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아아, 네. …저는 드래곤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단장님을 찾아왔던 건데, …카를 단장님! 맞으시죠? 제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드래곤에 관심이 많음을 한 번 더 어필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가 책에 휘갈긴 사인을 보고 카를 단장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자 단장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실비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통은 오래 붙잡아 둬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나? 본인 일정이 바빠서 간다니, 정말 제멋대로의 끝판왕이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보상인 책은? 저대로 가면 안 되는데!
실비아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카를 단장이 은색 로브의 귓가에 뭔가를 속닥거렸다. 잠시 후, 은색 로브가 양장본을 한 권 가지고 와 실비아에게 건넸다.
이건 설마? 실비아가 황송해하며 받자 루카의 아버지, 카를 단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 이거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뭐, 별거 아냐. 우리 집에 굴러다니는 거 중에 하나지. 그래도 바깥에서는 구하기 힘든 한정판이라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한정판이라니, 어휴. 너무 쉽게 구해서 추호도 몰랐던 사실….”
그의 자랑질이 또 시작됐다. 실비아는 대충 리액션을 해 주면서 힐끗 책의 제목을 봤다. 예상대로 퀘스트 보상인 드래곤을 가르치는 어쩌구였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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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황궁 개방 축제에서 황실 제1 마법사단장에게 드래곤에 대해 물어보자.>를 완수하여 성공 보상 <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방법>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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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온 우주가 블루를 …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어! 퀘스트 성공도 행복한데 수식 해석까지 손에 넣을 줄이야. 완전 최고야. 마법사단장이 루카의 아버지였단 건 좀 그렇지만 말이지.’
실비아는 배덕감에 몸을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루카의 아버지가 블루를 …을 수 있게 도와주다니! 누가 알게 될까 봐 괜히 겁났다. 카를 단장은 이제 정말 가 보셔야 한다는 은색 로브의 말에 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실비아에게 인사했다.
“그럼, 실비아 양.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더 높은 곳에서 볼 날이 오면 좋겠군. 건투를 비네!”
“카를 단장님,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퀘스트 성공으로 즐거워진 실비아는 바바리코트를 다시 입고 세비스에게 돌아갔다.
“실비아 님! 코트에 이 글자는 다 뭐예요?”
“어? 아, 정신 차리고 보니 마법사단장님이 사인을 하셨더라. 수식이 어렵다니까 해석도 적어 주셨고….”
실비아가 말끝을 흐리자 세비스가 분통을 터트렸다.
“붉은 머리들은 다 저렇게 제멋대로인가 보죠? 옷이 완전 엉망이 됐잖아요.”
“괜, 괜찮아. 집에 기념으로 걸어 놓지 뭐.”
실비아는 애써 미소를 지은 뒤 바바리코트를 벗어 세비스가 가져온 피크닉 가방에 넣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실비아가 살짝 몸을 떨었고, 세비스가 제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다시 축제를 즐겼다. 카를 단장이 가긴 했지만 남아 있는 은색 로브들이 계속 화려한 마법을 보여 줬다. 그들이 쏘아 올린 환상마법은 맑은 하늘에 화려한 명화를 만들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보다 보니 마치 대학교 축제의 불꽃놀이나 축제의 에어쇼와 흡사했다. 에어쇼 비슷한 게 끝나고 은색 로브들이 사라진 뒤에는 관람객 모두에게 디저트를 제공하는 간단한 티 파티가 있었다. 퀘스트를 완수해 가뿐해진 실비아는 즐거운 마음으로 잠시간의 휴식을 즐겼다.
“어휴, 실비아 님, 가방이 왜 이렇게 무거우세요. 어라, 책이네? 왜 책을 두 권이나 들고 계세요?”
“인턴이란 게 참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거더라고. 원래 한 권만 들고 다녔는데, 마법사단장님이 읽어 보라고 책을 한 권 주셔서 더 무거워졌네.”
“제가 들게요. 이리 줘 보세요.”
세비스는 실비아가 말릴 틈도 없이 어깨에 멘 가방을 가져갔다. 실비아는 허전해진 어깨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뭐야, 내가 힘이 세단 걸 까먹은 건가?’
얼마 전에 블루도 목도리처럼 두르고 다녔던 자신이건만. 세비스는 자신을 오래 봤으니 힘이 세단 걸 당연히 알 텐데 왜 저럴까 싶었다. 실비아는 세비스가 든 가방을 다시 가져오려다가 관뒀다. 그가 체격이 커진 만큼 믿음직한 집사 노릇을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간단한 티 파티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기까지가 관람의 끝인 듯, 관람객들 상당수가 집으로 갈 채비를 하는 게 보였다.
‘서커스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일반 관람객들이 아닌 모양이구나.’
관람객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던 실비아는 세비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연 리허설은 언제 하는 거예요?”
“곧 약속한 시간이야. 이제 슬슬 약속 장소로 가야겠네. 너는 피곤하면 먼저 집에 갈래?”
“아니에요. 저기 잠깐, 실비아 님.”
세비스가 가까이 오라는 듯 실비아를 불렀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실비아 님이 공연하실 때 아까 봤던 그 건물에 한번 가 보려고요.”
“뭐? 위험할 텐데?”
실비아가 걱정하자 세비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늑대로 변신해서 갈 거예요. 제 겉모습을 대충 보면 들개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떠돌이 개인 것처럼 위장해서 건물로 들어가 보게요.”
“아! 좋은 생각이긴 한데,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까?”
“공연장에 주요 인사들이 다 몰려 있으니 경비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감시소 경비가 철저해서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아요.”
세비스는 실비아가 리허설하는 곳에 따라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연이 시작할 때 은근슬쩍 빠져나와 감시소를 염탐하겠다고 말했다. 혹시 다치지 않을까 염려된 실비아가 말렸지만 세비스의 의지는 완강했다.
안내인에게 공연참여자임을 알린 실비아는 용병기사 한 명을 대동하고 세비스와 함께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현생의 예술의 전당 같은 화려한 내부가 그녀를 반겼다. 먼저 와서 연습 중이던 단원들 사이에 서커스단장이 채찍질을 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게 보였다.
찰싹!
“아흣!”
“으흐!”
어쩐지 기묘한 분위기를 깨며 실비아가 큰 소리로 단장을 불렀다.
“단장님! 저 왔어요.”
“아이고, 실비아 양!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실비아의 외침에 단장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그의 시선이 세비스에게 향하자 실비아가 세비스를 소개했다.
“이 친구는 저랑 같이 사는 식구예요. 오늘 제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서 일부러 데려왔어요.”
“아이고, 반가워요 친구. 친구는 여기 앉아 있으면 돼.”
세비스는 실비아에게 손을 흔든 뒤 객석에 앉았다.
“불쟁이! 너는 이 친구 옷 좀 줘. 난 잠시 황궁 공연 관계자 좀 만나고 올 테니까.”
“예….”
서커스단장의 명령에 몸에서 숯불 냄새가 나는 불쟁이라는 단원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실비아를 라커룸으로 데려갔다. 불쟁이란 이름과 숯불 냄새로 미뤄 보아 불 쇼를 하는 단원인 듯했다.
“이거 입으쇼.”
“예. 감사해요.”
단원복을 입고 나온 실비아를 무대로 데려간 불쟁이는 대뜸 묘기를 해 보라고 주문했다. 처음에 해 볼 묘기는 불이 붙은 커다란 원을 펄쩍 뛰어서 통과하는 것. 저건 좀 위험해 보이는데, 초심자인 나에게 저걸 하라고? 실비아의 동공이 흔들리자 단원이 코웃음을 쳤다.
“못하겠는가 봐? 단장님이 애송이를 데려왔구먼!”
“아, 저건 제가 하기엔 좀….”
“에휴. 그럼 그렇지. 제대로 못 할 줄 알았어. 얼마나 대단한 인맥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서커스단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애송이.”
불쟁이는 코웃음을 치더니 볼링핀 같은 걸 들고 간단한 묘기를 하며 빙그르르 돌았다. 현란한 묘기를 선보이던 그는 백 텀블링으로 불구덩이를 통과했다. 살짝 불에 그슬려서 타는 냄새가 또 나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훌륭한 솜씨였다.
“와, 대단해요!”
“이 정돈 해야 서커스 단원이지.”
실비아가 박수를 짝짝 치자 순간 우쭐해하던 불쟁이는 다시 표정을 싹 굳혔다. 그는 다른 묘기를 실비아에게 해 보라고 닦달했다. 공중그네 묘기, 공 위에서 재주 부리기, 상자 탈출 마술쇼 등…. 그가 시킨 묘기들은 하나같이 지금의 실비아가 하기엔 무리였다.
‘우선 봐 두기만 하려고 했는데 단장이 없으니 원. 이해해 줄 사람이 없네.’
그녀는 굳이 리허설 단계에서 <손은 눈보다 빠르다> 기술을 써 상태 이상이 올 위험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몸을 사릴 작정이었는데, 계속 본격적인 묘기를 시켜대니 난감했다. 자신의 실력을 아는 단장이 자리를 비운지라 더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당장은 묘기를 연습하기가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요. 우선 구경만 할 순 없을까요?”
“기가 막히는군. 공연 리허설이 뭔 줄 아는 거야?”
“그러게.”
불쟁이가 이죽거리자 옆에 서 있던 곰 탈이 거들었다. 곰 탈은 곰의 몸값이 너무 비싸서 곰 대신 있는 단원으로, 곰인척하며 서커스 묘기를 하는 이였다. 사실 서커스단장은 그들에게 실비아가 오면 무리한 묘기를 시키지 말라고 말해 뒀었다. 그녀가 능력껏 묘기를 알아서 할 테니 지금은 구경만 시켜 주라고 했지만, 갑자기 끼어든 실비아를 못마땅해하던 그들이 단장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서커스단장이 감시하지 못하는 틈을 타, 그들은 실비아에게 초심자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난도의 묘기를 하라고 요구한 거였다. 심지어 실비아가 거절해서 다행이지, 별다른 안전장비도 없이 그녀를 사지에 내몰 계획이었다.
리허설에서 그녀가 다쳐서 공연을 못 하게 되면 오늘 공연에서 그들이 주목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험악한 분위기에 실비아가 몸을 떨었다. 불쟁이는 실비아가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흘겨봤다.
‘여기서 관두는 게 본인한테 좋을 텐데. 본공연에선 더 낭패를 볼 텐데 말이야.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이 바닥을 쉽게 보는 이에겐 망신을 줘야 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