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실비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관람은 계속 이어졌다. 살벌한 감시 속에서 개방이 허락된 건물을 마저 돌아본 관람객 무리는 안내인의 안내를 따라 널따란 잔디밭에 도착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는 노점이 잔디밭 옆 대리석 바닥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여기서 점심 식사들 하세요.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음 일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식사 시간 되세요!”
듣기론 오후의 일정은 관람객들이 광장에 다 같이 모여서 파티를 즐긴다고 했다. 그때 마법사단장을 만날 수 있으려나?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단장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람. 감시소에 림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들어가 보지도 못한다니.’
집에서 가져온 돗자리를 펼친 실비아는 그 위에 앉아 부랑자처럼 넋을 놓았다. 그녀가 정신을 놓은 사이, 세비스가 노점에서 음식을 사가지고 와 그녀의 옆에 펼쳤다. 그는 우울해 보이는 실비아의 낯빛을 살피며 걱정했다.
“실비아 님, 아까 일 때문에 그러시죠? 우선 배부터 채워요.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저희는 감시소에 들어갈 수 없나 봐요.”
“하…. 림보가 저기 있으면 어쩌지! 큰일이잖아. 설마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실비아는 그가 건넨 음식을 먹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순간 사레가 걸려 캑캑거렸다. 그녀가 목이 막힐까 걱정된 세비스가 등을 두드려 주며 물을 건넸다.
“설마, 아니겠죠. 림보가 나쁜 짓 할 애가 아니잖아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어. 분명히 말 울음소리를 들었던 거 같단 말이야. …넌? 넌 귀가 밝잖아. 못 들었어?”
“듣긴 했어요. 림보 울음소리랑 비슷하긴 했지만…. 말들의 울음소리가 워낙 구분이 어려워서요. 직접 눈으로 봐야 긴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시 세비스도 말 울음소리를 들었다. 일단 그 감시소에 말이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러나 말이란 게 원래 이 제국 내에선 교통수단으로 흔해 빠진 동물 아니던가. 림보가 차라리 특이한 울음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울음소리 하나만으로 감시소에 림보가 있다는 확신을 할 순 없었다.
“제가 황실에 출근할 때 사용인들에게 정보를 얻어 볼게요. 대열만 이탈해도 죽일 것처럼 난린데, 감시소에 들어가는 건 엄두도 못 낼 거 같아요.”
“그건 그렇네. 휴, 그래. 일단 밥이나 마저 먹자.”
실비아가 다시 음식을 들자 세비스도 식사를 시작했다. 실비아의 어두운 마음과 달리 햇빛은 밝고 따사롭게 그녀를 비췄다.
“자자, 다들 배부르게 드셨죠? 이제 광장으로 이동하시죠.”
식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내인이 다시 잔디밭에 나타났다. 그가 든 팻말을 따라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로 가서 섰다. 이렇게 살벌한 감시 속에서 구경이라니. 할 일이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비아의 생각과 달리 관람객들은 평소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황궁을 구경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했다.
안내인을 따라간 관람객들은 광장에 도착했다. 다른 관람객 무리도 광장에 속속들이 들어섰다. 확성기를 든 안내인이 짧은 해설을 시작했다.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 고대국가 시절부터 있었던 광장입니다. 여기서 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죠. 반동분자를 처단한다거나 하는 그런…아시죠? 그런 훈훈한 일이 없었다면 이 제국이 유지될 수 없었겠죠. 전전대 황제 폐하께서는 이 역사적 장소를 허물지 않고 길이길이 보전하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광장의 바닥은 황궁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예스러웠다. 살짝 금이 간 돌바닥에서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와, 무슨 놈의 황궁이 이렇게 넓어? 일부분이 이미 웬만한 도시 하나는 되겠어. 엄청나다.’
실비아는 엘리셔스 월드와 비교도 안 되게 넓은 황궁의 규모에 감탄했다. 오늘 구경한 게 단지 일부분이라니. 엘리셔스 월드를 처음 봤을 때도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황궁에 비하면 닭장이었다.
그때 광장의 반대편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요란한 의전 행렬이 들어섰다. 은색 로브를 단체로 두른 사람들이 저마다 보석이 박힌 지팡이나 화려한 색의 수정구를 들고 양옆으로 줄지어 섰다. 그들의 뒤에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문양이 새겨진 흰색 로브를 입은 중년 남자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그 행렬을 지켜보던 관람객 중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일행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제1마법사단장님이시네.”
“오늘 축제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오신 걸까? 개인사업으로 바쁘셔서 황궁엔 잘 안 오신다고 들었었는데.”
‘저 사람이 마법사단장이구나. 붉은 머리네? 루카랑 비슷…. 아니, 똑같은 머리색인데.’
로브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루카와 똑같았다. 루카의 집안이 엘리셔스 제국에서 제일 명성 있는 마법사 집안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저 남자는 루카의 친척뻘일지도 몰랐다. 마법사 같지 않게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는 광장의 한가운데 있는 단상 위에 올라서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의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자 실비아는 더 깜짝 놀랐다. 붉은 머리에 금색 눈이 루카와 똑같은 건 물론이요. 얼굴에 살짝 있는 세월의 흔적 빼고는 완전히 그와 이목구비가 판박이였다.
‘루카 얼굴이 흔한 얼굴이 아닌데! 저 가문 사람들은 다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나 보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와중에 흰 장갑을 벗어 단상 위에 올려둔 마법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1마법사단장입니다. 오늘 축제가 좀 심심하시죠? 그래서 제가….”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소리와 함께 광장 주변이 순식간에 엄청난 불길로 휩싸였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거 보니 가짜는 아닌 거 같았다. 사람 키만 한 불길이 관람객들을 집어삼킬 듯 혀를 날름거렸다. 관람객들은 뭘 보여 주나 싶어 눈을 반짝이고 있다가 때아닌 봉변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우왕좌왕했다.
“불이야!”
“아이고, 사람 살려!”
단상 위의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길 한 번에 사람들을 향해 무섭게 다가오던 불길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소리치던 사람들은 도망치려다 멈춘 자세로 뻘쭘하게 단상을 바라봤다.
“거참. 환상이에요, 환상. 환상 마법 아시죠? 놀라시기는.”
코웃음 친 마법사단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얼굴만 닮은 줄 알았더니 말투도 비슷했다. 아무래도 루카랑 가까운 친척이 아닐까 싶었다. 저 말투를 듣고 자란 어린 루카가 지금의 시건방진 루카가 되지 않았을까.
옆에 서 있던 세비스가 실비아에게 속삭였다.
“어쩐지 저번에 봤던 옥장판 사장이랑 똑같이 생겼네요? 붉은 머리는 다 저렇게 재수 없는 면상인가.”
“쉿….”
실비아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세비스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건방진 말을 누가 들을까 겁이 나서였다.
다시 단상을 바라보니 마법사단장이 목을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풀며 손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우리 제국민 분들이야 엘리셔스 제국의 마법사단이 얼마나 막강한지 잘 아실 테고. 국외에서 오신 분들은 아직 잘 모르시잖아요? 그러니 마법을 좀 더 보여 드리죠.”
그가 손을 까딱하자 대기하고 있던 은색 로브 중 하나가 빛나는 돌을 건넸다. 실비아는 그게 뭔지 바로 알아봤다. 섬에서 루카가 썼던 마력확장석과 모양이 똑같았다. 크기가 더 큰 걸 보니 더 효력이 높은 물건 같았다. 방금도 엄청났는데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 주려고 마력확장석을 쓰는 걸까?
마력확장석을 으스러트릴 듯 쥔 그의 몸에서 붉은 마나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루카 때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붉은 마나로 둘러싸인 마법사단장은 마치 불길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에 관람객들은 숨죽여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실비아도 루카가 하는 걸 한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넋을 놓고 그를 구경했다.
맑고 화창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그러더니 곧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날씨를 바꾸는 마법인 걸까?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가 우르르, 쾅쾅 울리더니 곧 멀리서 뭔가가 다가오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뭔 소리야. 커다란 비행기가 오는 소리 같네?’
기대 반 불안 반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이들의 눈에 곧 경외와 공포가 들어찼다. 불타는 유성들이 구름을 뚫고 맹렬한 기세로 낙하했다. 관람객들은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벌벌 떨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유성이야!”
“엘리셔스 제국 멸망의 날이야! 신이시여!”
‘시발? 저건 메테오잖아. 오늘이 게임 마지막 날인가?!’
실비아는 뻣뻣하게 굳어 다가오는 유성들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광경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곁에 서 있던 세비스가 유성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곧 비처럼 내린 유성우는 여기저기 광장에 매다 꽂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유성은 사람들을 피해서 저 멀리 공터에 꽂혔을 뿐 아니라 바닥에 닿자마자 곧 사르륵 실체를 잃고 사라져 버렸다.
‘이것도 환상 마법이구나! 너무 실재처럼 보여서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났어.’
실비아가 알아차린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관람객들도 서서히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얼떨떨한 표정이 됐다. 단상 위를 바라보자 만면에 미소를 띤 마법사단장이 효용을 다해 회색이 되어 버린 마력확장석을 은색 로브에게 건넸다. 그는 곧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환상 마법이라고 했잖아요. 기억들 안 나시나 보네?”
퀘스트창에는 마법사단장이 거들먹거리는 성격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이건 거들먹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대놓고 ‘나 강해요, 재수 없죠?’ 하는 거 같은 마법사단장의 모습에 실비아는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나, 저 사람한테 책을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