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옷 갈아입고 나왔네. 많이 기다렸지? 아버지 친구분을 오랜만에 봬서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졌어.”
많이 기다린 건 아니었다. 기다린다는 생각도 못 하고 블루랑… 했으니까. 지금 눈이 마주치면 흔들리는 눈빛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딴 곳으로 던지며 말을 돌렸다.
“인턴인데 이렇게 마음대로 퇴근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돼.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허락받았으니까.”
루카가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허락을 받은 건지 협박을 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 놀이동산을 걸었다. 그래도 퇴근을 일찍 한단 건 어쨌든 신나는 일이라서 그녀의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루카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그는 예상과 달리 놀이동산 입구가 아닌 안으로 걸어갔다. 응?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가네? 실비아의 눈에 의문이 가득 들어찼다. 신난 듯 휘파람을 가볍게 분 루카는 노점에 있는 반가면을 두 개 샀다. 그는 토끼 가면을 실비아의 얼굴에 씌워 주고 자신은 표범 가면을 썼다.
“자, 이렇게 하면 우리 인턴을 아무도 못 알아보겠지.”
“가면을 쓰고 놀이동산에서 놀자고요?”
실비아의 물음에 산뜻하게 미소 지은 루카가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응. 어릴 때 이후로 놀이동산은 오랜만이야. 오늘은 일하지 말고 여기서 나랑 놀아 줘.”
“으음, 가면을 쓴다고 직원들이 저를 못 알아보진 않을 텐데….”
“좀 그런가?”
루카는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렸다. 논다고 신났다가 다시 풀이 죽은 그 모습이 서글퍼 보였다. 실비아는 가면을 고쳐 쓰곤 다시 루카의 손을 잡았다.
“아녜요. 놀이동산은 넓으니까 동물부서만 안 들리면 어딜 가도 상관없을 거예요. 자, 어디 가고 싶어요?”
“너랑 함께라면 어디든지.”
둘은 가면을 쓴 채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걸었다. 어른이지만 가면을 쓰니 아이처럼 웃고 떠들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관람객들 중 몇몇이 그들과 비슷하게 가면을 쓴 게 보였다.
어디를 갈지 이정표를 보며 고민한 둘은 우선 특급열차를 탔다. 소리 지르며 정신없이 열차를 타고 나와 보니 루카는 멀쩡한데 이상하게 실비아의 머리만 수세미처럼 엉망이 되었다.
“머리가 왜 이래. 쥐어뜯었어?”
“머리를 풀고 탄 게 문제였나 봐요.”
“아, 완전 웃기네.”
루카가 키득대자 실비아가 그를 가자미눈으로 째려봤다. 열차 다음엔 범버카, 회전찻잔,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놀이기구를 탔다. 현실의 놀이동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놀거리가 다양했다. 놀다 보니 오히려 루카보다 더 신이 난 그녀는 다음을 외치며 씩씩하게 걸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어디 보자, 어딜 안 들렀더라.”
“음…. 귀신의 집은 어때?”
루카의 제안에 실비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귀신이라니, 생각만 해도 별로였다. 그녀의 무서워하는 표정에 루카가 짓궂게 놀렸다.
“쫄았어? 던전 공략도 해 놓고 이런 걸 무서워하다니. 아직 아기네.”
“네? 쫄긴, 누가 쫄아요? 갑시다, 가요!”
루카의 도발에 볼을 부풀린 실비아는 당당하게 귀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어깨에 한껏 들어갔던 뽕은 으스스한 내부로 들어오자 푸쉬쉬 숨이 죽었다.
꺄아아, 히이이! 음산한 비명 소리에 그녀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연출된 효과음이란 걸 알고 있는데도 무서웠다. 실비아가 오돌오돌 떨자 루카는 더욱 즐거워했다. 그는 실비아를 뒤에서 껴안은 채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비아, 누가 너 잡으러 오는 거 같은데? 같이 가재.”
“어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루카는 장난으로 한 말이겠지만 직접 귀신과 마주친 적이 수차례인 그녀로서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루카의 말에 질색하며 고개를 저은 그녀는 혹시나 연출이 아닌 진짜 귀신이 있나 경계했다. 그냥 무서우니 들어오지 말자고 할 걸 그랬나. 루카가 놀려 대는 바람에 울컥해서 들어와 버렸다. 그때, 야금야금 걷던 그녀의 발밑이 덜컹하고 움직였다.
“앗!”
“장치야 장치. 쫄기는.”
실비아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자 루카가 그런 그녀를 심드렁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 후에 어김없이 이어지는 숨죽인 웃음소리. 그 얄미운 모습에 가면 아래에 숨겨진 실비아의 표정이 점점 뾰로통해졌다. 참나, 저번에 온실에서 날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좋아하는 여자가 놀라면 걱정해 주진 못할망정 즐거워하다니!
그녀가 놀랄수록 루카는 신나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자극당해 귀신의 집에 들어왔지만 사실 실비아도 꿈꾸던 장면이 있었다. 그녀가 ‘어머 어머, 어떡해!’하며 놀라면 그가 ‘걱정 마. 내가 있잖아?’ 하면서 듬직한 모습을 연출하는 걸 상상했는데…. 현실은 그냥 실비아가 화들짝 놀라면 루카가 놀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네….’
귀신의 집 내부는 싸늘한 분위기를 위해서인지 천장에서 냉풍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추위를 느낀 실비아가 제 팔을 쓰다듬자 루카가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실비아, 추워? 등 뒤에 귀신이라도 올라탄 거 아냐?”
“그만 놀려요! 참나….”
실비아가 어깨를 살짝 치자 루카가 또 키득거렸다. 귀신의 집은 구불구불한 미로 같았다. 벽화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바닥이 흔들렸으며 천장에서 갑자기 끈 달린 헝겊 인형이 떨어지기도 했다. 뭐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반응하는 실비아 덕에 귀신의 집 탐방이 거북이걸음이었다. 실비아의 비명 소리와 루카의 웃음소리가 귀신의 집을 여러 번 울렸다.
“아, 오늘 웃을 거 다 웃었다.”
“놀리지 말라고 했죠?!”
코너를 돈 둘은 벽 거울을 하나 발견했다. 실비아도 조금 적응이 돼서 처음에 기절할 듯이 놀라던 것과 달리 차분한 표정이었다. 루카는 실비아를 뒤에서 껴안은 채 거울 앞에서 그녀의 턱을 감싸 쥐었다.
“여기서 또 뭐가 나오려나?”
“으음….”
실비아는 꺼리면서도 거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무서운 것도 슬슬 적응이 됐으니 볼 건 다 보고 가야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거울 속의 루카가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입꼬리를 매혹적으로 올리더니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손바닥을 펼치더니 순간 그녀의 눈을 가렸다. 실비아는 시야가 어두워지자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무섭게 하지 말라고 했죠?”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또 사람을 놀리려고 그러나? 부루퉁해진 실비아가 눈을 가리는 커다란 손바닥을 잡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녕?”
루카랑 닮았지만, 확실히 다른 얼굴의 붉은 긴 머리, 루카의 형이었다. 그는 가면을 손에 들곤 실실 웃으며 거울 속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실비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만 커다랗게 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실비아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그가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오랜만이야. 실비아.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반응을 해야지?”
“사람 아니잖아요….”
한껏 쫄은 실비아가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놀이동산에서 놀다가 루카의 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실비아가 몸을 돌리려 하자 그가 조그만 어깨를 단단한 팔로 감쌌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러면 이 공간이 깨지니까.”
“왜…. 제 앞에 왜 나타난 거죠?”
실비아가 거울을 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루카와 닮은 듯 미묘하게 선이 다른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네가 내 세계랑 연결된 장소에 왔으니까. 여기는 내가 있는 곳과 이 가짜 세계의 경계선 중 하나거든. 계획한 건 아냐. 네 기운이 갑자기 뚜렷하게 느껴져서 나타났을 뿐.”
귀신의 집이 루카의 형과 연결된 곳이었다니. 어쩐지 오기 싫다 했더니 이런 재수 없는 장소일 줄 몰랐다. 그건 그렇고 왜 또 가짜니 뭐니 하는 거야. 맞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진짜 세상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나? 혹시나 그가 지옥에 끌고 갈까 봐 겁이 난 실비아는 파르르 떨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진짜고 가짜고 그런 건 흥미 없어요. 그러니 이만 놔주세요.”
“왜? 중요한 거잖아.”
“안 중요해요.”
중요한 건 지옥에 안 가는 거지, 여기가 가짜든 진짜든 별로 관심 없었다. 실비아의 단호한 대답에 그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어째서? 중요한 거야. 아주. ”
“저한테는 안 중요한데요.”
실비아가 몸을 비틀자 그가 순간 당황해 손을 놨다가 다시 어깨를 붙잡았다. 실비아가 대답 없이 거울을 통해 왜 잡냐는 눈빛을 하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대답해 줘. 이 세계가 가짜라고. 넌 유일하게 이 세계가 가짜란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플레이어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어쩐지 대화를 하다 보니 점점 긴장이 사라졌다. 실비아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즉답하자 그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쳤다.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이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다니. 넌 밖에서 왔잖아. 근데 여기가 가짜란 걸 모르겠다고? 하! 단순하게 살아서 좋겠어.”
“그럼 안 되나요?”
“…….”
거울 속 그의 입술은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왠지 ‘시발’이라는 쌍욕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의 싸늘한 눈빛에 실비아가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그는 화를 참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은 차분해져 있었다.
“그래. 지금은 즐거우니까 복잡한 생각은 하기 싫겠지. 차분히 생각해 봐. 네가 있던 세계와 이곳이 완전히 다르단 걸 곧 알게 될 거야.”
“다르다고 가짜는 아니잖아요?”
그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쩐지 그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실비아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실비아 넌, 밖에서 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