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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05화 (205/372)

205화

“커헉…. 반지요. 루카 님이 준 반지가 있으니 그 레이저 반지는 잠시 액세서리함에 넣어 놨죠.”

“아하.”

잘 먹던 과일이 목에 턱 걸려 헛기침한 실비아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한쪽 눈썹을 꿈틀대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루카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실비아의 손을 놔주었다.

어우, 루카가 준 반지만 끼고 있길 잘했네. 실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둑어둑해진 도시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에 비치는 그녀의 눈 밑이 어느새 퀭했다. 일하다 나와서 놀이기구도 실컷 타고, 마차 안에서 루카가 탄 건지 자신이 탄 건지, 하여튼 서로 실컷 탄 탓에 체력이 다 축난 것이다.

“우리 자기 얼굴이 퀭해졌네. 다음에 만날 땐 보양 음식이라도 먹어야겠어.”

마차가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루카는 실비아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세비스가 실비아네 집에 있단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집까지 들어오려고 하진 않았다. 실비아와 실컷 데이트한 기분 좋은 날에 말씨름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코를 킁킁대며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별의별 거 다 들어있는 훌륭한 손목시계를 가진 루카 덕에 체취는 완벽히 처리할 수 있었다.

‘세비스는 개코니까, 굳이 낯선 냄새를 맡게 할 필요는 없지.’

미니 백에서 탈취제를 꺼내 한 번 더 칙칙 뿌린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나 왔어.”

“오셨어요.”

눈 밑이 시커메진 실비아가 현관문을 열자 세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발을 벗는 그녀를 세비스가 문 앞에서 맞이했다. 그는 어깨에는 얇은 담요를, 이마엔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뭐야? 추워서 그래?”

“며칠 전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네요. 몸살이 오려나.”

세비스가 힘없이 대답하며 소파에 털썩 누웠다.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 세비스의 옆에 실비아가 끼어 앉으려 시도했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그의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밀자 세비스가 펄떡 뛰어오르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 실비아 님! 손이 어디로 오는 거예요.”

“어? 아니. 나도 좀 같이 앉자고….”

머쓱해진 실비아는 갈 곳을 잃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조금 실례했나 싶었다. 그리고 살짝 섭섭해졌다. 이상한 의도를 가지고 만진 것도 아니고 그냥 치우려고 한 행동인데 저렇게 화를 내다니. 손을 만지작거리던 실비아가 조심스레 눈을 들어 보니 세비스의 얼굴이 목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는 팔걸이에 기댄 채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미안. 조심할게.”

“…아뇨. 조심할 필요까진 없고요.”

세비스가 한숨을 흘리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실비아의 손이 엉덩이에 닿는 순간 기분이 이상해져서 바로 정색해 버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제 반응이 좀 과했나 싶었다. 표정을 다시 부드럽게 푼 그는 충동적으로 실비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순간 움찔했던 그녀는 세비스의 화가 풀어진 것에 안도하며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예민한가 봐요.”

“내일 축제 갈 수 있겠어?”

실비아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붉은 눈을 나른하게 떴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조곤조곤 들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질색했다가 먼저 다가가서 만져 달라는 듯 눕다니.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제 마음을 자신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마음대로 구는데도 아무 말 않고 다 받아 주는 제 주인의 다정함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비스는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실비아가 눈치챌까 봐 겁나 진정하려 노력했다. 그래도 무릎에 기댄 머릴 치우고 싶진 않았다. 실비아가 축제에 갈 수 있냐고 한 번 더 묻자 세비스가 무릎에 얼굴을 살짝 비비며 대답했다.

“이러다가 또 멀쩡해지더라고요. 실비아 님이 계속 쓰다듬어 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아? 그래. 음, 이렇게 쓰다듬어 주면 되겠지.”

세비스의 묘한 말에 실비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얘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거지? 설마…. 세비스의 의도를 가늠하던 실비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가족 같은 세비스에게조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다. 처음엔 세비스를 남주라고 의심했었지만, 두 달이 다 되어 가도 상태 창이 뜨지 않으니 아닐 확률이 높아 보였다.

‘세비스는 그냥 옆에서 보조하는 인물이 아닐까.’

실비아는 별안간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처음에 세비스를 남주라고 단정하고 대뜸 몸을 더듬었었지. 그때는 게임에 막 빙의한지라 열정이 넘쳤고 되는 건 다 먹어 보자(?)는 절실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글쎄…. 게임에 빙의한 지 두 달 가까이 되니 매일 같이 보는 세비스가 남주 중 한 명이라면 좀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룸 오두막집에서 같이 살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봤는데 이런 세비스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이 짓 저 짓을….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서 숨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실비아는 지금 배부른 변태 상태라 공략 캐릭터는 블루까지면 충분했다. 그냥 세 개만 모으고 끝내면 안 되는 걸까? 어째서 상자에는 다섯 개의 공간이 있는 건지. 진 엔딩을 봐야 천국에 가니 어쩔 수 없이 남주를 더 찾아야 했지만, 과식도 보통 과식이 아니다 싶었다.

‘이러다 배 터진다고. 변태도 휴식이 필요해….’

실비아는 잡생각을 하며 세비스의 머리를 관성적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에 나른해진 세비스가 무심결에 베개를 고치듯 그녀의 무릎을 잡았다.

“실비아 님, 오늘 제국센터에 갔다 왔어요.”

“아, 그래. 센터직원이 뭐래?”

잠시 림보를 잊고 있었다. 실비아는 루카가 조언해 준 대로 림보의 일련번호를 조회하러 센터를 가려고 했지만, 인턴 근무로 바빠 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세비스에게 대신 가 달라고 부탁했었다.

“하, 그게…. 별다른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음, 이상하다. 아니야…. 우리도 바닷가마을에서 주마장과 세마장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네.”

“최소한 이런 아파트엔 살고 있지 않다는 거죠. 노엘 님의 별장에서처럼 마구간이 있고 세마 할 공간이 충분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때 말 농장 직원이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도 했었고요.”

세비스의 말대로 아파트나 기타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마구간이 집에 없기에 공동 주마장이나 세마장을 이용해서 일련번호에 기록이 남아 있을 터였다. 세비스는 미간을 좁힌 채 좀 더 세심하게 추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바닷가마을이야 길가에 세워 두면 되고 강가에서 림보를 씻기면 되니까 상관없었지만, 수도는 모든 게 행정화 돼 있잖아요. 아무 곳에 세워 두거나 하면 벌금 딱지를 받을 텐데. 데려간 사람은 림보를 타고 다니진 않았나 봐요.”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니, 원래 타고 다니던 말이 있었겠지. 그럼 대체 왜 데려간 거지?”

실비아가 의문을 표하자 세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말 농장 직원이 림보가 먼저 좋아서 따라갔다고 했었던 거 같아요.”

“말이 되나, 그게…. 먹을 걸 좋아하는 애긴 한데 음식으로 유혹했다고 졸랑졸랑 따라갈 애는 아닌데.”

“아, 맞다. 제가 신문에 림보 찾는 광고를 냈었잖아요. 연락이 왔었거든요? 그땐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었는데…!”

세비스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편지를 하나 가지고 왔다. 세비스의 광고를 본 사람이 보낸 거였다. 편지를 건네받은 실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궁에서 림보를 봤다고 적혀 있네? 거긴 평소에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잖아.”

“그래서 저도 헛소리라 생각하고 무시했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내일 황실 개방 축제 때 유심히 살펴봐야겠어요.”

“넌 타코야키 요리사로 황궁에서 일하고 있잖아. 뭐 이상한 건 못 봤어?”

실비아의 말에 세비스가 뒷덜미를 매만졌다.

“글쎄요. 저는 딱 허가된 구역만 출퇴근했었어요. 주로 별궁으로 갔었죠. 별궁 정원이라거나 파티장이요. 외부인력이라 아무 곳이나 다 들어갈 순 없더라고요.”

어쩐지 개방 축제에 같이 놀러 가자고 졸라댄 이유가 있었다. 황실 타코야키 요리사라고 해도 제한된 구역만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비스는 평소에 구경하지 못한 황궁 이모저모를 마음껏 구경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할 일을 생각했다. 내일 해야 할 게 정말 많았다. 우선 혹시 모르니 황실의 개방 된 장소는 다 들러 림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볼 것. 그 후에 마법사단장을 찾아가서 퀘스트를 완수하고, 오후에 있을 공연 리허설에 참여한 뒤에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저런…. 할 게 너무 많아. 쉬는 날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다니.’

한숨을 내쉰 실비아가 소파에 털썩 누웠다. 세비스는 담요를 접어 실비아의 머리에 받쳐 주었다. 그러곤 고개를 내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실비아 님이 쓰다듬어 주니까 다 나은 거 같아요. 몸이 이제 멀쩡해요.”

“엄마 손은 약손인가 봐.”

“예?”

이런 속담은 개발자가 안 넣어 놨나 보다. 세비스가 못 알아듣는 거 같자 실비아는 손사래를 치며 눈을 감았다.

“아냐. 아우, 피곤해.”

“실비아 님, 방에 들어가서 자요.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요.”

“잠시만 누워 있게. 만약 내 입이 돌아가면 네가 쓰다듬어 주면 되잖아.”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세비스의 뺨이 발그레해졌지만, 실비아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알지 못했다. 씻고 자야 하는데. 잠시 눈만 붙여야겠다, 눈만…. 실비아의 의식이 저 멀리로 떠나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세비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불을 들고 와 실비아의 위에 덮고 토닥거려 주었다. 세비스가 방에 들어가기 직전, 잠든 줄 알았던 실비아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아아, 맞다. 세비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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