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그녀는 눈을 치켜뜬 채 손바닥으로 블루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블루는 과장되게 어깨를 감싸며 소파 반대편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아야! 왜 때려. 아프잖아. 너무해, 실비아.』
“야, 이…! 한 번만 넣어 보자면서! 혀를 그렇게 쓰면 어떡해!”
실비아가 버럭 화를 내자 블루가 뒷덜미를 쓰다듬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실비아의 눈을 피하며 다리를 꼰 채 반대편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시선을 먼 곳에 보내며 어물쩍 입을 열었다.
『한 번 맞는…데? 혀 한 번도 안 뺐잖아….』
“허…!”
이 쌔끼 이거 순진하게 봤더니 안 되겠네. 실비아가 입술을 말아 물며 고깝게 바라보자 블루가 힐끗 눈치를 보더니 변명을 시작했다.
『왜, 혀 한 번만 넣은 거 맞잖아. 휘젓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고, 음….』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너! 허리는 왜 더듬어?!”
『내가, 허리를? 더듬었어? …그랬나?』
블루가 ‘정말? 내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순진한 눈을 했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한 눈이 블루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이제 아래가 멀쩡해졌기에 당당하게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뭐?”
『혀를 넣어도 된다고 해서 넣었을 뿐이고 허리는… 기억이 안 나. 실비아, 난 인간을 잘 몰라. 이게 널 곤란하게 한 거라면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인간을 잘 모른다는 말에 실비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정말 인간을 몰라서 그런 건가? 그냥 단지 스킨십이 기분 좋아서 한 거 같기도 한데. 상태 창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인간을 모르니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여타 다른 인간 남자와 그를 같은 선상에 놓고 판단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모른다.’와 ‘가르쳐 줘.’, 이 두 문장은 만능 조미료처럼 살짝 흩뿌리기만 해도 효과가 좋았다. 실비아는 그가 별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기분이 좋아서 한 행동이라면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상태 창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뭐.’
상태 창은 블루가 인간을 모른다고 했지, 스킨십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확대 해석했다. 실비아의 표정이 풀어지자 블루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실비아, 화 풀렸어?』
“어. 뭐, 화날 게 뭐 있어. 네가 잘 몰라서 한 짓인데.”
『다행이다.』
블루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실비아는 그 꽃 같은 웃음에 뭐 아무려면 어떠냐 싶어졌다. 사실 아픈 게 싫어서 당장 진도를 나가는 걸 꺼린 거지, 정말 블루랑 스킨십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안전하기만 하다면 어서 빨리 갈 데까지 가고 싶은 건 실비아 자신이었다.
블루는 어느새 다시 실비아 곁에 다가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실비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우리 친구 사이 맞지? 네가 친구끼리는 친밀한 접촉이 중요하다고 했었잖아.』
“어? 어어….”
보통의 친구 사이에 혀를 넣고 비비진 않지만…. 조만간 섹스 프렌드가 될 테니 친구는 친구였다. 실비아는 블루의 녹아들 것 같은 미소에 순식간에 무장해제 되어 버렸다. 그녀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자 블루가 흐뭇해하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방금 한 거, 너무 좋아. 포옹하는 것보다 너랑 훨씬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앞으로도 자주 하면 안 돼?』
“뭐, 그래, 그러자.”
아무 일 없었으니 키스 정도야 괜찮을지도.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루의 아름다운 감색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매일 하고 싶어. 그럼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장소에서나 하면 안 돼. 여기서도 자주는 곤란해.”
혹시나 블루가 바깥에서 키스를 시도할까 걱정된 실비아는 단단히 주의를 줬다. 사실 바깥도 바깥이지만, 물개 우리에서도 곤란했다. 이러다가 조련사에게 들킨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외간 남자를 아쿠아리움에 몰래 데려와서 애정행각을 일삼는 정신 나간 인턴으로 엘리셔스 월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 아닌가.
블루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실비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근데 있잖아. 이거보다 더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더… 친해지는 방법?”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블루의 미소가 짙어졌다.
『난 너랑 더 친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어. 다른 것도 가르쳐 줘. 입을 맞추는 거 말고 더 친밀해지는 법이 있어?』
그야 나도 가르쳐 주고 싶지. 근데 이놈의 물개 우리에선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략 조건도 완수되지 않았는데 더 진도를 나갔다가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차마 묘사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상상한 실비아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뭐라 답할까 고민한 그녀는 일단 안 된다고 하기로 했다. 괜히 나중에 된다고 했다간 블루가 호기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
“이걸로도 충분하지 않아? 이 이상은 안 돼! 일단… 안 돼.”
『이 이상이 뭔데? 이게 끝이 아니야? 알려 줘, 실비아.』
아이고, 말실수를 해 버렸다. 예상대로 블루는 호기심이 넘쳐났다. 계속 물음표살인마 짓을 일삼는 블루 때문에 피곤해진 실비아는 끄응, 하고 신음을 내뱉은 뒤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지금은 몰라도 돼! 나중에 가르쳐 줄게.”
『칫…. 알겠어.』
블루가 다시 물개로 돌아간 뒤 실비아는 조련사가 있는 아쿠아리움 무대로 향했다. 원래는 이 정도로 오래 본체로 있진 못했던 거 같은데, 마법진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건지 블루의 본체 지속시간이 처음보다 길어졌다.
‘음, 얼떨결에 블루랑 제대로 키스해 버렸네.’
실비아는 방금 전 예상보다 화끈해졌던 입맞춤을 떠올리며 멍한 얼굴로 입술을 매만졌다. 자신이 먼저 시도하지 않으면 블루랑은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녀는 블루가 루카와 신경전을 벌였던 일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신경 줄을 건드리는 루카 때문에 블루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전에는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았으니까. 루카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라이벌의 투지를 자극한 셈이 됐다.
‘원래는 공략 조건이 완수되기 전에는 블루랑 진도를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배드 엔딩도 안 떴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건가? 아, 맞다! 진도를 나갔으니 호감도가 올랐을 텐데.’
기록 창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블루의 호감도는 방금의 진한 스킨십으로 10이 올라 총 80이 되어 있었다. 호감도가 다 오른 게 아니어도 스킨십을 할 수 있었구나. 워낙 앞의 두 사람이 개고생을 시켜서 불가능한 줄로만 알았다.
‘진도를 나가서 좋긴 하지만 조심하긴 해야겠어. 하잔 대로 끌려다니다가 또 배드 엔딩이 뜨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실비아는 순수해 보였던 평소와 달리 입을 맞추며 나른해졌던 블루의 눈빛을 떠올렸다. 호흡도 거칠었던 거 같았다. 키스를 하면서 흥분했던 걸까? 설마 서, 섰을…까. …클까? 세상에, 내가 무슨 생각을! 몰라 몰라. 그녀는 자신이 한 민망한 생각에 얼굴을 붉히고는 뺨을 짝짝 쳐 댔다. 그녀는 혹시 누가 제 표정을 봤을까 싶어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정신이 없어 블루의 아래를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 상황에서 흥분을 안 하는 인간 남자는 백퍼 고자였다. 그러나 드래곤은 신비한 종족이니 자기제어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무대에 도착했다. 실비아는 늘 하던 대로 물기 있는 바닥을 열심히 걸레질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조련사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두려움이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실비아 양. 대단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군요.”
“네?”
실비아가 되묻자 조련사가 그녀의 밀걸레를 재빠르게 가져갔다. 그는 실비아 뒤를 힐끗거리더니 걸레질을 시작했다.
“어휴, 이런 건 왜 하고 그래요. 내가 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돼요.”
“퇴근 시간은 아직 한참 남지 않았나요?”
실비아가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서 있는데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할 것도 없이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 루카였다. 실비아는 강아지가 주인을 만난 것처럼 밝게 미소 지었다.
“실비아! 빨리 짐 챙겨. 퇴근해야지.”
“퇴근요? 아직 근무 시간이 남았는데….”
“어서 가자. 이미 허락받았어.”
실비아는 어색한 얼굴로 조련사를 돌아봤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이래도 되나? 인사 평가에 안 좋은 점수를 받으면 어쩌지. 실비아가 망설이자 조련사는 그녀의 등을 살짝 밀며 가라고 재촉했다. 그는 루카의 살기 어린 눈빛을 받자 얼른 손을 떼곤 실비아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이고, 빨리, 빨리 가. 제발. 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점수가….”
“아-무 문제없으니까, 제발. 실비아 양, 내일 보자고.”
조련사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조련사 얼굴을 한 번, 입구에서 팔짱을 낀 채 입으로만 웃고 있는 루카를 한 번 쳐다봤다. 평가 점수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퇴근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조련사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한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입구로 향했다. 루카가 그런 그녀를 환영하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안기라는 뜻인 거 같은데, 조련사 앞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실비아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내려 버렸다.
그녀의 행동에 루카가 머쓱하게 제 팔뚝을 매만졌다. 다시 뒤돈 그녀는 조련사를 향해 ‘퇴근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는 황급히 루카를 데리고 무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루카 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만면에 웃음을 띤 루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