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우선 네가 일하는 동안은 나도 여기서 직원처럼 있으려고!』
이래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대기업인데 위장 직원 하나 못 잡아낼까 싶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실비아와 달리 블루는 가뿐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는 물개에게 손을 흔든 뒤 실비아와 함께 물개 우리를 나왔다.
블루와 함께 놀이동산을 산책하며 돌아다닌 실비아는 제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엘리셔스 월드가 얼마나 광활한 곳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이 워낙 넓은지라 여기저기 부서를 알 수 없는 직원들이 많이 돌아다녔고, 그 덕에 블루를 수상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저번의 아이스크림 노점으로 향했다. 실비아는 블루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
“낮에는 직원처럼 있다 치고 밤에는 어쩔 거야?”
『이 넓은 곳에 나 잘 곳이 없겠어? 물개 우리에서도 잤는데 뭐. 후아, 오랜만에 맘껏 돌아다니니 살 것 같아.』
블루는 오랜만의 자유가 좋은 듯 만면에 상큼한 미소를 띠고 기지개를 켰다. 반면에 실비아의 얼굴엔 실망이 어렸다. 던전 가기 전엔 진도를 나가기 무리겠네. 아무리 그래도 첫 섹스인데 놀이공원 어딘가에서 유니폼을 입고 할 순 없으니까. 어느덧 야외플 매니아라 불려도 될 정도로 관록이 쌓인 실비아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첫 섹스는 침대 같은 편안한 곳에서 했으면 싶었다. 그녀만의 섹스 철칙이라고나 할까.
실비아는 음흉한 의도를 숨기고 최대한 담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공략조건이 안 채워졌으니, 며칠은 블루가 길바닥에서 자든 말든 신경 끄고 그 후엔 어떻게 할지 묻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던전! 던전을 가는 게 첫 번째니까.
“…그럼 그 후엔?”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맑은 감색 눈에 실비아의 속이 갑갑해졌다.
“뭐? 너 백 년 살았다며. 앞날에 대한 계획도 없는 거야?”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어우, 답답해!”
다른 애들처럼 재깍재깍 던전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계획이 없다니 분통이 터졌다. 뭔 놈의 드래곤이 이렇게 생각 없이 살 수가 있지. 백수로 뒹구는 아들을 보는 양 실비아의 낯빛이 흉흉해지자 블루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눈치를 봤다.
『왜 그래. 일단 너랑 놀 생각밖에 안 했….』
“놀아도 제대로 된 장소에서 놀아야 할 거 아냐. 너 뭐 해야 할 거 없어? 아니면 하고 싶은 거라던가!”
실비아가 초조하게 묻자 블루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굴리더니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 나온 김에 부모님을 만나보고 싶긴 해.』
“부모님을?”
부모님이란 말에 실비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블루의 부모님은 그를 둥지에 놔두고 오래전에 유희를 떠났다고 하셨었지. 전혀 티 내지 않더니 부모님이 보고 싶긴 한가 보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블루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에 온 편지에는 심해도시에 계신다고 했었어.』
“심해도시?”
『응. 가본 적은 없는데 어떻게 가는 건지는 알아. 이종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알고 있거든.』
“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실비아가 침음을 흘리자 블루의 말이 이어졌다.
『혼자서 가긴 용기가 안 나. 너만 괜찮으면, 같이 가줄래?』
블루의 말이 끝나자마자 띠링-하고 효과음이 울리더니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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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에 잠긴 도시>의 입장권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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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입장권이었다. 기뻐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블루의 눈이 너무 슬퍼 보여 실비아의 기분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망설이던 실비아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블루의 눈빛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고마워. 네가 같이 가준다니 정말 좋아.』
블루가 부드럽게 웃으며 실비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 두 사람의 손을 적셨다. 블루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내렸다. 붉은 혀가 끈적해진 실비아의 손을 핥았다. 대화가 끊기자 손가락을 야릇하게 할짝거리는 소리만이 끈적하게 귓가를 적셨다. 순식간에 묘해진 분위기에 실비아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블루가 이렇게 예고 없이 훅 들어올 때마다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잠깐, 흐읏…. 핥지 마, 더럽잖아.”
『…괜찮아.』
얌전히 손가락 사이를 핥아 올리던 블루가 눈만 들어 실비아를 응시했다. 나른한 감색 눈에 넋이 나갔던 실비아는 순간 파드득 떨며 제 손을 뒤로 물렸다.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니 다행히 둘이서 그러고 있는 꼴을 지켜보는 이는 없었다.
“됐, 됐어! 화장실에 갔다 올게. 손 씻어야겠다. 기다리고 있어.”
『응.』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은 블루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잰걸음으로 화장실로 간 실비아는 열을 식히려 급하게 세수했다.
‘어머 어머, 정말 미쳤나 봐! 아이스크림이 묻자마자 손을 빨다니. 야해!’
블루는 사실 드래곤이 아니라 여우가 둔갑한 게 아닐까? 천연덕스럽게 끈적해진 손을 핥다니.
실비아는 흠뻑 젖은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헛웃음 쳤다. 다른 애들은 너무 건전하게 구는 바람에 실비아가 먼저 철면피처럼 행동해야 유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블루는 다른 남주들과 달리 틈만 생기면 들이대는지라 실비아를 계속 당황하게 했다. 주로 장난을 치던 사람이 되려 장난을 당하면 놀라며 어색해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휴, 입장권을 확인해 볼까.’
달아오른 얼굴이 식자 입장권이 생각났다. 인벤토리를 열어 새로 생긴 입장권을 터치하자 상세설명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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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에 잠긴 도시>의 입장권
- 중급 던전 심해에 잠긴 도시의 입장권이다. 블루의 부모님이 계신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가 입구라 평범한 사람은 이곳으로 들어갈 수 없는 신비한 도시. 드래곤뿐 아니라 여러 이종족이 사는 곳이다.
- 입장 가능 조건 : 레벨 40 이상. 블루드래곤인 블루와 동행할시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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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권을 바라보는 실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다 한가운데가 입구라니. 생각해 보니 심해라는 건 깊은 바다라는 뜻 아닌가. 바다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심해로 들어가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심해에서 어떻게 숨을 쉬지? 블루가 마법으로 아가미라도 달아주려나?’
살짝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던전에서 숨을 못 쉬어서 죽진 않을 것이다. 안…죽겠지? 꺼림칙한 눈으로 입장권 확인을 마친 실비아는 블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멍한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실비아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옆에 앉은 실비아는 물기 어린 손을 블루의 얼굴에 털며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축축하지!”
『앗, 차거!』
블루의 깜짝 놀라는 반응에 실비아는 즐거워졌다. 물 속성 포켓x 같은 블루라도 차가운 물엔 면역이 없는 모양이었다. 재밌어하며 잠시 키득거린 실비아는 바지에 손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가기로 한 심해도시 말이야. 언제 갈까?”
『네가 시간 될 때면 언제든지.』
“아, 맞다. 나 아마 이번 주까지만 인턴하고 관두게 될 거 같아. 말한다는 게 깜빡했네. 그거 관두고 나면 잠시 시간이 날 거 같아.”
할 얘기가 워낙 많은지라 인턴을 관둔다는 얘기를 빼먹었다. 실비아의 말에 블루가 잠시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두고 나서 가면 되겠네. 근데 이 놀이동산 인턴, 주워듣기로는 한 달 동안 한다는 거 같은데. 왜 벌써 관둔다는 거야?』
블루의 물음에 실비아는 어떻게 된 까닭인지 간단히 설명했다. 이것저것 얘기한 끝에 황궁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자 블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가 황궁으로 가게 되면 난 어디에 있어야 하지…. 둥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네가 있는 이 도시에 있고 싶은데…. 황궁에는 아쿠아리움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함께 못 있겠네.』
“음, 그건 우선 심해도시를 가고 나서 같이 생각해 보자. 당장은 뾰족한 수가 안 떠올라.”
실비아는 어쩐지 가슴이 찡해져 블루의 손을 어루만졌다. 마치 어미 새를 쫓아다니는 아기 새처럼 자신만 따라다니려고 하는 블루의 모습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같이 올라왔다. 둥지에서 계속 혼자 지냈다고 했나? 심해도시에 가서 블루의 부모님을 만나 뵙게 되면 그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이 잡힐지도 몰랐다. 자신을 따라다니겠다니 기쁘긴 한데, 힘센 드래곤이란 것만 빼면 백수가 따로 없었다.
‘가만. 나랑 은근히 닮은 점이 많네.’
실비아는 동질감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지게 된 것과, 백수나 다름없는 삶이 현생의 그녀와 비슷했다. 심지어 백수 짓하다가 프리랜서하고 금방 관둬버리고 또 노는 것까지 비슷…. 물론 블루는 최강의 종족 드래곤이기에 애초부터 치열하게 살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실비아의 동지애가 담뿍 담긴 눈빛에 블루는 영문을 모르고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유유자적 블루와 노가리를 까며 즐겁게 산책하던 실비아는 그래도 아직 일을 관둔 게 아니니 아쿠아리움으로 돌아가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 말라고 몇 번 말리던 직원은 그래도 실비아가 열심히 청소하자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고 그녀는 직원들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블루에게는 어디든 대충 돌아다니라고 언질 줘놓은 터였다.
‘괜히 돌아다니라고 했나? 숨어 있으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수상한 사람으로 잡히면 어떡해. 인간 말도 못 하는 앤데.’
블루가 엘리셔스 월드에서 돌아다니다가 가짜직원인 걸 들켜 잡혀가지 않을까 염려했던 실비아는 구내식당에 도착한 뒤 제 걱정이 괜한 거였단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