는 놔두고 저를 가둬주세요.”
감시소의 멋진 호텔링 서비스, 아니 수감환경에 실비아의 눈빛도 세비스와 같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기사는 고개를 젓더니 그들을 출구 쪽으로 끌고 갔다.
“안 됩니다. 여기서 소란 그만 부리고 나가주세요.”
“소란 정도론 가둬주실 수 없는 건가요? 에잇, 퉤. 자! 침 뱉었습니다. 제발 저를 가둬주세요!”
“에잇, 저는 과자봉지를 버렸습니다! 저를 가둬주세요!”
세비스가 침을 뱉고 실비아가 과자봉지를 버리며 읍소했다. 그들은 감시소 안에서 림보와 한솥밥을 먹고 싶어 절절하게 외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기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출구로 데려갔다. 결국 둘은 감시소 밖으로 쫓겨났다.
“어휴, 무슨 힘들이 이렇게…. 소란 부려도 소용없으니 이만들 돌아가세요.”
기사가 손을 털곤 안으로 들어갔다. 실비아가 아쉬운 눈으로 감시소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참에 우리도 감시소 식구가 되면 좋았을 텐데…가 아니라. 안타까운 일이야. 뭐가 됐든 갇혀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니까…. 안타까운 거 맞겠지?”
“그러게요. 림보도 우리처럼 평범한 곳에서 자고 평범한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할 텐데요.”
“기사님도 참, 감시소 한식구가 되고 싶은 마음을 이리 몰라주다니. 조금 섭섭하긴 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둘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림보를 저런 아늑한 곳에 혼자만 살게 놔두는 건 너무 배아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연말까지 림보를 저기 놔두는 건 좀 그래. 황족이나 고위 귀족의 심기를 거스를 경우에 수감된다니. 림보를 가둔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네.”
“아까 저 기사가 말하기를 꺼려하는 거 보니 다른 사람들도 쉽게 말하지 않을 거 같아서 알아내기 쉽진 않겠어요. 혹시 모르니 황궁에서 일하면서 사용인들에게 아는 거 있나 물어봐야겠어요. 소득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요.”
“그래.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 림보가 저기서 홀대받는 건 아닌 거 같으니 탈옥 시도 같은 건 안 하겠어.”
감시소 수감환경을 보고 나니, 진정한 자유인이 훌륭한 환경을 누리고 있는 림보인지 밖에서 개고생하는 자신들인지 헷갈리는 씁쓸한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어쨌든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마음을 놓은 실비아네는 가뿐해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
실비아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베란다로 포르르 새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꽝! 하고 유리에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참둘기였다.
“구구! 구구구!”
참둘기는 양 허리에 날개 끝을 댄 채 항의하듯이 닫힌 유리창과 실비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테라스에서 씩씩댔다. 실비아는 깜짝 놀라 얼른 유리창을 열고 테라스 난간에서 헤롱거리고 있는 참둘기를 손으로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