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쪽쪽 소리가 나도록 한두 번 가볍게 입맞춤한 그는 팔을 펼쳐 실비아를 으스러트릴 듯 꽉 껴안았다.
잠시 멍하니 루카에게 안겨 있던 실비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냈다. 여긴 공공장소인 데다 블루도 보고 있는데 입맞춤을 하다니! 루카의 얼굴엔 승자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 루카 님! 여기서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다시 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어.”
루카의 엄지가 아쉽다는 듯 도톰한 입술을 보듬었다. 그의 시선이 블루를 찾아 내려갔다.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도 아닌 짐승에게 보여 줄 요량으로 충동적으로 입을 맞춰 버렸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군.’
그가 손을 흔들고 떠나려고 몇 발자국 옮기는 순간 블루가 루카에게 다가갔다.
깜짝 놀란 실비아가 그를 잡으려 했지만 미끄덩한 몸뚱이를 스칠 뿐이었다. 쟤가 설마 루카를 공격하려고?
다행히 블루는 맘을 바꿔 먹었는지 밝게 웃는 낯이었다. 어쩐지 그 얼굴에 광기가 서려 있어 살짝 불길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루카의 발치까지 다가간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를 루카가 코웃음 치며 내려다봤다.
“이 물개 자식이 이제 자기 주제를 알았나 보군. 아까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니 말이야. 처웃는 거 보니 반성을 좀 했나 본데.”
『다음에 만나면.』
‘응?’
블루의 말을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실비아가 귀를 쫑긋했다. 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반면에 루카의 귀엔 ‘엉엉’ 소리만 들렸기에 그는 ‘그래, 그래. 쓰다듬어 주지, 뭐.’라고 말하며 블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블루는 여전히 웃는 상이었다.
『널 죽여 버리겠다.』
그 말과 함께 블루는 여전히 활짝 웃은 채 지느러미로 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화들짝 놀란 실비아는 블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블루는 실비아가 옆에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힘을 찾으면 최대한 고통스럽게 찢어 죽이겠어…. 감히 내 앞에서 실비아랑….』
원래 실비아 앞에선 험한 말을 자제하던 블루였건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루카는 블루가 열 받은 줄 전혀 모르고 몸을 숙여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으, 하며 몸을 일으켰다.
“물개치곤 많이 못났다. 맛있는 것 좀 자주 먹여야겠어. 얼굴이 저러니 먹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관람객들이 파돌이 귀엽다고 다들 좋아하던데….”
“쯧, 짐승이라고 사람들이 관대한 거지. 냉정하게 봐서 못생겼어. 몸도 너무 파랗고. 입맛이 뚝, 떨어지네.”
비웃는 얼굴의 루카는 블루를 흠집 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어떻게 본체가 아니라 물개 모습인데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어쩌면 블루가 물개 모습이라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일 수도 있었다.
‘블루를 닦달해 변신시키길 잘했다….’
실비아가 머리를 싸매는데 블루가 옆에서 작게 크르릉거렸다. 그런 그의 주둥이를 실비아는 괜히 닦아주는 척 막아 버렸다. 둘이 싸우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 루카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피식거리며 손을 얼굴 앞에서 닦는 것처럼 흔들었다.
“잠시 뒤에 봐. 저 물개 얼굴 좀 제대로 닦아 주고. 못생김 묻었다.”
루카는 잠시 뒤에 보자며 뒤돌아 손을 흔들곤 떠났다. 아쿠아리움으로 들어오자 블루가 펄쩍 뛰면서 이를 갈았다.
『뭐야, 뭐냐고! 실비아, 왜 쟤랑 입 맞추는 거야? 친구끼리 저런 것도 해?』
“어? 음…. 그, 그렇지? 친구니까, 친구니까 저 정도야 뭐.”
블루가 따져 묻자 곤란한 낯빛을 한 실비아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친구끼리 한 행동이라고 하기엔 좀 과했지만 별다른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블루는 실비아의 대답을 듣고는 조용해졌다.
잠시 후 루카와 만날 생각에 들뜬 실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블루를 데려갔다. 얼마 걷지 않아 블루의 개인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우리 안으로 들어온 뒤 문단속을 하며 뒤돌다가 깜짝 놀랐다. 블루가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시 본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실비아를 내려다봤다.
“어? 너 왜 다시 돌아왔어?”
『실비아, 가지 마. 걔랑 놀지 말고 나랑 놀자.』
“당장은 안 갈 건데. 어차피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앗.”
블루가 갑자기 팔을 뻗어 실비아를 제 팔 사이에 가뒀다. 이게 무슨 일이지. 대비하지 못한 벽치기 기술에 실비아가 허둥지둥하는데, 블루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앗, 너. 어디다 입을 대! 입에 힘주지 마. 인간의 두개골은 사탕이 아니야. 깨물면 안 된다고!”
실비아는 황급히 시스템을 불러내 세이브를 했다. 혹시나 눈앞의 살인마가 제 머리를 추파춥스처럼 깨물 수도 있었기에. 블루는 그녀의 정수리에 뺨을 기댄 채 투덜거렸다.
『안 깨물어. 뭐야! 날 괴물로 보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 머리를 으깨진 않아.』
“그래, 그러시겠지. 블루야, 조금 부담스러운데 우선 떨어져서 얘기할까?”
실비아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루카의 경우엔 몸에 독이 있단 걸 알고 있기에 데드 엔딩을 피하는 법을 정확히 알고 행동했지만, 눈앞의 블루는 어디서 갑자기 폭탄이 터질지 모르기에 스킨십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블루와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포옹하다가 죽고, 입에 손만 대도 엄지가 사라졌다. 이 지경이 되니 지력을 풀로 채우기 전엔 섣불리 진도를 나가기가 꺼려진 것이다.
‘게임 공략이 아무리 절실하다지만 사방팔방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사지에 먼저 뛰어들 정도는 아냐.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니고 아쿠아리움에서 끝까지 갈 생각은 절대 없어. 그래,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블루가 아쿠아리움을 나온 후에 진도를 나가도 되는 거잖아.’
아무리 자신이 짜릿한 걸 즐긴다지만 이런 장소에서 야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곳이 블루의 개인 우리라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과는 환경 자체가 좀 달랐다. 클라우드 소파가 있고 요가 매트가 있지만 다른 건 다른 것. 여기는 물개 우린데, 동물 우리에서 섹스를 한다고? 그녀는 순간 자신이 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었지만 하여튼 여러 가지 이유로 실비아는 지력을 다 채우기 전엔 블루를 공략하기 싫었다.
‘키스하다가 혀가 날아가고 어딘가를 만졌다가 살점이 썰리면….’
실감 나는 상상을 하느라 실비아의 얼굴이 하얘지던 중 머리통에서 블루의 목소리가 울렸다.
『실비아아. 걔 말고 나랑만 놀자니까?』
“안 돼. 하지만 조금은 놀아 줄게. 일단 좀 떨어져서 얘기하자.”
블루가 계속 정수리에 얼굴을 댄 채 칭얼거렸다. 실비아는 그 입이 두개골을 깨부술까 봐 점점 불안해졌다. 그녀가 블루의 얼굴을 피해 밑으로 몸을 숙이자 위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내가 싫어? 왜 피하는 거야. 네가 친구끼리는 친밀한 접촉이 중요하다고 말했었잖아. 저번엔 포옹도 하게 해 줬으면서.』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응, 했었잖아. 한참 동안 진지하게 얘기해 놓고!』
실비아가 기억이 나지 않아 눈을 도로록 굴리자 블루가 답답해했다. 말했었나 보다. 하도 답답해서 일장연설을 했던 거 같은데, 그중에 그런 말이 껴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란 소리는 아니지. 그녀는 말했던 걸 정정하려고 입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그래, 친구끼리 스킨십이 중요하긴 한… 어머! 너 방금 뭐한 거니?”
『왜? 하면 안 될 거 했어? 아까 그 자식이랑은 아무렇지 않게 했잖아. 심지어 난 뺨에 한 건데.』
블루의 뻔뻔한 말에 실비아는 벙쪘다. 그녀가 왜 이렇게 놀랐느냐면, 블루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뺨에 도둑키스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말하는 도중에 촉촉한 입술이 순식간에 뺨에 도장을 찍더니 재빠르게 물러났다. 그녀는 어벙벙한 얼굴로 제 뺨을 더듬었다. 혹시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진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블루가 먼저 스킨십을 했다는 감격은 죽음의 공포 앞에선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도 입술에 손대더니 이젠 뺨까지. 아까 행동이 일부러 한 거일 수도 있겠어. 이러다가 또 데드 엔딩이 뜨겠네. 역시 주의를 좀 줘야겠구나.’
실비아는 뽀뽀 당한 뺨을 쓰다듬으며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파인 곳 없이 무사하구나. 그 모습을 블루가 불만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다. 검은 점 두 개가 찍힌 왼쪽 눈 밑이 못마땅한 듯 씰룩거렸다.
『내 입술이 더러워? 걔랑은 더한 것도 해놓고!』
“그게 아니잖아. 아까 그 사람은 내 친구야. 너랑 나는 더 친해져야 이런 걸 할 수 있는 거야.”
사실 친구 사이에 이런 거 절대 하지 않지만, 실비아는 굳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언젠가 공략조건을 채우면 블루랑 이것저것 하긴 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엄지도 사라졌었는데 살점이라고 떨어져 나가지 말란 법 없었다.
『더 친해져야 해? 그럼 아까 그 싸가지랑 했던 걸 하려면 얼마나 친해져야 하는데?』
“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블루의 시샘에 실비아는 황당해졌다. 뽀뽀 가지고도 이렇게 불같이 질투하다니, 더한 걸 했단 걸 알면 뒤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실비아가 시선을 피하자 블루의 감색 눈에 서운함이 가득 담겼다.
『친구라면서 걔랑은 하고 나랑은 안 하고…. 미워.』
“조만간이야. 지금은 허튼 생각 말고….”
서러워하는 블루에게 실비아는 차분히 설득했다. 아니, 설득하려다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블루가 이번엔 뺨이 아니라 입술에다 입맞춤을 했기 때문이다. 말랑하고 촉촉한 블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순간 상황판단이 안 돼 벙쩌 있던 실비아는 곧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곧바로….
“뭐야!”
블루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퍽-하는 제대로 맞은 소리와 함께 블루가 어깨를 감싸 쥐었다. 놀란 나머지 힘 조절을 못해 제대로 갈겨 버렸다.
“어머, 잠깐. 괜찮아? 그러게 왜 예고 없이 뽀… 왜 입을! 아직 안 된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