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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12화 (212/372)

212화

“아이고, 이 아가씨가 뭘 알고 그랬겠나. 좀 봐주게.”

서커스단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리자 기사가 마지못해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실비아는 얼른 뒤로 물러난 뒤 빠르게 세이브를 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목이 달아난다면 큰일이었으니까. 실비아는 눈만 조심스럽게 들어 기사들의 수를 셌다. 자그마치 검은 갑옷의 기사가 일곱 명에 은색 갑옷의 기사도 열 명 정도 있었다. 아까 황제 내외가 왔을 때보다 더한 호위에 그녀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히이잉!”

그때 뒤에서 말 소리가 들렸다. 림보를 잃은 뒤로 말 소리에 예민해진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봤다. 기사가 말고삐를 쥔 채 당근을 주며 말을 돌보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런데 말의 생김새가 범상치 않았다. 눈부시게 하얀 털색을 가지고 있었고, 무슨 미용을 한 건지 갈기가 옴브레 헤어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장이며 말고삐에 화려한 보석이 달려있어 딱 봐도 범상찮은 말이었다.

‘외제마네. 저 기사의 말이라기엔 이런 행렬에 대동하고 나타날 린 없고…. 황태자가 타는 말인가?’

조용한 분위기를 뚫고 낮고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와닿았다.

“포리쉐. 얌전히 기다려.”

인사조차 기사를 시켜 대신하던 우라엘 황태자의 목소리였다. 포리쉐라고 불린 말은 황태자의 말에 ‘흥!’하는 것처럼 삐진 티를 내더니 기사의 손에 들린 당근을 물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기사는 당황한 얼굴로 말을 진정시키려 진땀을 뺐다. 잠시 후 황태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포리쉐가 당근이 먹기 싫은가 봐.”

황태자의 말에 포리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선 기사가 곤란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예. 얼마 전부터 당근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저 당근은 때깔로 보아 백 퍼센트 유기농 당근일 텐데. 우리 림보보다 더 까다롭네. 저럴 땐 다른 걸 먹이면 되지 않나? 우리 림보는 티라미수 케이크를 당근보다 훨씬 좋아했었지.’

보아하니 포리쉐라는 외제마가 순순히 마구간에 가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황태자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케이크를 먹이면 되지….”

“방금 뭐라고 했지?”

실비아의 중얼거림에 황태자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혹시나 흑기사들한테 썰릴까 봐 겁먹은 실비아가 입을 꾹 다물자, 황태자가 대답을 종용했다.

“죽이지 않을 테니 대답해 봐.”

그 말에 맞춰 흑기사 한 명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실비아를 향해 뻗었다. 말과 행동에 모순이 상당했다.

‘시발, 뭔 놈의 황궁이 이렇게 살벌해. 대답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거 아냐? 손 떨려서 살겠나 이거.’

실비아가 머뭇거리자 답답했던지 우라엘 황태자가 기사들을 옆으로 갈라지게 했다. 검은 갑옷의 기사단들이 비켜서자 하얀색 제복을 입은 은발에 푸른 눈의 남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호위하는 기사들의 키가 워낙 커서 가려져 있던 거지, 황태자도 시원시원하게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색과 눈 색은 황제를 쏙 빼닮았지만, 이목구비는 차갑게 생긴 황후와 거푸집 수준으로 똑같았다. 미남보다는, 그래. 마치 눈발이 거세게 휘날리는 환상이 보이는 듯한 시린 인상의 미인이었다.

실비아는 자신에게 검을 들이댔던 기사를 힐끗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전 황궁 관계자의 멘트를 떠올리며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우라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엘리셔스 월드 인턴인 실비아라고 합니다. 케이크를 먹이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이크?”

“네. 제가 기르는 외제마가 케이크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실비아는 순간 저한테 검을 들이댄 기사의 손이 살짝 흔들리는 걸 보고 겁나 말을 더듬었다. 실비아가 아무리 던전 공략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황궁 안에서 기사를 상대로 전투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레벨이 보이진 않았지만, 저 7인의 기사단들은 실비아보다 훨씬 센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만 해도 흑기사 한 명이 그녀가 대비할 틈도 없이 목에 검을 들이대지 않았던가.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시종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케이크를 가져오라는 명령인 듯했다.

‘설마 저 말이 케이크를 안 먹는다고 내 목을 썰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시종이 딸기 케이크를 포리쉐의 입에 내밀자 그것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지만, 실비아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다행히 포리쉐는 딸기 케이크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그것은 만족한 듯 투레질을 한번 하더니 땅을 가볍게 걷어찼다. 곧이어 기사가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 포리쉐의 입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상전이 따로 없는 모습이 림보랑 똑 닮아서 실비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포리쉐는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순순히 기사가 이끄는 대로 마구간으로 사라졌다. 케이크를 안 먹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림보랑 식성이 같아서 다행이었다.

황태자는 다정한 눈길로 포리쉐를 바라보더니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옆의 기사를 응시하더니 눈짓으로 실비아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실비아에게 다가와 조그만 주머니를 건넸다.

“우라엘 황태자 전하께서 주시는 보상이다. 공연 잘하라는 말씀도 전하라고 하셨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조그만 보석이 하나 들어 있었다. 말 한마디에 보석이라니!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론 황태자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고마우면 직접 얘길 하지, 왜 기사한테 시켜서 전달하는 거지?

포리쉔지 뭔지 하는 말 때문에 황태자가 실비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못 들을 뻔했다.

실비아는 우라엘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른한 눈빛의 황태자는 한숨을 흘리며 제 손에 낀 반지들을 훑었다. 그게 신호였는지 기사들이 다시 우라엘을 둘러싸고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별로 맘에 안 들어.’

기사들 사이에 숨어 있던 그가 굳이 얼굴을 드러내며 대답을 종용한 건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하는 대로 효과를 봤으면 부하를 시켜 보상을 건네주는 건 둘째치고, 제 입으로 고맙다고 말을 해야 정상 아닌가. 덕담도 그렇다. 황제 내외도 덕담을 한마디씩 건넸건만 기사를 시켜 전달하다니. 어찌 저렇게 오만한지. 아무리 황제 내외가 싸고도는 황태자라지만 예의는 어디 쌈 싸 먹은 건가 싶었다. 실비아는 울컥했으나 입 안쪽 여린 살을 깨물며 가까스로 분을 삭였다.

‘존슨 할아버지가 황태자는 제국의 국보 1호란 소리가 있다고 하더니,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네. 뭔 놈의 황태자가 황제 부부보다 호위를 많이 거느리고 다녀? 황제가 황태자를 무척 아낀댔나? 아들 교육을 잘못했네.’

거리도 떨어져 있어 <동정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지, 얼굴도 잘 안 보여주지. 심지어 말 걸기도 힘든 남주라니. 차라리 루카는 싸가지는 없을지언정 말은 곧잘 걸어 줬었다. 실비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썩어들어갔다. 그러나 티를 내면 또 목에 검이 들어올 수도 있었기에 얼른 억지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행렬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실비아는 단장을 따라 입구 멀찍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비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기 때문이다. 실비아의 시선이 그 뒤를 쫓았으나 다시 키가 큰 기사들에 둘러싸인 황태자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 봤던 오뉴월 서리 같이 서늘한 얼굴을 떠올렸다. 외모가 범상치 않은 걸 봐서 남주일 확률은 높아 보이는데, 상태 창을 볼 정도로 가까이 가지 못하니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걸 떠나서 공략할 맘이 별로 들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말이다.

‘하아, 남주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이도가 너무 높아.’

배부른 변태인 실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란 게 웹소설에서 단골처럼 나오길래 만만하게 봤더니 오산이었다. 활자로 보는 것과 실제로 상대해야 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 실비아가 낙담한 표정을 짓자,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서커스단장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우라엘 황태자는 원래 저렇게 과묵한 분이라며 얼굴을 본 건 자신도 처음이라고 했다. 몇 번 행사 관련으로 황궁을 방문했을 때도 기사들에 둘러싸여 목소리만 듣는 게 전부였다는 것이다.

저건 과묵을 넘어서 경우가 없는 건데요? 실비아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철통 수비하는 황태자라니. 개발자는 웹소설을 안 읽어 본 게 틀림없었다. 대체 어디 근본 없는 웹소설의 황태자가 저렇게 사방을 감싸는 호위를 대동하냐고!

“자, 이제 곧 공연 시작이니 다들 정신 단단히 차려!”

서커스단장과 함께 무대 뒤로 돌아온 실비아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기했다. 아까 본 거대한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옆에 선 서커스단장이 그녀를 독려했다. 면접 때 봤던 것처럼 빠르게만 하면 문제없다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는 서커스단장에게 곰 탈이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밀었다.

“단장님, 여기 항상 드시는 차입니다.”

“아, 그래. 고마워.”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곰 탈은 어쩐지 어색하게 인사하곤 급히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차를 다 마신 단장은 발성 연습을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무대 위로 올랐다. 커튼이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황실 개방 축제에서의 공연이 시작됐다. 평소 말할 때와 달리 행사장 사회자처럼 멋있게 꾸며낸 서커스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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