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09화 (209/372)

209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관람객들 덕에 광장엔 마법사단장의 웃음소리만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눈물을 닦으며 진정한 마법사단장은 여전히 굳어 있는 타 대륙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더 보여 드릴까요? 제국 밖에서 오신 분들을 위해 고위 마력확장석도 썼답니다. 이번엔 환상 마법이 아니라 진짜를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굳이 염탐할 것도 없이 우리 제국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여기서 다 체험하고 가시죠.”

그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표정을 지은 단장은 다시 흰 장갑을 끼더니 제국민들이 모여 있는 쪽을 훑었다. 그의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어렸다.

“제국민 여러분들은 이런 강한 힘으로 보호받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본인이 엘리셔스 제국민이란 것에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멍해져 있던 제국민들은 곧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네!’ 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충격적인 환상 마법 뒤에 저런 멘트를 던지니,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애국심이 한껏 차오르겠지.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은 세비스가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왜 저런 미친 짓을 하나 했더니 일부러 보여 준 거네요.”

“그러게, 대단한데.”

실비아는 재수 없다는 처음의 판단을 정정했다. 저건 타국 사람들 보라고 일부러 한 퍼포먼스구나 싶었다. 그가 단상에서 물러나자 은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마법으로 폭죽 쇼와 재밌는 마법들을 보여 주며 관람객들을 즐겁게 했다. 타국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썩어 있었지만 말이다.

실비아는 단상 밑으로 내려온 마법사단장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말을 걸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는 거였다. 로브를 다시 쓴 걸 보니 마법사단장은 곧 이 광장을 떠날 모양이었다. 이대로 그를 놓칠 순 없었기에 실비아는 세비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퀘스트에서 무식한 사람은 상대도 안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유식한 척한담?’

고심하던 실비아는 가방에서 마법진 파훼 10년 벼락치기 어쩌구를 꺼냈다. 마법사단장을 만날 때를 대비해 항시 휴대한 것…은 아니고, 인턴 생활을 하느라 피곤에 절어서 가방 정리 한번 안 하다 보니 그대로 들고 다니게 된 것이었다.

‘가방 정리 안 한 덕을 봐야 할 텐데.’

실비아는 옆구리에 두꺼운 책을 끼고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지척까지 다가가자 은색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그녀를 경계했다.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이긴, 퀘스트 하려는 일이지. 그러나 사실대로 답할 순 없었다. 실비아는 일부러 옆구리에 찬 책을 가슴에 안으면서 학구열이 가득 찬 사회초년생을 연기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법진을 공부 중인 엘리셔스 월드 인턴 실비아라고 합니다. 제1마법사단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기에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용기 내 찾아왔어요. 다름이 아니라 이 책이 너무 어려워서 혹시나 단장님께 여쭤보면 해석할 수 있을까 싶어서….”

“단장님은 바쁘신 몸입니다.”

말을 끊고 들어 온 은색 로브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기에 실비아는 뒤에 선 단장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좀 더 크게 했다.

“그렇지만! 주변의 똑똑한 분들에게 다 여쭤봐도 다들 모른다고 말씀하셔서요. 단장님도 역시 못 푸시려나요? 하아, 이 어려운 수식을 누가 해석할 수 있으려나….”

“응?”

단장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해서 은근슬쩍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승부욕을 불러일으킬 만한 멘트를 던져 본 건데, 효과가 제법 좋았다. 그녀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못 느낀 척 은색 로브를 향해 한마디 말을 더 얹었다.

“이 책의 저자는 10년 만에 벼락치기로 마법진을 해석한 천재라고 하더라고요. 휴, 아무래도 저자를 찾아가서 직접 물어야 할까 봐요. 괜히 제가 소란만 피웠네요. 죄송합니다.”

“잠깐, 실비아 양이라고 했나?”

돌아서려는 실비아를 마법사단장이 불러세웠다. 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책을 안고 뒤돌았다. 로브를 다시 벗은 단장이 그녀가 든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런 유형들은 승부욕을 자극하면 못 참지.’

실비아가 순진한 척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엘리셔스 월드 인턴 실비아라고 합니다.”

“흠, 그래. 궁금한 게 있어서 나를 찾아왔다고?”

“네. 주변 분들은 다 모른다고 하셔서….”

단장은 실비아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성격이 급한 모양이었다.

“아까 다 들었으니까 설명은 됐어. 그 책, 누가 쓴 건지 알겠으니까, 일단 줘 봐.”

그가 손을 까딱거리자 실비아가 얼른 책을 건넸다. 드래곤 마법진 부분을 펼쳐서 보여 주자 단장이 잠시 저자명과 수식들을 훑었다. 그는 곧 코웃음을 치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이 새끼 이거. 뭐 하고 사나 했더니 이런 책을 만들었네? 10년 벼락치기?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말투가 엄청… 자유로워. 루카네 집안사람들은 다 이런가?’

실비아가 반응 없이 얌전히 있자 단장이 헛기침을 하더니 한마디 더 했다.

“크흠, 이 책의 저자가 내 아카데미 동창이거든! 항상 나보다 마법시험에서 뒤처지던 앤데 이런 책을 만들었네? 난 이런 책 볼 수준이 당연히 아니고, 그래서 이놈이 책 낸 것도 이제야 알았네. 하하!”

“어머! 동창이셨어요? 역시 마법사단장님의 소문은 괜한 게 아니었군요!”

“소문? 어떤 소문이 있지?”

실비아가 호들갑을 떨며 단장을 치켜세웠다. 루카와 성격도 완전히 똑같고, 비슷한 잘난 척 화법을 구사하는 게 아무래도 마법사단장은 루카와 정말 친한 친척임이 틀림없었다. 삼촌쯤 되려나? 단장은 자기한테 무슨 소문이 도는지 물었고 실비아는 사실 들은 게 없었지만, 최대한 입바른 소리만 골라 했다. 똑똑하고 마법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우며, 한눈에 봐도 무척 잘생겼고 등등 단장의 귀에 꿀을 마구 바르자 그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마지막에 가서는 아까 관람객 중 한 명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사업도 승승장구하신다고 들었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단장이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에이, 사업은 내 아들내미가 다 하는 거고. 나는 포크만 얹었을 뿐이지.”

“아들…이요?”

아빠뻘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로 장성한 아들이 있나 싶었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은색 로브 중 한 명이 끼어들었다.

“루카 님 말씀이시죠? 크, 아드님이 한 인물 하던데요. 콧대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단장님 젊었을 때를 쏙 빼닮았더라고요!”

“그래. 그 녀석이 생긴 것도 기가 막히게 낳아놨는데 일도 나 닮아서 잘해, 어찌나 똘똘한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더라고.”

세상에, 마법사단장은 루카의 아버지였다. 예비 시아버지와 상견례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부담감에 실비아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부담감과 함께 죄책감도 함께 찾아와서 그녀의 관자놀이에 땀이 흐르게 했다.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본인 아들내미랑 물고 빨고 했던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그 여자가 한두 명을 물고 빤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몇 명 더 물고 빨 예정이라면? 아까 보여 줬던 메테오가 환상 마법이 아닌 실재가 되어 그녀의 정수리에 꽂힐지도 몰랐다.

실비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단장은 역시 루카 아버지답게 그녀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수식을 빠르게 훑더니 옆에 선 은색 로브에게 펜을 달라고 했다. 그가 펜촉에 잉크를 묻히곤 실비아에게 물었다.

“실비아 양이라고 했지?”

“네? 네네.”

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실비아를 대뜸 돌려세웠다. 뭐, 뭐지? 실비아가 당황할 틈도 없이 등에 펜촉이 와 닿았다. 루카의 아버지는 실비아의 등에 화려한 필기체로 사인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드래곤 마법진 파훼법의 수식 해석까지 등에 휘갈겼다.

얼떨결에 등을 내준 실비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황급히 코트를 벗어 등 쪽을 확인했다. 오늘 산 바바리코트에 화려한 필기체의 사인과 복잡한 수식이 빼곡했다. 사인? 제멋대로 남의 옷에 사인을 한다고? 심지어 수식까지 한가득 채워 넣었어?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며 어버버하고 있자 루카의 아버지가 파안대소했다.

“하하, 더없는 영광이지? 나도 아니까 그런 표정 안 해도 돼.”

“어어….”

실비아의 눈이 마구 흔들렸지만 아무도 그녀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루카의 아버지는 마법진 파훼 벼락치기 어쩌구를 보며 비웃었다.

“으이구, 이놈이 독자들 수준을 고려 안 하고 너무 어려운 수식만 골라 썼어. 나야 보자마자 단번에 알지만 말이지. 이러니 맨날 나한테 뒤처지지, 쯧. 그건 수식 해석이니 참고해. 고맙지?”

“아, 가, 감사해요.”

실비아의 말에 루카의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건넸다. 그녀는 혼이 빠진 표정으로 책을 받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바바리코트를 내주고 드래곤 마법진 수식 해석을 얻었다. 실비아의 눈이 바바리코트에 적힌 수식 해석에 닿았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건지 설명할 수 없지만, 눈에 쏙쏙 들어오는 친절한 해석이었다. 오늘 큰맘 먹고 산 바바리코트가 엉망이 된 건 좀 그랬지만, 이 해석과 마법사단장의 사인이면 오히려 내 바바리코트의 가치가 올라가리라…. 그렇다고 해서 어디다 팔 건 아니지만…. 실비아는 애써 긍정회로를 돌리곤 허리를 숙이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실비아 양은 드래곤에 관심이 많은가 봐? 드래곤이라, 지금은 전설의 동물이지. 물론 우리 아리센트 가문에겐 전설의 동물이 아니라 수많은 조무래기 적들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말이야. 초대 황제 폐하의 건국을 도운 우리 선조께서….”

루카와 똑같은 패턴의 자랑질이 시작됐다. 드래곤 마법진 페이지를 본 순간부터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선조의 무용담과 자기네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고 나서야 실비아를 놓아주었다.

“내 정신 좀 봐. 실비아 양, 내 일정이 바쁘니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겠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