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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06화 (206/372)

206화

“불 꺼 줘.”

세비스가 피식거리며 웃더니 소파 옆에 있던 전등 버튼을 껐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고요해졌다.

‘으음, 씨앗도 확인해야 하고 지력도 얼만지 확인해 봐야 하는데….’

내일 하지 뭐…. 실비아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잠시 후 거실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 * *

“실비아 님, 빨리 일어나세요!”

“아! 어어. 잠시만 잔다는 게 푹 잤네.”

세비스가 몸을 흔들자 실비아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시계를 보니 딱 아침 식사할 시간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실비아는 샤워를 하고 세비스가 차려 준 아침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몇 시부터 황궁이 개방돼? 이 시간에 가면 좀 이르지 않나?”

“가을이잖아요. 외투 좀 사려고요.”

외투라, 안 그래도 요새 날씨가 좀 선선해지긴 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깜빡 잊고 하지 않은 얘기를 꺼냈다. 공연에 참여해야 해서 오후엔 바빠질 것 같다고 하자, 세비스가 힘이 빠진 듯 눈썹을 처량하게 내렸다.

“하아, 온종일 같이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워요.”

“휴, 그러게. 나도 이거 예정에 없던 일정이야. 뭔 놈의 인생이 이렇게 빡빡하게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실비아가 한숨을 흘리자 세비스가 음식을 한 접시 더 가져다줬다. 실비아는 우울해하다가도 맛있는 걸 배부르게 먹으면 기분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두 달간 같이 산 덕분에 척하면 척이었다. 덕분에 배가 든든해진 실비아는 다시 씩씩해져서 방으로 들어가 외출 준비를 했다.

‘아, 맞다. 씨앗이랑 지력 확인해야지.’

실비아는 상태 창을 켰다. 오늘도 단어장을 뜯어 먹어서 지력은 470. 이 정도면 다음 주 주말쯤에는 600 근처까지 가지 않을까 싶었다. 700이 되면 미적분 버금갈 정도로 복잡한 수식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걸까? 그 전에 마법진을 완전히 파훼하면 더 좋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상태 창을 끈 그녀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루카의 씨앗이 6개 늘어나 있었다. 메시지는 귀찮아서 그냥 보지 않기로 했다.

‘딱히 공략에 도움 되는 것도 아니고. 획득 메시지 읽기 귀찮아.’

확인을 마친 그녀는 옷장을 살폈다. 루카가 사 준 예쁜 옷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어 그녀를 흐뭇하게 했다.

‘오늘 좀 특별한 날이니까, 예쁜 옷을 입어 볼까!’

실비아는 루카가 사 준 옷 중에 활동성 좋으면서 차분해 보이는 푸른색 원피스를 걸쳤다. 거울을 보니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우아했다. 좀 예쁜 거 같기도 하고? 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벽에 기대서서 실비아를 기다리고 있던 세비스가 #입을 멍하니 벌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실비아 님…. 정말 예뻐요.”

“그래? 이 옷이 좀 예쁘긴 하지.”

“아뇨. 실비아 님이 눈부셔요.”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뭐 얻을 게 있어서 그러나? 평소엔 영악한 말만 골라 하는 세비스가 오늘따라 좀 이상해 보였다. 실비아의 떨떠름한 시선이 세비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멍해져 있던 그는 실비아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자 급하게 헛기침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을 열며 실비아를 뒤돌아봤다.

“빨리 가죠. 이제 옷 가게 열 시간 다 됐네요.”

“그래.”

옷 가게에 도착한 둘은 고를 것도 없이 쇼윈도에 있는 마네킹에 걸린 바바리코트를 사기로 했다. 돈이 많아지니 고민 없이 원하는 걸 바로 골라도 돼서 좋았다. 실비아는 연한 베이지색, 세비스는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골랐다. 체격이 많이 커진 세비스는 예전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옷을 샀다. 가격표를 떼고 바로 입으니 점원이 옷맵시가 좋다며 세비스를 칭찬했다.

“어머, 여자친구분은 좋으시겠어요. 남자친구분 외모면 무슨 옷을 입혀도 그림같이 잘 어울리겠어요.”

“예? 아니….”

어느새 그녀의 곁에 선 세비스가 부인하려는 실비아의 말허리를 자르고 대신 대꾸했다.

“여자친구 아니에요.”

“아, 그러시구나.”

“제 아내입니다.”

위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실비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어제부터 이상하다 싶더니, 얘가 뭘 잘못 먹은 게 맞구나! 실비아는 기가 막혀서 벨벳 의자에 앉아 있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뭐!”

그때 실비아의 어깨를 세비스가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눈치 빠르게 고개를 돌려 보니 ‘결혼 장려의 날을 맞아 신혼부부 할인이벤트’라는 팻말이 보였다. 혼수용품도 아니고 무슨, 옷 가게에서 신혼부부한테 할인을? 그러나 할인이란 자고로 받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받아야 하는 법. 실비아는 순간 입을 꾹 닫았다가 세비스의 손등을 찰싹 치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 참. 여보, 부끄럽게 그런 말은!”

“어머, 두 분이 참 잘 어울리세요.”

직원이 손뼉을 짝 치며 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직원의 눈치를 보며 간드러지게 웃은 실비아는 세비스의 팔짱을 꼈다. 결국 뻔뻔한 연기 덕에 파격 할인을 받고 옷을 구매할 수 있었다. 세비스는 실비아의 귓가에 ‘돈 굳었네요.’라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돈이 많아졌어도 알뜰한 성격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었다.

가게를 나온 둘은 마차를 타기 전, 단풍이 살짝 들기 시작하는 가로수 앞에서 바바리코트 옷깃을 펄럭이며 잠시 가을 분위기를 만끽했다.

‘어머, 잠깐?’

분위기를 실컷 누리고 황실로 가는 마차를 탄 실비아는 둘의 옷이 커플 옷이란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색이 달라서 다른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신혼부부 할인을 괜히 해 준 게 아니었다. 같은 패턴의 커플 옷이었던 것이다.

‘아, 이상한 오해를 받겠는걸. …뭐 상관없지. 오늘은 딱히 마주치면 곤란한 사람이 없으니까.’

루카는 주말에 일이 생겨서 실비아를 평일에 보러온 거라고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 이후로 노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어, 그가 언제쯤 수도에 올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섭섭했지만 바쁜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애써 이해하려던 실비아는 순간 제 뻔뻔함에 헛웃음 쳤다.

‘나도 참 낯짝도 두꺼워. 무슨 둘도 없는 연인 사이처럼 섭섭해하고 있어. 섭섭해할 틈도 없이 루카랑 뒹굴었으면서. 그래도…. 지금쯤 뭐 하고 계시려나?’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실비아는 아련한 눈으로 단풍 진 가로수를 구경했다. 노란 은행나무 잎과 비슷한 노엘의 금발 머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집에 가면 편지를 다시 보내 봐야겠어.

생각을 마친 그녀는 다시 제 옷과 세비스의 옷을 번갈아 봤다. 커플 옷이긴 하지만 이미 입어 버린 거, 환불도 어렵고 어쩌겠나. 축제 날 세비스랑 커플 옷을 입는다 해서 탈 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실비아의 시선이 왔다 갔다 하자 세비스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이거 커플 옷이야. 알고 있었어?”

실비아의 물음에 세비스가 순간 코웃음을 치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고 있었어요. 신혼부부 할인받아서 산 건데 당연하죠.”

그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실비아는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었다. 신경 쓰는 건 자기뿐인 것 같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얘는 싼 거라면 철도 씹어 먹을 애긴 하지. 형편이 넉넉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네.’

한참을 달린 마차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큰 대로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던 실비아는 순간 행인과 부딪칠 뻔하다가 세비스가 잡아 주는 덕에 봉변을 면했다.

“실비아 님, 조심하세요.”

“아아, 고마워. 사람이 정말 많네.”

옷을 훌훌 턴 실비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살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황실 개방 날을 맞아, 제국민은 물론 타 대륙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사람 구경에 여념이 없던 실비아는 평소에 본 적 없던 무협지에서나 나올 거 같은 동양풍 옷을 걸친 사람들과 사막의 이교도 같은 옷차림의 사람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러 가지 요란한 옷을 보니 엘리셔스 제국 밖에는 어떤 나라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우, 아냐. 취소, 취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지. 나 하나도 안 궁금해. 피곤하니까 제발 공략 캐릭터는 이 제국 안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실비아는 방금 한 생각을 취소하면서 대답 없는 시스템을 향해 절실히 부탁했다. 타 대륙을 가게 되는 순간 여러 사람이 피곤해질 테니, 공략은 제발 엘리셔스 제국 안에서만 했으면 했다. 역시나 고요 속의 외침일 뿐이었지만.

실비아는 한숨을 흘리며 타 대륙 사람들을 살폈다.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혹시나 모를 타 대륙 공략 캐릭터에 대한 망상이 계속 이어졌다. 야만인이나 사막의 전사가 공략 캐릭터면 아주 곤란한데. 난 거친 남자는 취향이 아냐! 내 취향은 낮엔 부드럽고 밤에만 거친…. 그때, 상념에 빠진 그녀의 팔을 세비스가 끌어당겼다.

“실비아 님, 뭐 하세요? 빨리 가야죠.”

“어? 아아, 맞아.”

실비아가 굼뜨게 반응하자 세비스가 시간 없으니 빨리 구경해야 한다며 그녀를 계속 끌고 갔다. 그녀가 멈출 요량으로 발에 힘을 줘 봤지만 쉽지 않았다. 몸집이 커지더니 전보다 힘도 더 세진 모양이었다. 실비아의 손을 잡은 채 앞만 보고 걷던 세비스는 그런 그녀의 @움직임은 눈치채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엔 공연한다고 같이 놀지도 못 하잖아요. 어제 말한 대로 혹시 림보가 있나 찾아보기도 해야 하고요. 황궁은 엄청 넓으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거예요.”

“아야! 세비스, 잠깐.”

팔이 아렸던 실비아가 세비스를 불러세웠다. 아무 생각 없이 뒤돌아본 세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비아가 제가 잡은 손목을 감싸 쥔 채 신음하고 있었다. 세비스는 전보다 힘이 세진 걸 까먹고 너무 세게 잡았단 걸 깨달았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실비아의 손목을 잡고 주물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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