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그는 곰 탈과 함께 본공연 때 실비아를 엿 먹일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실비아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들은 실비아는 내버려 두고 즐겁게 묘기 연습을 했다.
두 단원의 생각과 달리 실비아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딱 봐도 사람 무시하는 태도에, 말도 안 되는 묘기를 시키기까지. 이거 완전히 견제하는 거네!’
실비아는 갑자기 공연에 끼어들게 돼서 단원들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 싹퉁머리 없는 행동들을 보니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적당히 참여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했으나, 아주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불쟁이와 곰 탈을 보는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서커스단장은 한참 후에 공연 시간이 임박해서야 돌아왔다. 그는 구석에 앉아 있는 실비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비아 양, 리허설은 잘했어?”
“…아뇨. 제가 하기엔 너무 어려운 묘기만 해 보라고 하셔서….”
실비아는 측은해 보이도록 힘없이 미소 지으며 상세하게 일러바쳤다. 이건 비겁한 고자질이 아니라 정의 구현을 위한 정보제공이니까 켕기는 건 없었다. 자신이 없는 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서커스단장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곤 허리춤에 찬 채찍을 휘날리며 불쟁이네에게 달려갔다.
“으흣!”
“아흐으. 단장님….”
찰싹찰싹 찰진 채찍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 저 멀리서 이를 갈며 실비아를 노려보는 불쟁이를 볼 수 있었다.
‘서커스단장은 채찍으로 단원들의 기강을 잡는구나. 서커스단 인턴이 됐다면 매일 채찍질 당하며 지력을 올릴 수도 있었을까?’
사장이 직원들에게 폭력행사 하는 건 나쁜 거지만, 게임 세계에서 현실의 법칙을 적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쩐지 주먹이 아니라 채찍질이라서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서커스단장이라면 딱히 채찍질 당하고 싶지 않지만, 미남이었다면 기꺼이 채찍을 맞아 줄 수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는 잡생각을 하던 실비아는 불쟁이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외면하고 서커스단장에게 다가갔다.
서커스단장은 괜히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실비아 양이 제대로 리허설을 못 했다며 미안해한 뒤, 공연에서 해야 할 일을 대략적으로 말해 주었다. 실제로 안 해 봐도 괜찮겠냐는 그의 말에 실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는 단장은 순서만 제대로 기억하라며 당부했다. 그는 같이 무대에 올라갈 단원들을 부른 뒤 간단한 동선을 알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불쟁이와 곰 탈은 더 이를 갈았다.
“뭐야, 왜 연습은 안 하고 대화만 나누는 거지? 서커스단장 하는 꼴을 보아하니 쉬운 일만 시키려나 본데, 어림도 없지. 어이, 곰 탈.”
“어?”
“가까이 와 봐.”
불쟁이는 곰 탈의 귓가에 한참을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곰 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리허설 시간이 지나가고 공연을 위해 무대 세팅까지 완료됐다. 긴장한 얼굴의 단원들이 무대 뒤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공연 시간이 다가와 관람객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한 듯, 건물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실비아 님, 전 아까 말한 대로 나갔다가 올게요.”
“그래, 조심해.”
세비스는 감시소에 잠입하기 위해 공연장을 나섰고 그 뒷모습을 실비아가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과연 그 건물에는 림보가 있을까? 죄를 지어야 거기 갇히는 거 아니던가. 차라리 없는 거면 다행이련만….
이제 공연 시작이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긴장한 채 무대 뒤 실내 벤치에 앉아 있던 실비아를 서커스단장이 불렀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나선 그녀는 공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밖으로 향하는 단장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실비아 양! 내가 말했었지? 눈도장 찍을 기회라고! 입구에서 나랑 같이 손님맞이 하자고.”
“아!”
실비아가 탄성을 흘리자 서커스단장이 말을 이어 갔다. 이번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명망 있는 가문의 귀족이거나 크게 성공한 사업가이니, 입구에서 직접 맞이해 눈도장을 찍자는 것이다. 그런 건 고참 단원들 위주로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은 그냥 공연에 한 번 참여하는 것일 뿐인데 이렇게 특혜를 마구 뿌려 주다니. 어찌 보면 기존 단원들의 미움을 살 만했다. 실비아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해하든 말든 알 반가. 받을 수 있는 건 받아야지. 아마 단장은 실비아의 능력을 높이 사 예뻐하는 것일 터였다.
‘게임 세계는 철저한 능력주의로구나. 고생해서 레벨 업을 한 보람이 있네.’
뿌듯해하는 실비아와 함께 입구에 선 서커스단장은 멀리서 오는 마차들을 보며 콧수염을 매만졌다.
“이 공연을 보러 오는 분들은 대부분이 다 귀족들이야. 그것도 평범한 귀족들이 아니라 대단한 사람들뿐이니 인사를 깍듯하게 하는 게 좋을 걸세.”
“네!”
황궁 입구에서 봤던 기사단들은 어느새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세비스의 말대로 경비 대부분이 공연장에 집중된 것 같았다.
곧 화려한 마차들이 속속들이 입구에 도착했다. 실비아와 단장, 그리고 몇몇 떨거지들은 허리가 부러져라 열심히 배꼽 인사를 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입구에 설 때마다 옆에 선 황실 관계자가 두루마리를 펼치며 ‘누구누구님 입장하십니다!’라고 외쳤다. 실비아는 혹시 그중에 남주 후보자가 없나 유심히 살폈다. 시시때때로 쓸모없는 잡캐릭터들의 동정 유무를 알려 줘 한동안 꺼 놨었던 <동정 레이더>도 남주 후보를 찾기 위해 다시 켰다.
역시나 딱히 설명할 필요 없는 캐릭터들의 동정 유무가 눈앞에 마구 떠올라서 정신이 사나워졌다. 실비아가 파리 쫓듯 메시지창을 휘휘 젓는 순간, 서커스단장이 눈에 띄게 긴장하더니 실비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긴장! 정신 단단히 차리게.”
“네?”
서커스단장이 말없이 턱을 까딱여 먼 곳을 가리켰다. 시선을 던지려는 찰나,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요란한 나팔 소리가 들려오면서 황실 관계자가 여느 때 보다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태양이신 아드리안 디 엘리셔스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이신 에스티나 디 엘리셔스 황후 폐하께서 오십니다!”
고개를 들려던 실비아는 서커스단장이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있는 걸 보고는 일단 따라 했다.
무릎이 아려올 정도로 똑같은 자세로 있길 한참, 갑옷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나더니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둘의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라.”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비아는 조심스레 단장이 하는 대로 고개를 들었다. 힐끗 단장이 하는 꼴을 보니 눈을 마주쳐도 되는 듯했다.
‘귀족 예법을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대충 눈치껏 따라 하자.’
은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부드러운 인상의 황제와 보라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의 황후가 서커스단장에게 덕담을 건넸다. 실비아에게도 몇 마디 건넸는데, 공황상태에 빠진 그녀는 무슨 정신인지 모르고 대충 대답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지 않은 걸 보니 다행히 이상한 말은 안 한 듯했다.
“공연 기대하고 있겠네.”
온화한 미소를 띤 황제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한 뒤 황후와 함께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황태자는 어딨지? <동정 레이더>를 켜고 귀빈들을 맞은 지 한참인데 남주 후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남은 건 황태자인데…. 만약 이 공연장에 남주가 없다면 실비아는 국외로 나가야 할 수도 있었다. 여기엔 내로라하는 인사들은 다 모이는 자리라고 했었으니까 없다면 국경을 넘어…. 안 좋은 가정으로 낯빛이 하얘진 실비아가 초조하게 입구를 서성였다. 제발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지경은 안 가고 싶었다.
‘황태자가 남주일 거야. 암, 그렇고말고.’
“저기, 단장님. 이제 올 분은 다 오신 건가요?”
“아냐. 우라엘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 안 오셨어. 그분은 조금 늦으시나 보네.”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음,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워낙 뵙기 어려운 분이라서 말이야.”
이상한 말이었다. 황제와 서커스단장이 얘기를 나누는 걸 들어보면 처음 본 사이 같진 않던데, 황제는 봤으면서 황태자는 뵙기 어렵다고?
그때, 나팔 소리가 다시 한번 요란하게 울리더니 황궁 관계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우라엘 에스티나 디 엘리셔스 전하 오십니다!”
어디, 어디? 두리번거리던 실비아는 멀리서 검은색 갑옷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걸 봤다. 제국의 기사들은 다들 은색 갑옷을 입는 줄 알았는데 소속마다 색이 다른 모양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을 보려고 혈안이 된 실비아는 목을 빼 멀리 내다봤다. 그러나 서커스단장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히며 예의를 차려야 했다.
‘봐야 하는데! 남주일 수도 있잖아!’
잠시 그러고 있자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갑옷이 눈앞에 섰다.
“우라엘 황태자 전하께서 좋은 공연 기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비아가 고개를 들자 온통 키가 큰 검은 갑옷 기사들이 벽처럼 서 있었다. 체감상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들이었다. 그 기사들이 철통방어하는 바람에 우라엘 황태자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심지어 <동정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거리에 있어, 공략 캐릭터인지 아닌지 확인이 어려웠다.
‘이게 뭐냐고. 얼굴을 보여 줘!’
답답했던 실비아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나아가자 선두에 서 있던 기사가 검집에서 검을 빼 들어 실비아의 목에 디밀었다. 실비아는 순간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살벌한 반사신경에 기겁했다가, 목을 벨 듯이 다가온 검에 얼음이 되어 버렸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겠지? 진작에 세이브를 해 둘걸. 그러나 몸을 잘못 움직였다간 목이 달아날 것 같아서 시스템 창을 열 수가 없었다.
“조심해. 목숨 소중한 걸 모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