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으, 괜찮아.”
“아, 완전 빨개졌어. 어떡해요.”
세비스가 얇은 손목을 쥔 채 걱정했다. 몸이 자라며 손도 많이 커진지라, 실비아의 손목이 한 줌 거리처럼 보였다. 세비스가 축제 구급지원부에 찾아가야겠다고 하자 실비아가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탈탈 털었다.
“그 정도는 아냐. 그냥 잠시 손목이 아팠어. 봐, 금방 멀쩡해졌네.”
“그래도…. 죄송해요.”
세비스가 머리통에 달린 귀를 축 내린 채 침울해했다. 저 귀가 저렇게 힘없이 쳐질 수도 있는 거였구나. 세비스의 귀가 쳐진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복슬복슬하고 탐스러운 귀에 눈독을 들인 실비아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내리고 있는 세비스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은근슬쩍 귀도 살짝 건드리는 순간 세비스가 파드득 몸을 떨더니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아, 실비아 님. 귀는 건드리면 안 돼요.”
“응? 머리는 되는데 귀는 안 되는 거야?”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세비스가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앞서갔다. 실비아는 급히 뒤따라가며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도 귀를 만진 적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땐 이런 반응이 아니었었다. 인제 와서 왜 만지지 말라고 하는 걸까. 살짝 아쉬웠지만, 귀 주인이 귀를 건드리지 말라니 어쩔 수 없었다.
황궁으로 가는 길목 중간에 노점에서 커다란 사탕을 사서 하나씩 입에 문 둘은 시끌벅적한 대로를 산책하듯 걸었다. 요새 인턴 한다고 바빠서 집에선 잠만 자기 바빴더니 세비스랑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하듯이 무심결에 세비스의 팔짱을 끼고 말을 걸었다. 그녀가 갑자기 팔짱을 껴 오자 세비스는 크게 움찔했지만 뿌리치진 않았다.
“황실에서 일하는 건 어때? 인턴 일이 바빠서 너한테 신경을 못 썼네.”
“아…. 괜찮아요. 다들 맛있게 먹어 주시고 근무 시간도 적당하고요. 그리고 황실 안에 수인 사용인들이 드물게 있어서 조금 친해져서 좋아요.”
세비스가 수줍은 얼굴로 사탕을 할짝거렸다. 실비아는 앞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수인들도 있다니 적응은 쉬웠겠네. 아, 그러고 보니 늑대 왕국은…. 가긴 가야 할 텐데.”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실비아 님이 충분히 힘을 기르신 뒤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성체가 되어야 하고요.”
수인 얘기를 하다 보니 잊고 있던 늑대 왕국이 떠올랐다. 게임에 빙의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늑대 왕국 입장권을 받지 않았던가? 그때만 해도 세비스가 남주라고 생각했었지. 지금까지 세비스의 상태 창이 안 뜨는 걸 보면 단순 메인 퀘스트 중 하나인 거 같긴 하지만…
실비아는 시선을 돌려 세비스의 표정을 살폈다. 늑대 왕국 얘기가 나오자 그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자신은 게임 하느라 바빠 늑대 왕국을 잊고 있었지만 세비스는 한시도 그곳을 잊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이제 사탕을 든 손을 내린 채 한숨만 연거푸 내쉬고 있었다. 세비스의 기분이 나아질 수 있게 실비아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성체. 그래, 말 나온 김에 말인데, 너 거의 다 자란 거 같아.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성체가 되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어요. 성체 의식을 받지 않은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 정도로 몸이 자란 걸 보니 자연적으로 성체가 될지도 모르죠.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요.”
“이 장소에서 갑자기 성체가 되면 옷은 어떡해. 다 찢어지면 곤란하겠다!”
헐X처럼 옷이 다 찢기려나? 짓궂은 생각을 한 실비아가 키득거렸다. 그러나 세비스가 전혀 받아 주지 않자 머쓱해하며 웃음기를 바로 거뒀다.
“그러진 않을 거예요. 저번에 섬에서 돌아왔을 때도 바로 변한 게 아니라, 깊은 잠을 자고 난 뒤에 몸이 자랐었거든요. 이번에도 아마 큰 충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대화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황궁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붉은색 제복을 입은 경비대장이 관람객들을 한 명씩 일일이 검사했다. 황실 개방 축제이니만큼 수상한 이들을 솎아내기 위함이었다. 실비아네는 제국민 등록증을 보여 준 뒤에 간단한 몸수색을 받고 입구를 통과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관람객들이 마치 학년별 줄 서기처럼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실비아는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세 번째 줄 끝에 섰다. 안내를 들어 보니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마법석으로 만든 확성기를 든 안내인을 따라다녀야 하는 거였다. 거의 몇십 명씩 우르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안내인이 허락하는 장소만 가야 한다니. 이래서야 황궁을 둘러보며 림보를 찾아본다는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낭패였다.
“자자, 다들 대열 이탈하지 마시고요. 이탈하는 순간 목숨은 보장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줄 서서 구경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인이 확성기에 대고 살벌한 경고를 날렸다. 대열의 옆을 보니 기사가 삐딱하게 선 채 날카로운 칼을 검집에 넣었다 뺐다 하며 관람객들에게 말없이 위협을 가했다. 입구에 서 있던 화려한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달리 그의 갑옷은 뭔가 가짜 같은 어중간한 색이 돌았고 품행도 방정맞았다. 자세히 보니 황실 기사단의 문양도 갑주에 없었다. 아무래도 축제 인원이 부족한 바람에 용병을 쓴 게 아닌가 싶었다.
‘축제 때문에 관람객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조치긴 하겠네. 대부분 귀족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사들을 관람객 무리마다 배치할 순 없을 테니까 말이야.’
용병은 기사도가 있는 기사들과 달리 사람 목숨을 더 파리 보듯 할 터였다. 실비아는 한껏 쫄아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둘은 웅성거리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총총걸음을 걸으며 안내인을 따라갔다.
불만도 잠시, 황궁 구경은 무척 즐거웠다. 바닷가마을에서 수도를 처음 올라왔을 때도 이런 별천지가 있냐고 생각했는데, 황궁은 수도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소이니만큼 눈을 두는 곳마다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다. 특히 황궁엔 하얀색 건물이 많았는데, 새로 지은 것도 아닐 텐데 얼룩 하나 없이 찬란했다.
개방된 장소는 황가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전시용으로 비워 놓은 크리스털 대궁과 도서관, 그리고 사용인들이 주로 기거하는 기숙사였다. 몇 군데 개방되지 않았지만, 건물 하나하나가 으리으리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안내인은 저 멀리 개방되지 않은 푸른 궁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는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저하가 처음 두 발로 걷게 되신 날을 기념하여 지은 블루다이아몬드 궁입니다. 황제 폐하 내외께서 황태자 저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건 다들 알고 계시죠?”
“예!”
실비아네 빼고 관람객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기가 처음 두 발로 걷는 걸 기념해서 궁을 지었다니, 외동아들 사랑이 대단하긴 한가 싶었다. 안내인은 목소릴 일부러 낮게 깔며 저곳을 함부로 얼씬거렸다간 큰코다칠 테니 조심하라고 언질을 주었다. 그 말 외에는 황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다른 건물의 역사에 대한설명으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황가를 언급하는 게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설명이 끝나고 관람객들은 안내인을 따라 한적한 궁 안을 걸었다. 화려했던 건물들을 지나 다소 투박해 보이는 건물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안내인은 딱히 안내할 생각이 없는지 그 건물을 스쳐 계속 걸었다.
히잉-!
행렬을 뒤따라 걷던 실비아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딘가 익숙한 소리였다. 어, 방금 말 울음소리가 들렸던 거 같은데? 실비아가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서 있던 용병기사가 칼집에 있던 검을 또 넣었다 뺐다 하며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침을 꿀꺽 삼킨 실비아는 용기 내 앞서가던 안내인을 불렀다.
“저기, 안내하시는 분! 저기요.”
“네? 무슨 일이시죠.”
“저 건물은 어떤 곳인가요? 궁금해서요.”
실비아가 투박해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자 안내인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혀를 찼다.
“쯧, 저긴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넘어간 겁니다. 오늘 좋은 거 보러 오신 거잖아요? 어서 가시죠.”
“그래도! 궁금해요. 알려 주세요.”
어쩐지 절실해 보이는 실비아의 말에 안내인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흠. 저긴 감시소예요. 바깥에 있는 시설로 치면 구치소라고나 할까요? 황궁 내에서 잘못을 저지른 이를 가둬 두는 곳이죠. 이제 의문이 해결되셨겠죠.”
안내인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전 실비아가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말 울음소리가 저기서 들린 거 같은데 이대로 넘어갈 순 없었다. 혹시나, 아니겠지만 림보일 수도 있으니까.
“저기, 혹시! 저기에 동물도 가두나요?”
“동물요? 음, 드물게 가두기도 합니다. 이제 질문은 더 안 받겠습니다.”
안내인이 손목시계를 힐끗 보더니 야멸차게 발길을 돌렸다. 실비아가 다시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옆에 서 있던 세비스가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이상 묻지 말죠. 표정을 보니 물어봐도 더 알려 줄 거 같지 않아요.”
“그래도….”
관람객 무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있던 실비아네를 용병기사가 빨리 움직이시라고 채근했다. 존댓말이었지만 다그치는 기세가 흉흉했다. 림보가 있을지도 모를 의심스러운 건물을 발견했는데, 제대로 확인도 못 하고 가야 한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대열을 오래 이탈했다간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었기에 억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대열에 합류한 실비아는 고개를 돌려 우중충해 보이는 감시소를 바라봤다. 동물도 가둔다니, 순간 희미하게 들렸던 말 울음소리는 혹시 림보가 아닐까? 근데 걔가 잘못을 저지를 애가 아닌데. 하지만 혹시나 림보가 맞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