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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13화 (213/372)

213화

“안녕하세요. 엘리셔스 월드의 서커스단장입니다. 이번 년에도 황실 개방 축제 공연을 맡게 돼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작년에 보던 분들이 이번에도 다 계시군요. 어디…. 새로운 얼굴도 몇 분 계시는 것 같고….”

단장은 넉살 좋은 멘트로 분위기를 훈훈하게 달궜다. 공연장에는 현생의 시시티브이 같은 수정구가 있어, 무대 위의 상황과 객석의 상황을 대기실의 수정구로 지켜볼 수 있었다.

‘내 차례는 끝에서 두 번째던가? 실수 없이 잘해야지.’

그때, 수정구 속 단장의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왜 저러지? 실비아가 의아한 눈으로 수정구를 보고 있으니 단장이 마이크를 들고 마무리 멘트를 치며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곧 커튼이 내려가고 대기 음악과 함께 무대가 어두워졌다. 무대 뒤로 온 단장은 사색이 돼서 사회 대체자를 찾았고, 불쟁이가 옆에 선 피에로 단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피에로는 곧 마이크를 넘겨받아 밖으로 나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단장님이 속이 안 좋으시단다. 사회자는 피에로가 하게 됐어. 다들 그런 줄 알도록.”

불쟁이가 단원들에게 긴급공지를 했다. 몇몇 단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웅성거렸다. 갑자기 사회자가 바뀌니 불안한 듯했다.

실비아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불쟁이네가 무슨 안 좋은 수를 쓴 거 같은 촉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당장 뭐를 할 수 있으랴. 커튼은 다시 올라갔고, 첫 번째 공연이 시작됐다.

걱정과 달리 공연은 순탄하게 돌아갔다. 곰 탈이 곰인 척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커다란 공 위에서 발을 재주 좋게 놀렸다. 그는 포상으로 토막 난 생연어를 받아먹으며 울음소리를 냈다. 생연어…. 간장에 찍어 먹으면 맛있긴 하지만 껍질까지 한 번에 먹어 치우다니. 그것도 아무 양념도 없이 같이 딸려 온 꼬리까지 진짜 곰처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연어를 다 먹어 치운 그는 잠시 토하는 제스처를 취하려다 멈칫하고, 다시 팔을 흔들며 덤블링을 하는 재주를 부렸다. 참 먹고 살기 힘들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곰 탈의 처절한 묘기가 끝나고 다음은 마술쇼 차례였다.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면서 마술쇼가 있다니. 웃기다고 생각한 실비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바라봤다. 상자에 단원이 한 명 들어가는 걸 보니 절단 마술, 뭐 이런 건가 보군. 식상하다고 생각하며 수정구를 보던 실비아의 눈은 곧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상자에 칼이 꽂히자마자 단원의 입에서 피가 철철 새어 나온 것이다.

‘어머, 시발? 저게 뭐야. 마술쇼가 아니라 리얼 인간 해체쇼 뭐 이런 건가?’

“꺄악!”

“세상에나!”

관람객들도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곧 칼을 꽂던 마술사가 손을 휘젓고 삼등분된 상자를 백팔십도 돌려 버렸다. 상자 안의 단원은 이제 다 죽어 가는 얼굴이었다. 시체처럼 늘어진 단원에게 마술사가 정체 모를 가루를 먹였다. 마술사가 가루를 입속에 욱여넣고 목을 쓸어내리자, 상자 속 단원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마술사가 상자 위에 천을 덮었다가 다시 걷어내자, 상자는 사라지고 그 속에 피 칠갑을 한 단원이 나타났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긴 했지만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단원의 모습에 관람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깔깔거렸다. 가루가 뭔지 몰라도, 상자 속에 들어갔던 단원은 오히려 들어가기 전보다 더 쌩쌩해졌는지 신나게 점프하며 무대를 돌아다녔다.

‘저거 마술이 아니라 그냥 다 죽어 가는 거 소생시킨 거 같은데! 무슨 가루를 먹인 거야? 수상해!’

가루를 먹인 마술사가 약 먹은 것처럼 날뛰는 단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재미를 위해 가짜 피를 쓴 건지, 아니면 수상한 수를 쓴 건지 진실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도 실비아의 눈도 속일 정도의 기묘한 마술쇼가 한참을 이어졌다. 흥미로운 공연에 객석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상석에서 관람하는 황족들을 의식해 얌전하던 관람객들은 황제 폐하가 큰 소리로 웃자 안심한 듯 연이어 탄성을 지르며 공연을 즐겼다. 객석을 비추는 수정구를 보니 VIP석에서 관람 중인 황족들이 보였다. 황태자의 모습도 보였는데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눈으로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황후가 어깨를 치며 저거 보라는 듯 무대를 손가락질하자 황태자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하품을 했다.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엄마가 좋아하면 같이 좋아하는 척이라도 할 것이지!’

혀를 쯧쯧 찬 실비아는 객석을 비추는 수정구에서 눈을 떼고 다시 무대 쪽 수정구를 지켜봤다. 굳이 수정구를 보지 않아도 탄성을 지르는 관객들의 소리가 대기실까지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공연에 실비아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활기찬 분위기에 제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곧 내 차례구나.’

실비아의 역할은 면접에서 했던 것처럼 접시와 공 등을 이것저것 굴리며 훌라후프까지 돌리는 것이었다. 서커스단장은 너무 고난도의 묘기는 연습이 필요하니, 면접 때 보여 준 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나저나 공연이 벌써 반이나 지났는데 서커스단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단히 탈이 나신 건가? 걱정된 실비아는 대기 중이던 다른 단원에게 말을 걸었다.

“단장님은요? 아직 안 돌아오시네요.”

“말도 마세요. 탈이 단단히 나셨나 봐요. 계속 화장실에서 못 나오고 계세요. 이상하다. 단장님이 이렇게 탈 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실비아의 질문에 대답한 단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했다. 혹시 불쟁이가 무슨 수를 쓴 게 아닐까? 실비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불쟁이 쪽을 훑었다. 불쟁이는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을 불며 소품실로 들어갔다.

‘수상한데?’

순간 공연 전 곰 탈이 건넸던 차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실비아는 아까 단장이 버린 종이컵을 쓰레기통에서 찾아냈다. 종이컵 밑바닥에 수상한 가루가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척 수상해 보였기에, 실비아는 일단 주머니에 종이컵을 챙겨 놨다.

“어이, 애송이. 공연 준비 안 해? 애송이 네 공연까지 단원인 내가 신경 써야겠어?”

소품실에서 다음 순서를 위한 소품을 손수레에 싣고 온 불쟁이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실비아를 불렀다.

“아, 죄송합니다.”

실비아는 얼른 불쟁이 곁으로 달려갔다. 서커스단장에게 미리 듣기로는 자신 몫의 소품은 접시와 작은 공, 그리고 훌라후프였다. 그러나 소품을 집어 든 실비아의 손을 불쟁이가 탁, 소리가 나게 쳐냈다. 그러곤 다른 소품을 가리켰다.

“네 소품은 그게 아냐. 이거야.”

“네? 이거…요?”

널따란 손수레 구석에 낡아빠진 훌라후프와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것 같은 헤진 공이 보였다. 거기다가 이 빠진 접시까지.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사람을 괴롭히다니. 실비아는 차가운 눈으로 불쟁이를 응시했다.

“이건 너무 낡았는데요? 공은 바람이 다 빠진 거 같은데, 무대 위에서 쓰다가 공연이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이것 봐라. 뭘 잘났다고 대들어!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거야? 다른 소품은 다 할당된 단원들이 있어! 군식구로 끼어들었으면 그냥 닥치고 하란 말이야.”

불쟁이는 눈에 불을 켜고 씩씩대더니 손수레를 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실비아가 낡은 소품을 제대로 살펴보려 손을 뻗자, 불쟁이가 매섭게 손을 쳐냈다.

“공연의 기본도 몰라? 소품은 공연 바로 전에 소품 담당이 무대에 배치해 둬. 그걸 자기 차례에 자연스럽게 집어서 사용하는 거야. 직접 들고 나가는 게 아니라고!”

“아…. 잘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실비아를 꼬나 본 불쟁이는 손수레를 끌고 무대 뒤 공간으로 사라졌다. 소품에 몹쓸 짓을 한 게 아닐까 싶어 자세히 살피려 한 건데, 사람을 무지렁이 취급하다니 서러웠다. 모르는 것 같으면 가르쳐주면 되지. 왜 저렇게까지 소리를 치고 난리람? 뭔가 또 수상한 일을 벌일 것 같아 불길한데 살펴보지 못하니 골치 아팠다. 그녀는 대기실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애석하게도 서커스단장이 배탈이 난 지금 실비아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창 공연 중인 예민한 대기실에서 불쟁이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저 소품들로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수밖에.’

실비아는 애써 분을 삭이며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시간이 흐르고 네 번째 공연이 끝날 기미가 슬슬 보였다. 그녀는 같이 공연할 단원들과 함께 무대 뒤 공간으로 향했다. 네 번째 공연이 끝나고 잠시 요란한 음악과 함께 무대가 어두워졌다. 실비아는 제 몫의 소품이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단원들을 뒤따라 무대로 나갔다.

“자, 다섯 번째 공연! 재밌게 즐겨 주십시오!”

피에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대가 밝아지고 넓은 객석이 실비아의 눈에 들어왔다.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단원들이 차례차례 재주를 부릴 때 자잘하게 보조했다. 서커스단장이 일러 준 대로 보조할 필요가 없을 때는 관람객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으려 발을 고정해 멈춰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덧 실비아의 차례가 다가왔고, 그녀는 리허설 때처럼 뮤지컬을 하듯 율동을 하며 소품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다.

‘어? 뭐야. 소품이 왜 이렇게 축축해?’

실비아는 순간 당황했으나 무대 위에서 실수할 순 없었기에 소품들을 우선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을 시전하자,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접시가 가뿐하게 돌았다. 그것만으로도 관람객들이 ‘오, 엄청 빨라!’하면서 감탄사를 흘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접시를 돌리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공들을 저글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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