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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15화 (215/372)

215화

“흠, 처음에 봤을 땐 건강해 보였는데 갑자기 탈이 났었나 보지? 다름이 아니라, 저 단원의 재주가 너무 훌륭해서 감탄했네. 그래서 서커스단에게 큰 포상을 내리려고 자넬 부른 거였네만. 저런 멋진 단원은 대체 어디서 영입한 건가?”

황제의 물음에 단장이 얼른 실비아를 가까이 불렀다. 그녀가 곁에 서자 단장이 초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실비아 양은 저희 단원이 아닙니다. 엘리셔스 월드 동물원 부서의 인턴이죠. 면접 때 본 재주가 워낙 출중했기에 어렵사리 공연에 참여해 달라 부탁한 겁니다.”

“호오. 정식 서커스단원이 아닌 데도 그렇게 재주를 잘 부린다고? 실비아 양. 그대는 어떻게 그런 재주를 익혔지?”

실비아는 가슴에 손을 모으곤 공손히 대답했다.

“황제 폐하, 외람되오나 어떻게 익혔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던전 공략을 하다 보니 어느 날 얻게 된 잔재주일 뿐입니다.”

“던전 공략을 했다니! 인턴을 할 게 아니라 당장 실전에 참여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속도면 몬스터도 금방 해치웠겠어. 안 그래도 요즘 수도 외곽에 생긴 던전 때문에 제국의 인재들이 많이 고생해 주고 있어. 그대 같은 준비된 재원이 제국을 위해 일해 준다면 짐이 아주 기쁠 거 같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폐하. 저는 아직 배움이 부족합니다.”

제국을 위해 일해 달라니. 뭔지 몰라도 곧 비단길이 그녀의 앞에 펼쳐질 것 같았다. 실비아는 속으로 잔뜩 신이 났지만, 티 내지 않으며 진중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겸손한 그녀의 발언에 황제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보게, 디에고 후작. 이번 엘리셔스 월드의 인턴 기간이 얼마나 남았지?”

“다음 주면 이주가 남게 됩니다.”

“흠, 너무 많이 남았는데. 실비아 양. 난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해. 황궁에 그대가 원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겠네. 서커스를 하고 싶으면 하고, 그게 아니라도 원하는 자리가 있다면 사양 말고 말해 보도록.”

실비아가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망설이자 황제가 말을 이어 갔다.

“많이 놀랐나 보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엘리셔스 월드는 정재계로 진출하기 위한 등용문으로 이름났단 걸 이미 알고 있겠지. 그 정도 능력이면 경력을 쌓을 필요도 없을 것 같으니 인턴은 중도 하차하고, 황궁으로 바로 오는 건 어떤가?”

황제의 파격적인 제안에 공연장이 술렁였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단원들도 경악한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물론 실비아의 재주가 어디서 본 적 없이 출중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턴을 중도 하차하고 황궁으로 바로 오라니? 하지만 여기는 엘리셔스 제국. 황제의 말이면 사자도 하루 만에 곰이 되는 나라였다. 황제가 인턴을 중도 하차하라고 한 순간 실비아는 엘리셔스 월드를 바로 떠나도 아무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보통은 10년 동안 엘리셔스 월드에서 굴러도 황실 문턱 한번 못 밟는 이가 부지기순데. 실비아를 보는 모두의 눈에 부러움이 담겼다. 얼굴을 제대로 외워 뒀다가 친분을 쌓아야겠다고 마음먹는 이도 몇몇 있었다.

실비아는 차분히 생각한 뒤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너무 과분한 제안을 주신지라 어떻게 대답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황궁을 가는 건 제 인생 목표이기도 했습니다만, 어떤 자리로 가고 싶은지 당장 결정할 수가 없어서요.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그래. 짐이 오래간만에 탐나는 인재를 봐서 맘이 급했네. 선뜻 대답할 일은 아니지. 그럼 어떤 자리를 원하는지 천천히 생각해 봐. 딱 1주일 줄 테니 그 안에 답을 줬으면 해.”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황제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객석에 앉았다. 이제 배탈이 한결 나아진 단장이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실비아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불쟁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방해하려고 힘썼더니 애송이의 묘기를 더 돋보이게 하는 꼴이 돼버렸다. 거기다가 아직 피날레 공연이 남았는데 이미 공연이 끝난 분위기라니. 마지막은 불쟁이의 불 쇼였다. 다행히 소란스러웠던 객석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다음 공연이 남았다는 피에로의 말과 함께 공연이 재개됐다.

불쟁이가 제 몸에 그슬음을 남겨가며 불 쇼를 했다. 평소보다 실수가 잦았다. 아무래도 한창 짜증 난 상태였기에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였다. 관객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불쟁이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결국 시원찮은 피날레가 끝나고 단장과 단원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하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환호성 사이엔 오늘 최고의 공연을 보여 줬던 실비아에 대한 칭찬이 가장 많았다.

단원들의 인사가 끝나고 황제 내외가 뿌듯한 표정으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황태자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뒤따라 나갔다. 실비아를 힐끗 본 우라엘 황태자는 눈이 마주치자 헉, 하고 놀라는 소리를 내더니 재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저 어린놈의 자식이 충격을 좀 받았나 보네. 어때, 내 현란한 재주가? 사람 아니다 싶지? 아휴…. 제발 남주만 아니어라. 아니지, 남주여라. 아니, 남주 아니어라!’

실비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었다. 쟤가 남주가 아니면 여차하면 엘리셔스 제국을 벗어나 워홀러가 되는 처지가 될 수 있었고, 쟤가 남주면 망쳐 버린 첫인상을 복구하느라 골치 아플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속에 품은 채 실비아의 눈이 황태자의 등을 씁쓸히 노려봤다.

황족들이 공연장을 나가자 관객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빠져나갔다. 그들 중 몇몇은 나가면서 실비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황제 폐하가 침 발라둔 인재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 눈인사에 실비아가 방긋 웃으며 화답했다.

“모두 안녕히 가세요. 다음 해에는 더 즐거운 공연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단장이 나가는 이들에게 한 번 더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불쟁이를 비롯한 몇몇 단원의 썩은 얼굴과 나머지 단원들의 뿌듯한 미소와 함께, 공연은 별 탈 없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무대 뒤로 들어온 단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일렬로 서 있는 보안요원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보안요원들이 불쟁이를 에워쌌다. 그들은 불쟁이의 팔을 꺾고 바닥에 눕혀 제압했다. 영문을 몰라 불안에 떠는 단원들을 향해 보안대장이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이분이 불법마도구를 사용해 다른 단원의 공연을 방해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불법마도구를 사용한 죄에 더해 다른 단원의 공연을 방해한 죄로 현장에서 바로 연행하겠습니다.”

“아악! 전 억울해요!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바닥에 엎어진 불쟁이가 악을 질렀다. 그러자 보안요원 중 한 명이 말없이 붉게 번쩍이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보자마자 단장과 몇몇 단원이 크게 놀랐다. 불쟁이를 제압한 다른 보안요원이 모두가 듣도록 큰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마나 감지기가 작동했어요. 공연 중에 마나를 쓰는 건 불법이죠. 거기다가 이거, 당신이 아까 버린 마도구 아닙니까? 이걸 이용해서 저 단원이 공연할 때 소품에 불을 붙였지 않습니까. 거짓말하셨으니 위증죄까지 추가됩니다.”

보안요원이 실비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불쟁이가 던져 버렸던 마도구를 들고 있었다. 실비아는 그제야 공연 중간에 소품에 불이 붙은 이유를 알았다. 어쩐지 좀 수상하더라니. 역시나 자신을 고깝게 보고 있던 불쟁이 짓이었다. 그는 연행되어 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변명했다.

“마도구 사용이 불법인 줄 몰랐어요! 불을 붙이면 공연이 더 색다를 거 같아서! 어이, 거기. 말 좀 해 봐!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잖아. 내 덕에 더 화려하게 성공했으니 더 잘된 거 아냐? 아악!”

그가 몸부림치자 보안요원이 팔을 더 격하게 꺾더니 그를 마구잡이로 끌고 나갔다. 불쟁이답게 화끈한 퇴장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실비아는 아까 주워놨던 종이컵이 생각났다. 무슨 가루를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수상했던 종이컵! 그녀는 얼른 단장 곁에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단장님, 이걸 좀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건 곰 탈이 나한테 준 차잖아. …어?”

종이컵 밑바닥을 본 단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봐도 수상한 가루를 발견한 그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던 단장은 결국 남아있던 보안요원에게 다가갔다. 종이컵을 건네는 그의 얼굴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단장의 말을 들은 보안요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국 곰 탈과 동조자였던 피에로까지 함께 연행했다. 그들은 이미 불쟁이가 잡혀간 모습을 본 터라 군말 없이 보안요원의 손에 끌려 나갔다.

주요 단원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나머지 단원들의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단장은 씁쓸한 표정을 애써 감춘 채 그들 앞에 섰다.

“믿고 있던 단원들이 뒤통수를 때릴 줄이야. 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이지. 채찍질이 부족했거나 말일세. 미안하게 됐네. 그리고 보안요원 자네들. 공연이 끝나길 기다려 줘서 고맙네. 덕분에 관객들이 웃으면서 돌아갔어.”

단장의 말에 남은 보안요원들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실비아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단장을 위로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단장님. 몇 번 단장님의 채찍질을 봤는데, 훌륭했어요…. 제가 맞고 싶을 만큼요. 저 사람들은 그냥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공든 탑을 무너트려 버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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