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점점 가을 날씨가 완연해서 밤이면 꽤 쌀쌀한데, 블루가 어제 무사히 노숙했을지 걱정됐다. 한참을 헤매던 실비아는 아이스크림 노점에서 하늘색 머리를 발견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살짝 한가한 노점에서 그는 홀로 아이스크림을 뽑아 먹고 있었다. 사장도 없고, 손님도 없는 한적한 노점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실컷 먹고, 그야말로 개꿀 알바였다.
실비아가 경악한 표정으로 다가가자 블루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블루야! 너 어떻게 아이스크림 노점에 있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실비아, 너도 하나 먹어.』
“‘어쩌다 보니’라고? 너 정말 대단한 아이였구나. 다시 봤어.”
말없이 미소 지은 블루가 아이스크림을 뽑아 실비아에게 건넸다. 아무리 단순 알바생이라지만 어떤 정신 빠진 사장이 블루를 고용한 걸까? 실비아는 간판을 살피다 블루가 고용될 수 있었던 연유를 알았다.
엘리셔스 월드는 노점도 개인 사업이 아니라 국영이었다. 때문에 아이스크림 가게 같은 사소한 상점들은 대충 굴러갔고, 덕분에 아이스크림이나 축내는 애물단지 블루가 알바생으로 고용될 수 있었던 것.
‘제국 꼴 잘 돌아간다….’
실비아가 뒷짐을 지고 혀를 쯧쯧 차는 새에 블루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노점 밖으로 나왔다. 노점 앞 테이블에 앉은 둘은 파라솔 그늘에서 한가로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에 노점 카운터 앞에 선 관람객이 아이스크림을 찾으며 ‘저기요! 누구 없나요?!’를 애타게 외쳤지만 블루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불쌍한 관람객은 카운터에 돈을 올려둔 뒤 손을 힘들게 뻗었다. 아이스크림 기계가 손에 닿을 듯 말듯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낑낑대며 본인의 노동력으로 아이스크림을 뽑아야 했다.
실비아는 콘을 못 찾는 바람에 맨손에 아이스크림을 받아 가는 관람객의 애처로운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블루야, 어제 잠은 어떻게 잤어? 밤공기가 추웠을 텐데.”
『엄청 추운 건 아니라 괜찮았는데 잘 만한 곳이 없었어. 밤 되니까 건물마다 문단속을 철저하게 하더라. 대로에서 잘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물개로 변신해서 우리에서 잤지.』
“우리? 그렇구나….”
물개 우리에서 자다니. 블루가 잠을 잘 만한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면 진도를 나가보려고 했는데,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아무래도 던전 가기 전에는 스킨십 진도를 더 나가긴 글렀나 보다. 심드렁하게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던 실비아는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턱을 괸 블루가 그녀를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왜?”
『오늘은 안 해줘?』
“뭘?”
실비아의 물음에 블루가 검지로 제 입술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이 요오망한 것. 입술 맡겨놨어? 맡겨놨냐고. 실비아가 아무 말 없자 블루가 붉은 입술을 새초롬하게 내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우가 따로 없는 모습에 실비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실비아는 주위를 급하게 살피곤 쪽-소리나게 블루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비곤 물러났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블루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한 듯 치켜 올라갔다.
『아, 더 해줘. 이게 뭐야.』
“맡겨놨어? 오늘은 이걸로 참아.”
『칫….』
블루는 아쉬워하며 입술을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놀이동산 한가운데였다. 유니폼을 입어 누가 봐도 직원인 둘이서 더 진한 스킨십을 하다간 관람객들이 항의할지도 몰랐다. 알바 중인 블루를 어디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던전 공략할 때까지 참아야겠어. 상황도 여의치 않고, 아직 지력도 700이 안 됐고 말이야.’
둘이서 노닥거리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블루는 카운터로 가더니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렸다며 좋아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많은 손님이 다녀갔는지 카운터 위에는 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블루 덕에 엄연히 알바생이 있는 아이스크림 노점이 무인 판매기가 됐다. 창조경제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일해도 되는 거야?”
『응?』
“그, 아까 보니까 손님들이 아이스크림을 손에 받아 가던데.”
『아! 정말? 확실히 잘못되긴 했네.』
블루는 화들짝 놀라더니 콘이 든 비닐을 입구 근처에 배치했다. 그러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문제없지?’라고 말하며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아이스크림 노점이 개판으로 돌아가든 말든….’
이 넓은 곳에서 이상한 알바생 한 명쯤 일한다고 해서 큰일은 안 날 터였다. 실비아는 애써 합리화하며 더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 * *
블루가 엘리셔스 월드 내에서 성공적으로 위장 취업한 것도 확인했겠다, 실비아는 걱정 없이 제 할 일을 했다. 일하는 사이사이 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어쩌구를 읽으며 공부에 매진했다. 블루보고 뭐라 할 게 아니었다. 실비아도 이번 주만은 훌륭한 월급도둑이었다. 그래도 사이사이 주어진 최소한의 일을 했더니 간간이 지력 상승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대로는 부족해. 인턴을 한주 빨리 관두는 바람에 지력 700까지 올리는 건 무리일 거 같은데? 이번 주까지 다니면 600까진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말이야. 레벨 업 포인트가 있지만 남신이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었고. 그러니 그건 아껴두고…. 이대로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책을 펼쳤다. 일하는 틈틈이, 그리고 집에 가서도 밥 먹으면서 책 보고 화장실 가서 책보고 자기 전에 책보다가 잠들고 했더니 어느새 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어쩌구의 끝 페이지에 다다랐다.
이 게임 혹시 심x 베낀 건가? 머리 위에 상태 바는 보이지 않았지만, 책을 다 읽어야 능력이 상승한다니, 마치 자신이 심이 된 기분이 들었다. 뭔들 안 베꼈겠어. 이놈의 노점 게임. 실비아는 헛웃음을 치며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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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방법>을 완독하셨습니다. 지력이 5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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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대박! 이 정도면 잘하면 이번 주말에 지력이 700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실비아는 단어장을 매일 열심히 섭취 중이었고 <전교 1등의 속옷>도 부지런히 베고 잤다. 속옷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지력 10 상승효과를 줬다. 인턴 일을 하며 지력 상승 메시지도 하루에 한두 번씩 떠올랐고 말이다.
실비아는 상태 창을 켜 현재 지력이 얼마인지 확인했다. 수요일인 오늘, 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어쩌구 덕에 지력 50이 올라 실비아의 지력은 630이었다. 이대로면 금요일이면 목표 지력을 달성하게 되는 걸까. 아니지…. 실비아는 가방을 뒤적였다. 단어장이 표지만 빼고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게 보였다. 안에는 뒤적일 것도 없이 달랑 한 장의 단어장이 남아있었다.
‘내가 대체 몇 장을 먹은 거지. 벌써 바닥을 드러내다니.’
아슬아슬하게 700이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배 포인트는 최대한 아껴둘 거고, 그렇게 되면 던전에서 지력 상승 이벤트가 뜨길 바랄 수밖에.
‘오늘 림보 면회 날이지.’
출근할 때 이미 반차를 내놨다. 시계를 보니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급히 놀이동산 출구로 향했다. 림보를 곧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빠르게 뛰었다. 모범 마차를 잡아탄 실비아는 잠시 졸았고, 눈을 떠보니 저번처럼 황궁 근처였다. 마차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비스가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실비아 님! 오셨군요.”
“응. 들어가자.”
저번 축제와 달리 황궁 앞은 한산했다. 개방 축제 날과 달리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경비대장에게 감시소 면회를 왔다고 말하자 대로가 아닌 다른 샛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실비아네는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감시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샛길의 끝엔 저번에 봤던 우중충한 감시소가 있었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서 있던 은색 갑옷의 기사가 투구 사이로 그들을 응시했다.
“면회 신청하신 분이시죠? 누구를 보러 오신 거죠?”
“림보라고…. 아니지. 말을 보러 왔는데요. 여기 잡혀 온 베이지색 말이요. 저희는….”
림보라는 이름을 여기서는 모를 터였다. 세비스는 림보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자신들이 그 말의 반려인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종종걸음으로 은색 갑옷 기사를 뒤따라가던 실비아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고함 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기사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어 농담 한마디 건넬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비아는 세비스의 소매자락을 살짝 붙잡곤 눈을 도르륵 굴렸다.
“좀 무섭다…. 그치?”
“무서워요?”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비스가 달달 떨리는 조그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제 이렇게 덩치가 커진 건지 실비아의 조그만 몸이 그의 너른 품속에 쏙 들어갔다. 세비스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매단 채 입을 열었다.
“자, 이러면 이제 안 무섭죠? 무서웠구나, 우리 주인님.”
“뭐야.”
“아, 음.”
실비아가 떫은 감 씹은 사람처럼 쳐다보자 어깨 위에 올라온 손이 다시 내려갔다. 애가 요즘 따라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실비아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위아래로 세비스를 훑어봤으나 뭐 잘못된 거 있냐는 듯 태연한 그의 얼굴에 신경을 껐다.
앞서가던 기사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어느 철문 앞에서 멈췄다.
“면회실에 도착했습니다.”
“네. 면회는 얼마나 할 수 있나요?”
“들어가는 순간부터 5분입니다.”
투구 속에 있는 눈이 벽시계를 응시했다. 실비아는 세비스와 눈빛을 교환하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슴에 양손을 얹고 안을 둘러보니 유리창으로 막혀있는 반대편 방이 보였다. 양쪽 방에는 경비들이 서 있어 대화를 감시했다. 아직 림보는 도착하지 않아 반대편은 비어 있었다. 둘은 의자에 앉아 잠시 대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