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집으로 데려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세비스가 맘에 걸렸다. 딱히 눈치 볼 거 없다고 가슴을 쫙 펴봤지만 어쩐지 다시 쪼그라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리 그래도 세비스가 있는 집에 블루를 데려와서 떡을 치는 건…. 그림이 좀 그렇지?’
그냥 데려다 놓으면 되는 거고, 굳이 떡까지 칠 필욘 없지만, 실비아는 늘 섹스에 진심이었기에 모든 고민이 그걸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데려오기만 하고 떡은 다른 데서 친다는 선택지를 떠올리지 못했다. 또 한 가지 떠오른 문제. 인턴을 한 주 더 일찍 끝마치게 되면 지력을 700까지 올릴 방법이 사라지는데 이건 어떡한담? 블루를 탈출시키는 것과 별개로 지력을 700까지 올려야 공략이 가능했으니 인턴도 당장 그만둘 수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며 실비아가 블루의 개인 우리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엎어져 있던 블루는 힐끗 눈을 돌렸다가 문소리의 주인공이 실비아인 걸 알자마자 신나서 방방 뛰었다.
『실비아!』
실비아에게 가까이 다가온 블루의 몸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였다. 빛 때문에 실비아가 눈을 찡그렸다가 뜨니 블루가 본체로 변신해 그녀를 껴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의 손이 실비아 뒤로 향했다.
딸깍.
‘딸깍?’
문이 잠기는 소리에 실비아가 황급히 뒤돌았다. 블루가 손을 뻗어 바로 문을 잠가 버린 것이다.
“왜? 문은 왜 잠그는 거야.”
『잊었어? 네가 매일 해 주기로 한 거 받으려고.』
블루는 마치 맡겨 놓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블루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고개를 내렸다. 아니, 이렇게 준비운동도 없이 들어온다고? 실비아는 양손에 코트와 책을 쥔 채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아쿠아리움에 오면서 키스를 자주 해 주기로 한 약속을 실비아도 떠올리긴 했는데, 이렇게 오자마자 입술박치기부터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실비아의 등에 차가운 문이 닿았다. 커다란 블루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그늘지게 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블루가 조그만 입술을 조심스럽게 머금었다. 그는 물건을 든 채 방황하고 있는 실비아의 양손 사이를 자연스럽게 헤치고 들어왔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위치를 옮겨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입술 사이로 달콤하고 촉촉한 혀가 파고들어 왔다. 움찔거리던 실비아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손에 든 물건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곧 작은 손이 널따란 등에 안착했다. 실비아의 행동에 블루의 등 근육이 크게 꿈틀댔다.
블루는 목을 울리며 웃은 뒤 그녀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혀를 깊숙이 집어넣었다. 가지런한 이 끝을 훑고 입천장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던 두꺼운 혀는, 곧 입속의 혀를 찾아내 부드럽게 감쌌다.
“음….”
『하.』
조심스럽게 시작된 입맞춤이 점차 격해졌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접합부에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야릇하게 흘러나왔다. 블루는 실비아의 타액을 전부 빨아 먹을 것처럼 혀를 격하게 움직였다. 점점 과격해지는 키스에 실비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블루의 키스는 동정남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능숙했다.
그때 허리를 쓰다듬던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내려오더니 보드라운 엉덩이 곡선을 훑었다. 발작하듯 움찔한 실비아가 손바닥으로 힘껏 단단한 가슴팍을 밀쳤다. 그러나 블루는 요지부동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둔부를 두드리더니 결국 강하게 움켜쥐었다. 심지어 양손을 전부 사용해 엉덩이를 감싸고 있었다.
엉덩이를 움켜쥐는 강한 손아귀 힘에 소스라치듯 놀란 실비아는 발을 들어 블루의 발등을 세게 짓밟았다. 꿈쩍도 안 하는 블루를 떼어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이 변태보다 더 변태 같은 놈! 여기선 더 안 된다고! 실비아의 눈에 불이 번쩍했다.
『악! 실비아, 아, 윽! 잘못했어. 그만 때려.』
블루가 악 소릴 내며 몸을 물렸지만, 실비아는 분이 여전히 안 풀렸다. 연타로 인디언 밥을 하듯이 블루의 등을 마구 두드리며 화를 표출했다.
“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하진! 않겠지?! 엉덩이는 왜 만져! 그것도 그렇게 세게!“
『아, 그만. 윽. 그냥 손을 내리다 보니 거기에 잡기 좋은 게 있길래….』
블루가 실비아를 피해 멀찍이 떨어지며 변명했다. 그는 일부러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보기 좋게 그을린 갈색 피부가 새빨개져 있었다.
『이것 봐. 빨개졌잖아. 호 해 줘, 실비아.』
“저번에 드래곤이라서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안 해 줄 거야!”
『아냐. 다치지 않는단 거지. 아픈 건 아파. 빨리 호 해 줘. 흑흑.』
일부러 울음소리까지 내가며 훌쩍이는 블루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실비아는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블루를 소파로 데려가 팔뚝을 살폈다. 블루는 계속 울먹였다.
일부러 나오지도 않는 눈물까지 짜내자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단단한 팔뚝을 문질렀다. 웬만한 보디빌더 뺨따귀 후릴 정도로 근육이 꽉 들어차 있는 팔뚝은, 쇳덩이처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았다. 이렇게 튼튼해 보이는데 살짝 좀 때렸다고 아프다니. 엄살인 거 아는데도 계속 훌쩍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게, 누가…. 흠, 엉덩이를 그렇게 하래?”
『그냥 나도 모르게 그런 걸 어떡해.』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한다니. 웃기는 소리였지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실비아가 호-하고 팔뚝을 불어 주었다. 그 짓거릴 한참 하자 블루의 훌쩍임이 줄어들더니 곧 입꼬리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괜찮아졌어!』
“그래. 내 정신 좀 봐. 들고 온 걸 다 떨어트렸네.”
실비아는 바닥에 떨어진 코트와 책을 주워 와 블루의 곁에 다시 앉았다. 블루는 실비아가 가져온 물건에 호기심을 보였다.
『이것들은 뭐야? 책이랑 옷이네?』
“응. 널 탈출시켜 줄 물건들이야.”
실비아는 우선 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어쩌구를 블루에게 내밀었다. 블루가 책을 받아들고 뒤적거리자 실비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메시지야, 떠라! 그러나 블루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을 돌려줄 때까지도 어떤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뭐야? 난 못 읽겠어. 이렇게 복잡한 글자는 해석하기 힘들어.』
“…어?”
실비아는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책을 받아들었다. 실비아의 눈이 천천히 책을 훑었다. 책을 얻은 후로 처음 펼쳐 보는 거였다. 드래곤을 가르치는 어쩌구는 인간의 언어, 그것도 복잡한 설명이 빽빽하게 적혀 있어서 드래곤인 블루가 제대로 해석하기 어려울 법도 했다.
‘이 책을 블루에게 주면 되는 거 아니었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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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방법>을 읽고 나서 블루를 가르쳐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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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뭐가 이상하다 했더니 내가 읽고 가르쳐 주는 거구나.’
다시 책 제목을 보니 ‘가르치는’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책을 블루한테 주는 게 아니라 늘 하던 것처럼 자신이 읽고 마스터해야 하는 거였다.
‘또 팔자에 없는 공부구나. 죽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할 줄 알았으면 현생 살 때 공시 준비라도 해 볼 걸 그랬어.’
동태눈깔이 된 실비아는 책을 덮었다. 이건 근무 시간에 짬짬이 읽고 집에서도 열심히 읽어야 할 듯했다. 책을 제 옆으로 치워 버린 실비아는 코트를 펼쳤다.
“등에 적혀 있는 꼬부랑글씨 보이지? 드래곤 마법진을 파훼하는 수식 해석이야. 주말에 황궁 개방 축제에 갔었거든. 거기서 만난 제1마법사단장님이 수식 해석을 코트에…. 적어 주시더라고. 알아보겠어?”
실비아는 말하다 말고 순식간에 등에 사인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울컥했다. 다시 입을 열어 알아보겠냐고 묻자 블루가 코트를 눈앞에 펼쳐 수식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동공이 한순간 가로로 가늘어지더니 페어링 완료된 블루투스 기계처럼 번쩍거렸다.
『이건 읽을 수 있어. 해석 다 했어.』
“다행이다! 이거 혹시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서 수식을 써넣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냐. 아쿠아리움은 진의 영향 안에 있으니까, 여기서 파훼 마법진을 그리면 될 것 같아.』
블루는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뒤 바닥에 복잡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피가 멎을 때마다 블루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깨물어가며 정성스럽게 진을 그렸다.
표정 변화가 없는 블루와 달리 실비아의 얼굴은 점점 찌푸려졌다. 너무 아파 보였다. 세계관 최강의 생물일 드래곤이 아쿠아리움 한번 탈출해 보겠다고 제 손가락을 깨물어 가며 마법진을 그리다니.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블루가 한숨을 내쉰 뒤 그녀를 불렀다. 진이 완성된 것이다.
『후우…. 실비아! 드디어 다 그렸어.』
“어. 이제 끝난 건가?”
그게 끝이 아닌지 블루는 진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나온 강렬한 푸른 빛이 천장을 뚫을 듯이 위로 솟았다. 마치 폭포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태연한 블루랑 달리 쭈그려 앉아 진을 바라보던 실비아는 엄청난 양의 빛이 갑자기 위로 솟구쳐 오르자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다행히 블루가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받쳐 주었다.
“악!”
『실비아, 괜찮아?』
“괜찮….”
띠링, 하고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으나 실비아는 확인하지 못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블루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다리 사이에 가두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눈을 내리깐 블루는 실비아의 고개를 돌리게 한 뒤 입술을 겹쳤다. 그는 한번 키스에 맛을 들이더니 호시탐탐 입 맞출 기회만 노렸다. 커다란 손이 조그만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갈색 머리를 정신없이 헤집던 기다란 손가락이 동그란 뒤통수를 아기 돌보듯 쓰다듬더니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달릴 때는 호흡 한번 안 흐트러지던 블루는 키스가 길어지자 점차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