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휴…. 채찍질이 훌륭했다니, 말뿐이라도 고맙네. 실비아 양.”
단장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했다. 실비아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단장이 자신을 좀 많이 예뻐한 건 단원들의 미움을 살 만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럼 자신에게만 해코지하면 되는 거지,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단장에게 배탈 나는 가루를 먹이다니. 그들은 선을 많이 넘었고, 결국 멍청한 탓에 정의의 심판을 받았다.
‘멍청한 애들이라서 다행이야. 증거를 칠칠치 못하게 흘리고 다니다니. 나 잡아줍쇼도 아니고 말이지.’
나라면 좀 더 완벽범죄를…. 실비아가 사악한 잡생각을 하는 사이에 나머지 단원들이 단장을 둘러싸고 위로했다. 그래도 인복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채찍질 맛이 좀 좋긴 했던 걸까.
침울한 분위기도 잠시 단원들과 으쌰으쌰한 덕에 단장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실비아는 나머지 단원들과 함께 무대를 청소했다. 소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세비스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실비아 님!”
“어어. 세비스.”
세비스의 등장에 서커스단장이 실비아가 들고 있던 소품 상자를 가져갔다. 실비아가 어리둥절해하자 서커스단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실비아 양. 수고했어. 친구도 왔으니 이만 돌아가 봐.”
“아녀요. 뒷정리 다 돕고….”
“아닙니다. 실비아 양은 단장님의 부탁을 받고 오신 거 아닙니까. 뒷정리는 저희가 할 테니 얼른 가보세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뒤에 서 있던 고참 단원이 실비아의 말을 끊더니 가 보라고 재촉했다. 실비아는 머뭇거리다 꾸벅 인사했다. 불쟁이 같은 도라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상식적인 단원이 서커스단에 있었다니, 주요 단원이 사라진 빈자리는 조만간 메꿔질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 고마워 실비아 양. 아 참, 저번에 받은 내 전서구 둥지 주소 잊지 말고! 곧 인턴을 관두고 황궁으로 들어가게 될 텐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나 연락하게나. 내가 은근히 발이 넓어.”
서커스단장이 한쪽 눈을 깜빡이며 실비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실비아가 곁으로 오자 세비스가 단원들에게 인사한 뒤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밤하늘엔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가는구나. 오늘은 정말 스펙타클했다. 실비아가 잠시 멍한 눈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세비스가 그녀를 불렀다.
“실비아 님, 황궁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 그건….”
실비아가 공연 중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얘기해 주자 세비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바닷가마을에 사는 저한테 황실 요리사를 제안할 때도 좀 파격적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황실은 열린 채용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되면 조만간 실비아 님과 같은 일터에서 일하게 되겠네요! …좋다.”
세비스의 귀가 쫑긋거렸다. 즐거움의 표시인 것 같은데, 인간형일 때 꼬리도 있었다면 세차게 살랑였겠지? 꼬리를 흔드는 걸 못 보는 게 아쉬웠다. 실비아는 잠시 흐뭇하게 그의 귀를 바라보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냈다.
“아! 감시소는? 감시소에 간 건 어떻게 됐어? 가니까 림보가 있었어? 역시 없었지?”
답할 틈도 없이 마구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세비스가 실비아를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대답할 테니까 진정하세요. 우선, 놀라지 마세요. 제가 감시소에 갔더니….”
세비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그의 예상대로 공연장에 경비가 집중된 터라 감시소의 경비는 허술했다고 한다. 들개 같아 보이는 늑대로 변신한 그는 입구를 지나가는 정공법 대신에 개구멍을 찾아내는 데 성공. 안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다행히 술을 거나하게 마신 멍청한 간수 한 명만 있었기에,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몰래 뒤따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있는 방들을 지나 동물 소리가 들리는 감시소 깊은 곳까지 간수를 따라간 그는 놀라운 걸 발견했다. 그곳에는 정말로,
“…림보가 있었어요.”
“정말? 으, 말도 안 돼. 아, 부처님….”
실비아는 무교지만 절망감에 휩싸여 부처님을 부르며 주저앉았다. 세비스가 그런 실비아를 부축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울먹거리는 실비아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은 세비스가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근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림보한테 입마개를 씌워 놔서 대화를 전혀 할 수 없었어요. 저는 늑대화 하면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다른 동물의 말을 가끔 알아들을 수가 있거든요.”
“뭐? 그런 거였어?”
몰랐던 사실에 실비아가 경악했다. 어쩐지 처음엔 견원지간처럼 싸우던 림보와 세비스가 어느 샌가부터 형제애 비슷한 걸 나누는 사이가 됐더라니. 말이 통해서였다. 세비스는 손사래를 치며 얘기를 계속했다.
“완전히 통하는 건 아니에요. 가끔 교감이 되는 거 같을 때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뿐. 하여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림보가 저를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못 하니까 답답한지 바닥을 막 긁더라고요.”
“어쩜 좋아. 널 만났는데 말을 못 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어.”
실비아가 발을 동동 구르자 세비스가 한숨 지었다.
“하아, 림보가 뭐 때문에 갇힌 건지도 모르니 무작정 빼냈다간 탈옥을 하는 거라, 그 상황에서 빼 올 방법이 없더라고요. 결국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하, 큰일이구나. 대체 그 착한 아이가 왜 감시소에 있는 걸까?”
“그러게요. 림보가 식탐은 많아도 못된 애는 아닌데…. 얘가 뭘 모르고 높은 사람에게 난동을 부린 건지 걱정이에요. 황궁의 사용인들에게 감시소에 대해 아는지 물어봐야겠어요. 감시소 소식을 그들이 다 알진 못할 테니 큰 기대는 할 수 없지만요.”
실비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림보를 함부로 빼 올 수가 없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데 자칫하다간 다 같이 도망자 신세가 될 터였다. 어떻게 림보를 만날 방법이 없을까? 실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현실 세계에서 구치소든 감옥이든 인연이 없었던 그녀로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지? 순간 그녀의 뇌리에 번뜩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왜, 주인공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 똘마니들이 찾아오는 영화들 있지 않나.
“면회, 면회는 못 가? 림보랑 우리는 같이 살았던 사이잖아. 잠시 함께 살았었다고 하면서 얼굴을 볼 수 있냐고 요청할 순 없을까?”
“아! 음…. 그런 게 가능할까요? 황궁에 있는 감시소인데?”
그건 그렇다. 영화는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거고. 여기는 누군가가 만든 게임 세계. 현실처럼 면회가 가능할지 확신할 순 없었다. 그래도 한번 물어는 봐야지.
“혹시 그런 게 가능한지 한번 물어봐 줘. 이 정도 정보는 사용인들 대부분 쉽게 가르쳐 줄 것 같은데?”
“알겠어요. 면회란 게 가능하면 좋을 텐데요.”
둘은 한숨을 내쉬며 황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실비아의 눈이 인적이 드문 어두운 황궁을 두리번거렸다. 공연이 다 끝나서 감시를 안 하는 걸까. 그렇다면 혹시 모를 림보 탈옥시키기를 대비해 황궁의 지리를 익혀 둘 필요가 있었다. 그때 세비스가 그녀의 턱을 잡아 앞으로 고정하며 속삭였다.
“실비아 님. 암살자가 근처에 있어요. 입구만 보고 걸으세요.”
“그, 그래.”
모골이 송연한 말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운 실비아는 양옆에서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둘은 각 잡힌 군인처럼 빠르게 경보하며 황궁을 빠져나왔다. 주위를 맴돌던 살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세비스의 속삭임에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후우. 뭔가 일이 많은 하루였어.”
“실비아 님은 공연까지 하셨으니 엄청 피곤하시겠어요. 집에 가면 다른 짓 말고 바로 주무세요.”
실비아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두드렸다.
“하, 내일은 또 던전을 가야 하잖아. 영영 못 쉬는구나. 잠은 죽어서 자면 되니 실컷 일하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네? 죽어서?”
“아냐. 그냥 너무 힘들어서 헛소리한 거야. 빨리 집에 가자.”
마차를 잡아 빠르게 집으로 돌아온 둘은 씻고 잠들 준비를 했다. 그때 포르르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참둘기가 실비아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노란 편지지를 보니 노엘이 오랜만에 보낸 편지였다. 실비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새 발에 묶인 편지를 풀어 읽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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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변두리에서의 던전 공략이 바빠 예상보다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네요. 그래도 얼추 급한 일은 다 해결돼서 다음 주에는 수도에 귀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실비아 님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자매님이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돼 밤에 잠을 잘 이루질 못 하고 있거든요. 실비아 님도 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좋을 텐데요.
혹시 큰일이 생겼을 때는 만능 레이저 반지의 비상 연락망을 잊지 마세요. 부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려갈 테니까요. 그럼 곧 볼 때까지 잘 지내시길!
- 자매님을 늘 생각하는 노엘 -
추신 : 잠을 못 자고 있다고 했는데 수도에 가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자매님도 그날은 잠들지 못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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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몰라 몰라! 잠들지 못한다니. 아유!”
편지를 읽은 실비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가 시트를 팡팡 치면서 기쁨을 표출했다. 베란다에 새 발을 얹은 참둘기가 그런 그녀를 떨떠름하게 지켜봤다. 고까운 시선을 눈치챈 실비아는 참둘기를 들어 새 둥지에 집어넣고 이불을 덮었다.
“얼른 자렴.”
침대에 누운 그녀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서서히 잠이 들었다. 노엘이 나오는 꿈을 꾸길 바라며.
* * *
“어휴.”
실비아가 퀭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베개 밑에 넣은 <전교 1등의 속옷>을 잠시 잊고 있었다. 바라던 노엘은 나오지 않고 학주가 나와 그녀를 밤새 괴롭혔고, 확률 아이템인지라 지력은 상승하지 않았다. 이런 뭣 같은 경우가….
중얼중얼 욕을 내뱉은 실비아는 얼른 오늘 할 일을 끝내고 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외출 준비를 빠르게 한 뒤 세비스를 따라 굴다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