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눈을 의심할 법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식대에 혼자서 껑충 키가 큰 직원이 한 명 있었는데, 모자 사이로 하늘색 머리가 보였다. 설마설마했더니 블루였다. 그가 구내식당 직원이 돼서 직원들에게 수프를 퍼주고 있는 게 아닌가. 마스크를 한 블루가 눈웃음을 치며 수프를 건네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살살 녹았다. 심지어 블루는 인간의 언어로,
“맛있게 드세요.”
라고 했다. 이게 뭔 상황이지? 그가 퍼준 수프를 받은 실비아는 주위를 둘러보곤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야? 너 인간 말 할 수 있는 거였어?”
『아니. 이건 방금 익힌 거야. 목이 있으니까 말은 할 수 있지. 유창하게 대화는 못 하지만.』
“그래. 그걸 떠나서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실비아의 물음에 블루가 어깨를 으쓱했다.
『식당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급하다고 빨리 오라고 하더니, 수프 나눠주라던데?』
“응? 으음…. 뭐, 잘 적응하니 보기 좋네. 하니까 되잖아! 그렇게 버티는 거야. 파이팅.”
직원이 워낙 많은 데다가 일일 알바생도 쓰는 엘리셔스 월드다 보니 블루를 직원 중 하나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급하게 속삭인 뒤 직원들이 앉은 테이블로 갔다. 힐끗 돌아보니 블루가 무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치 없는 애인 줄 알았더니 100년 산 게 헛산 건 아니었나 보다. 실비아가 테이블에 앉자 메리 할머니와 부장이 밝은 얼굴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실비아 양, 거봐. 난 실비아 양이 잘 될 줄 알았대도.”
“감사합니다, 할머니.”
“아이고. 보통내기는 아닌 줄 알았다만 엄청난 인재였어! 앞으로 신문에서 실비아 양 얼굴을 자주 보겠고만!”
“어머. 감사해요. 부장님.”
나머지 직원들도 실비아에게 축하 인사를 하며 시끌벅적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잠시간의 축하 타임이 지나가고 부장이 모두를 주목시키더니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이번 주 금요일에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가 시찰 오신다고 말했던 거. 다들 기억하고 있죠? 모두들 잘 준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네!”
‘맞다. 잠시 잊고 있었네. 이번 주에 시찰이 있다고 했었지. 황태자를 이번에 보게 되면 남주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아봐야겠어.’
7인의 기사단이 황태자를 둘러싸고 있어서 쉽진 않겠지만…. 생각에 빠져 있던 실비아는 자신을 부르는 부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 양! 이번 주 시찰 때 실비아 양이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의 안내를 맡아줘.”
“제가요?”
“응. 인턴 생활의 마지막 업무야. 잘 해낼 수 있지?”
잠시 머뭇거리던 실비아는 하겠다고 대답했다. 안내를 맡게 되면 황태자를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상태 창이 뜰지도 몰랐다. 다짜고짜 검을 들이대던 흑기사를 떠올리며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무례하게 굴지만 않으면 큰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 없겠지. 없어야만 해…. 실비아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떨치며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실비아는 열심히 엘리셔스 월드를 돌아다녔다. 인턴 기간을 다 못 채우고 관두는 셈이니, 마지막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평소보다 더 성실하게 일했다. 맡지 않은 일까지 손수 나서서 했더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그 와중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깜짝깜짝 놀라야 했다. 가는 곳마다 블루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블루는 구내식당 외에도 아쿠아리움 복도를 청소하거나 사파리에서 잡초를 뽑는 등 실비아가 가는 곳마다 뭔가를 하고 있다가 발견됐다. 심지어 어디서 구해온 건지 사원증도 목에 걸고 있었다.
정체가 드래곤이 아니라 카멜레온이었나 싶을 정도로 주위와 잘 융화되는 모습이었다. 인간 말도 잘 못 하는 애가 무슨 재주로 여기저기 숨어드는 건지 신기했다. 마차 안에서 잔디 씨를 뿌리던 실비아 옆에서 직원이 혼잣말하듯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외국인 친구가 일 잘하네.”
“예? 외국인 친구요?”
이게 뭔 소린가. 실비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자이언트 악어 옆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블루를 힐끗댔다. 햇볕을 가리려고 선캡을 쓴 블루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이곳 직원이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사파리 직원이 블루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응.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거 보니 타 대륙에서 온 친군가 봐. 놀이동산에 일자리가 많으니까 외국인 친구들이 여기서 일 많이 하더라.”
“아아….”
순간 험악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이언트 악어가 블루를 만만하게 보고 크악-하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블루는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쭈그려 앉은 채 자이언트 악어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는 물기 젖은 우산을 털듯 자이언트 악어를 흔들더니 저 멀리 내팽개쳤다. 그 모습에 직원이 혀를 내둘렀다.
“젊은 친구 같은데, 우리 제국말만 유창하면 직원으로 써도 되겠어. 저 저, 힘센 거 봐! 믿음직하네.”
“어우, 악어를 무슨 깨 털듯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이 남 걱정이라던가. 현생의 자신과 다를 게 없다고 날백수라고 동질감을 가지던 게 조금 전이건만, 블루는 누구 못지않게 빨리 사회에 적응하고 있었다. 아까 인간 말도 한마디지만 익히는 거 보니 옆에 붙어서 가르쳐주면 제국 언어도 금방 마스터할 것 같았다.
‘잠깐. 쟤가 지낼 곳이 없다고 했었지? 저렇게 일할 수 있는 거면 기숙사가 있는 직장에 취직시키면 될 것 같은데?’
블루는 둥지로 돌아가기 싫다고 했었다. 실비아도 공략 남주 중 한 명인 블루를 어디 있는지 모를 먼 둥지에 돌아가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씨앗을 모으려면 자주 합체해야 할 테니까.
‘엘리셔스 월드는 정직원이 되기 힘든 곳이니 말이 어눌한 블루가 취직하긴 무리야. 알바생으로야 가능하겠지만, 기왕지사 인간 세계에 사는 거 정규직으로 취직시키는 게 좋겠지.’
실비아는 조만간 블루를 옆에 앉혀놓고 신문 구인 광고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퇴근하는 길, 실비아는 계획한 대로 유토피아 백화점으로 빠르게 향했다. 퇴근 시간이라 길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아직 슈퍼맨 자세를 할 용기가 안 났던 그녀는 우선 인벤토리에서 <행운의 동전>을 꺼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분수대 바닥을 보니 이미 동전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 세계도 분수대만 보면 동전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천지로구나. 심호흡한 실비아는 경건한 마음으로 분수대 안에 동전을 던져 넣었다. 기왕지사 가운데 있는 접시에 들어가도록 던지자, 샤라랑- 하는 맑은 효과음이 울리더니 그녀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실비아는 갑작스럽게 밝아진 사위에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주변을 보니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왠지 익숙한데….”
“오랜만이야 실비아.”
“어머!”
등 뒤를 두드리는 손길에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돌았다. 얼굴이 빛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익숙한 외양, 남신이었다.
여기 애들은 사람을 놀래주려고 작정한 애들밖에 없나? 실비아는 루카의 형이 아닌 남신임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요. 예고 좀 하고 등장할 순 없을까요?”
“예고하면 재미없잖아. 잘 지냈어?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
남신이 손을 딱-소리 나게 부딪치자 하얀 의자가 두 개 생겼다. 실비아가 앉자 남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남신은 입술 위가 밝은 빛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는데, 표정이 잘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게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남신의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냥 지냈지. 신으로 사는 건 네 생각보다 훨씬 따분해.”
“아아….”
신으로 사는 게 따분하다니. 그럼 그 이전의 삶도 있었던 걸까? 실비아는 순간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얘기가 길어질까 싶어 참았다. 실비아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 남신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는 너는 잘하고 있는 거 같더라. 내 힘이 많이 회복된 거 같아. …게임은 재밌어?”
“네? 재밌다기보단 그냥 천국에 가려고 하는 거죠.”
게임이 재밌냐니. 모니터 보며 했다면 물론 재밌었겠지. 그러나 실비아는 게임에 빙의 된 상태로 매일 죽도록 일만 하는데 재밌을 리가 없었다. 물론 남주들이랑 섹스하는 건 재밌지만, 그건 왠지 민망해서 말하기 싫었다. 남신은 실비아의 말에 어쩐지 침울해진 것 같았다.
“재미없다니…. 그랬구나.”
“?”
실비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게임이 재미없다는데 남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남신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요새 이상한 꿈을 계속 꿔서 머리가 복잡해졌어.”
“이미 들었는데요.”
실비아의 대꾸에 남신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화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선물을 줘야겠네. 아이템의 이름도 <행운의 동전>이니까 말이야. 평소엔 볼 수 없는 행운을 선물해 줘야겠지.”
남신이 공중에서 상자를 불러냈다. 두 개의 상자가 실비아의 눈앞에 둥실 떠올랐다.
“선택해. 몸매 따라갈래, 얼굴 따라갈래?”
“예? 뭐 그런 괴상한 선택지가…. 얼굴이요.”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으나, 실비아는 본능대로 얼굴을 선택했다. 몸매도 좋지만, 얼굴이 역시 최고였다. 그러자 상자 하나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머지 하나가 남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상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손 위에 안착했다. 실비아는 두근거리는 맘으로 상자를 열었다. 눈부시게 하얀빛이 상자에서 새어 나오더니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