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스킬을 쓰면 가능하다. 손가락들이 제각기 놀면서 마치 손 두 개를 쓰는 것처럼 공이 공중에서 현란하게 돌았다. 그녀의 미친 묘기에 객석이 크게 술렁였다. 그녀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 덕에 묘기를 하면서도 관람석을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아까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황태자도 팔짱을 낀 채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아까와 달리 반짝거리는 게, 그도 이런 현란한 묘기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다음은 훌라후프!’
잠깐, 서커스단장이 직접 훌라후프를 씌워 줬던 저번 면접 때와 달리 이번에는 실비아가 스스로 해야 했다. 소품을 든 채 훌라후프를 먼저 돌렸어야 하는 걸까? 천만의 말씀. 실비아는 이미 범인의 경지를 한참 벗어난 괴수. 양손이 자유롭지 않은 건 그녀에게 어떤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실비아는 훌라후프를 발로 끌어온 뒤에 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발로 한번 훌라후프를 위로 차올리고는 그대로 허리를 빠르게 돌렸다!
“와!”
“말도 안 돼. 미쳤어!”
실비아의 탈인간급 묘기에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접시를 손가락으로 돌리고 공들을 나머지 한 손으로 저글링 하기. 실비아는 묘기를 부리는 중에도 관객들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스킬 덕에 몸이 바쁜 와중에도 침대에 누워 ASMR을 듣는 양 차분하게 대화를 경청할 수 있었다. 저거 혹시 마법 아니냐고 외치는 관객에게 옆에 있던 마법사로 보이는 로브를 입은 관객이 마법으로도 저런 건 못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근데 훌라후프가 좀 축축하네. …어?’
재주를 부리느라 신경을 못 썼는데 이제 와 보니 기름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그 순간 공과 훌라후프에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소품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한 실비아가 주위를 훑어보자 저 멀리 무대 구석에서 사악하게 웃고 있는 불쟁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놈이 소품에 불을 붙인 거구나.
“어머, 저게 뭐야?”
“소품에 불이 붙었어! 저 아가씨 괜찮은가? 불 꺼야지! 소방 요원 없어? 소방 요원!”
불붙은 소품 때문에 객석에도 소란이 일었다. 이대로 공연이 중단되는 걸까?
당황하기도 잠시 실비아는 속도를 더 빨리해 미친 듯이 소품들을 돌렸다. 원래 인외 존재로 보일까 싶어 몇백 회 정도로 자제하며 돌리던 걸 관두고, 몇천 회씩 그냥 마구마구 돌려 버렸다. 이 정도로 돌리자 관절이 각각 자아를 가진 것처럼 따로 놀았다.
불이 붙기 위해서는 기본 전제가 있어야 한다. 불길에 몸에 닿아 옮겨 갈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러나 실비아가 미친 듯이 모든 소품을 빠르게 돌리자 불은 실비아의 몸에 해코지하지 못했다. 1초 이상 닿아야 불이 붙을 텐데 0.0001초, 아니 그것보다 더 찰나에 몸을 스칠 뿐이니 불이 붙을 턱이 없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불쟁이는 예상한 것과 달리, 불붙은 소품을 현란하게 돌리는 실비아에게 기겁했다.
소란스럽던 객석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더니 곧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졌다.
“맙소사! 저건 어디서 본적 없는 불 쇼야!”
“불이 붙은 훌라후프를 저렇게 돌린다니. 너무 빨라서 불이 붙은 건지 원래 빨간 훌라후프인지 헷갈릴 지경이네. 저 사람 인간 맞아?”
VIP석에서 여유롭게 관람하던 황제도 깜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난간을 잡고 선 채 흥분한 목소리로 보좌관을 불렀다.
“보좌관! 건국 이래로 이런 놀라운 공연은 처음이군! 저 사람은 아까 입구에서 봤던 단원이야. 저 대단한 자의 이름이 뭔지 알아 와.”
“예. 알겠습니다.”
실비아는 열심히 묘기를 하면서 객석을 훑었다. 관람객들 중 몇몇이 흥분을 못 견디고 일어나 있었다. 앞서 했던 어떤 서커스 공연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VIP석을 주시했다. 황태자가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넋을 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다니, 본 적 없는 대단한 묘기를 보고 반한 걸까? …절대 아니지. 얼빠 기질에 도끼병도 살짝 가지고 있는 실비아지만, 저 표정은 도무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성에게 반한 게 아니라 외계생물을 본 거 같은 경악한 표정이었다. 실비아는 망신스러운 나머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실비아는 현란한 묘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잡생각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저런…. 완전히 망했네. 황태자가 남주면 안 되는데.’
이래서 적당히 하려던 건데. 몸에 불이 붙는 걸 방지하기 위해 평소의 10배 넘게 빠르게 돌려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가 남주일 확률이 너무 높은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습을 처음 만나자마자 보여 주다니. 소개팅으로 치면 완전 실패였다. 자신이 남주라도 이런 무서운 여자는 상대하지 않고 도망가겠지. 제발 우라엘 황태자가 남주가 아니길 바라며, 실비아는 다시 묘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거 뭐야?!’
무대 구석에 선 불쟁이는 지금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이런 건 계산에 전혀 없었다. 얼떨떨하게 실비아의 묘기를 훔쳐보던 불쟁이는 한 번 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구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손에 든 건 간이마법도구로, 마법사가 아닌 이라도 물건에 간단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마도구였다.
일부러 낡은 소품에 기름칠을 해 놓고 마도구를 이용해 불을 붙여서 실비아를 곤혹에 빠트리려 했던 것이다. 불이 붙어 당황한 그녀가 공연을 망쳐 버리면 그때 불 쇼를 하는 자신이 무대에 들어가 수습하는 척 주목을 받으려 했건만. 그의 예상과 달리 실비아는 한낱 애송이가 아니었다.
‘저 여자, 완전 괴물이잖아? 단장이 어떻게든 공연에 참여하게 하려는 이유가 있었네. 아우,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물러날 순 없지.’
실비아의 탈인간급 묘기를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린 흑막단원 불쟁이. 그는 간이마법도구를 다시 한번 작동시켰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실비아가 돌리고 있던 접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야 했다.
‘어? 왜 계속 돌리고 있지? 저거 분명히 산산조각 났을 텐데.’
불쟁이가 마도구를 몇 번 더 작동해 봤지만, 실비아는 여전히 접시를 잘만 돌리고 있었다.
사실 마도구가 고장 난 게 아니었다. 몸에 불이 붙는 걸 막기 위해 실비아는 여느 때보다 손가락을 미친 듯이 빠르게 돌렸고, 궁극적으로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이 생성되어, 산산조각이 난 접시 조각들은 마치 토네이도에 들어간 물건들처럼 검지 위를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관객들은 이제 두려움을 느끼며 실비아를 숨죽여 바라봤다. 권력이면 권력, 부면 부. 아쉬울 게 없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였기에 웬만한 별천지는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신들의 인생은 이 묘기를 보기 전과 후로 나뉘리라.
“세상에, 불 훌라후프 묘기라니. 듣도 보도 못했어. 거기다가 저 정도로 빠르게 훌라후프를 돌리다니. 저 아가씨 허리 속 장기들은 무사한가?”
“이미 다 분해된 거 아냐?”
“쉿….”
불쟁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분명히 마도구는 작동했는데, 뭐냐고! 평범한 사람1인 불쟁이가 실비아의 손가락 위에 토네이도가 생성된 걸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마도구를 딸깍거리다가 성질내며 집어던졌고, 순간 무대를 지켜보던 안전요원의 날카로운 눈에 걸려들었다.
공연에 난입하는 미치광이들을 막기 위해 공연장엔 안전요원이 항시 배치돼 있었는데, 마도구에서 흐르는 미약한 마나의 흐름을 요원이 감지해낸 것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불쟁이를 보더니 옆에 선 다른 요원에게 귓속말했다.
다시 무대로 가서, 실비아는 결국 불쟁이의 숱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훌륭한 묘기를 해내고야 말았다. 무아지경으로 묘기에 열중하던 그녀는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 모습은 마치 피날레를 장식하는 피겨 선수의 화려한 스핀과도 같았다. 그 정도로 우아하면서 경이로웠다. 손가락에 생성된 토네이도가 사그라지자, 그제야 접시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무 빨리 돌리는 바람에 마치 미친 듯이 발을 굴러 불을 끄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났다. 공과 훌라후프도 저절로 불이 꺼지며 시커먼 숯덩이가 된 채 바닥에 떨어졌다.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눈을 감고 공기의 흐름을 마저 느낀 실비아가 허리를 숙였다. 묘기의 끝을 알리는 인사에 객석은 잠시 고요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엄청난 함성이 공연장을 흔들었다. 귀부인들이 부채를 흔들고 신사들이 재킷을 집어 던지며 환호했다. 본 적 없는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에 실비아를 포함한 모든 단원이 깜짝 놀랐다.
“우와아!”
“와! 정말 엄청난 묘기였어요!”
“엘리셔스 월드 서커스단 최고! 살면서 본 공연 중에 방금의 공연이 제일 감명 깊었어요.”
찬사가 한참을 이어지고 객석의 흥분이 진정되고 나자 VIP석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흡족하게 봤네. 이런 출중한 인재가 서커스단에 있을 줄은 몰랐군. 우리 제국의 미래가 밝아.”
실비아가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디에고 단장은 어디 갔지?”
드디어 서커스단장의 이름을 알았다. 황제 폐하가 서커스단장을 찾자 비상이 걸렸다. 단원 한 명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사 부탁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가 사색이 된 서커스단장을 부축해 데리고 왔다. 배탈이 제대로 난 건지 단시간에 늙어 버린 모습이었다.
“오, 디에고 후작. 칭찬을 하려고 불렀네. 근데 그대 안색이 어쩐지 안 좋아 보이네만?”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갑자기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사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서커스단장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부축하고 있던 단원이 걱정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그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