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그럼 힘들지, 안 힘들겠냐.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옆에서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니 성질이 났다. 실비아가 손사래를 치자 블루가 가만히 그녀를 구경했다. 잠시 후 상태가 좋아진 실비아는 물개로 변하지 않는 블루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안 변하네? 물개로 변할까 봐 급하게 데려온 건데.”
『마법진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 완전히 사라지면 여길 나갈 수 있을 텐데.』
실비아는 블루를 심각한 표정으로 관찰했다. 마법진 파훼 10년 벼락치기 어쩌구는 읽어 봐도 도통 이해를 못 하겠고 얘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지 갈 길이 너무 멀었다. 마법진의 힘이 약해져 봤자 뭐하나. 진이 완전히 사라져야 블루가 아쿠아리움을 나갈 수 있었고 그래야 공략이 가능했다. 그런데 나간 후에도 끝이 아니었다. 섹스는 뭐 혼자서 하냐고. 블루를 완전히 가르쳐야만 안심하고 공략할 텐데 말이지.
‘지력을 다 채워야 공략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혹시 <잊혀진 신전>에서 <십중팔구 만독불침>을 얻었던 것처럼 뭔가 퀘스트가 남아 있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는 실비아가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힘들어할 때 떠오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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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황실 개방 축제에서 황실 제1 마법사단장에게 드래곤에 대해 물어보자.
- 이대로는 블루를 공략하기 전에 실비아의 몸이 곤죽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초대황제가 드래곤을 마탑에 가뒀던 적이 있다는데, 제1 마법사단장은 그 역사의 뒷내용을 자세히 알지도 모른다. 그를 축제에서 만나 드래곤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거들먹거리는 성격이라 무식한 자는 상대도 안 한다는 소문이 있다.
최소 요구 조건 : 지력 400 이상
성공 보상 : <드래곤을 가르치는 101가지 방법> 책 획득
실패 시 : 블루 공략 루트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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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더럽게 살벌하네. 이놈의 시스템이 이제는 걸핏하면 공략 루트 파괴할 거라고 협박질이네 이거?’
황실 개방 축제에서 하는 퀘스트라니. 토요일에 해결하면 될 듯했다. 고민하던 차에 반가운 메시지였다. 시스템 창을 끈 그녀는 블루에게 목줄을 다시 채워 주었다. 어쩐지 물개가 되기 전에 목줄을 한 번 더 채우고 싶었다고나 할까…. 점점 이상한 취향이 생기고 있는 듯했다. 그때 정원 입구의 나무가 흔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실비아의 눈이 댕그래졌다.
‘어?’
미니정원의 낮은 아치형 입구에 붉은 머리가 보였다. 그러더니 커다란 체격의 사람이 상체를 숙인 채 들어왔다. 지금 이 정원에 들어올 거라 예상 못 한 인물, 루카였다. 그는 아직 실비아를 발견하지 못한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정원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워낙 체격이 큰 데다가 튀는 빨간 머리를 가진지라 실비아의 눈에 그가 먼저 띈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블루의 옆구리를 찌르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블루의 본체와 루카가 맞닥트린다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라 불안했다.
“물개! 물개로 다시 변신해.”
『왜? 아직 변신이 풀릴 기미도 안 보이는데…. 싫어!』
“야!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아!”
『안 할 거야.』
실비아의 다그침에도 블루는 격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초조해진 실비아는 조건을 걸었다.
“어휴, 알았어! 초콜릿 쿠키 10개 구해 줄게.”
『앗! 그럼 좋아.』
정어리가 지겨웠던 블루는 아이스크림을 맛보고도 아직 만족하지 못했는지 실비아의 말에 무척 기뻐하며 얼른 원래의 물개로 돌아갔다. 타이밍 좋게 변신이 끝나자마자 루카가 둘의 근처로 왔다. 그는 구불구불한 미니정원을 건성으로 살피다가 실비아를 발견했다.
“어? 실비아, 여기 있었구나. …저건 뭐야.”
“어! 루카 님. 여긴 어떻게 찾아오신 거예요!”
실비아가 손을 흔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주 웃으며 걸어오던 루카는 실비아의 옆을 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 옆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는 블루를 발견한 것이다. 블루는 못 보던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중이었다.
“이건 뭐야. 밥맛 떨어지게 생긴 물개네.”
“밥맛 떨어지게 생겼다뇨. 아쿠아리움의 귀염둥이 파란 물개 파돌이랍니다! 귀엽지 않아요?”
등 뒤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실비아는 블루의 몸뚱이를 루카 쪽으로 돌려 소개했다. 루카는 파란 물개가 자신의 라이벌이란 걸 직감으로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원래 싸가지 없는 성격이 힘을 쓴 건지 블루를 안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실비아가 돌리는 바람에 강제로 루카와 마주 보게 된 블루도 루카의 빈정거림에 주둥이를 씰룩거렸다.
『방금 저 새끼가 뭐라고 말한 거야? 본인 생김새나 보라지. 새빨개서 수탉같이 생긴 게.』
블루가 신랄한 말을 내뱉었지만, 루카의 귀에는 ‘엉엉!’거리는 물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둘이 다툴까 싶어 블루 보고 물개로 변신하라고 한 건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둘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뜻밖의 대치상황에 실비아의 입안이 바짝 말랐다.
‘루카는 대체 왜 물개한테 저러는 거야. 이상한 느낌을 받은 건가? 블루의 말을 쟤가 알아듣지 못해서 그나마 다행이네. 둘이 대화가 안 통하니 이 정도지 통했으면 싸움이 났을 수도 있겠어.’
말이 안 통하는 물개와 사람이 어떻게 다투겠는가. 루카가 블루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알아들었다면 지금쯤 개싸움이 벌어졌겠지. 실비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둘을 지켜봤다. 루카는 블루를 한참 째려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 내가 지금 물개랑 뭘 하고 있는 거지.”
심드렁해진 그는 블루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순간 블루가 흠칫하더니 제 몸뚱이를 잡은 루카의 손을 지느러미로 세차게 떨쳤다. 그러자 루카가 기가 막힌 듯 빨개진 손등을 바라보더니 블루를 벤치에서 치우려고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블루는 또 힘을 주며 버티다가 결국 성질이 났는지 머리로 루카의 손등에 박치기했다.
인상을 찌푸린 루카는 결국 블루를 피해 걸어와 비어 있는 실비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본 실비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저게 무슨 애들 싸움인가 싶었다. 루카는 대뜸 엄살을 부리며 실비아의 어깨에 기댔다.
“아야…. 실비아. 이거 봐. 저 파란 놈 때문에 내 손등이 빨개졌어. 동물이 사람을 이렇게 다치게 해도 돼? 관계자 어딨어? 물개 단속 좀 제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어머, 어떡해요. 근데 입장권에 생명 포기 각서가 있어서 보상은 못 받을 텐데…. 보건실에 가면 연고 정도는 발라 줄 거예요.”
『다치긴 뭘! 저 자식 엄살 부리는 거야. 진짜 다치게 콱 물어 버릴 껄!』
블루가 아까워했지만, 루카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루카는 실비아의 말에 주머니에 있던 입장권을 꺼내 봤다. 루카가 ‘없는데?’라고 하자마자 실비아는 현미경으로 봐야 보인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떨떠름해 하더니 입장권을 대충 구겨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릴 때 엘리셔스 월드에 몇 번 놀러 왔었는데, 이런 비밀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아직 신문에 안 나온 게 용하다.”
“글쎄요. 신문에 안 나오게 누가 수를 쓴 거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실비아, 너 저런 친구가 있었어? 저 못된 애랑은 놀면 안 돼. 나랑 놀아.』
루카와 실비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블루가 옆에서 칭얼거렸다.
‘친구라, 친구는 맞지. 아주 돈독해서 이 짓 저 짓 다 하는 친구인데 너도 곧 이런 친구가 될 거야. 어떤 친구냐면….’
실비아는 잠시 내뱉지도 못할 엄한 말을 상상했다. 고개를 저은 그녀는 곧 달려들 것 같이 씩씩대는 블루의 지느러미를 잡고 진정시켰다.
“파돌아, 좀만 참아.”
『으, 쟤 너무 싫어!』
“저 새끼 표정이 왜 저리 아니꼽게 보이지. 기분 탓이겠지?”
둘은 말이 안 통하는데도 서로를 몹시 싫어했다. 무의식중에 서로가 경쟁자란 걸 알아보고 경계하는 걸까. 급격하게 피곤해진 실비아는 아쿠아리움에 블루를 데려다 놓고 싶어졌다.
“원래 파돌이를 산책시키려고 한 건데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으니 데려다 놔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야. 물개는 수조에 담가 놓고 우리끼리 놀자. 이 놀이동산 간부 중 한 분이 우리 아버지랑 절친한 사이시거든. 잠시만 시간 빼달라고 하면 해 줄 거 같아.”
『안 돼. 둘이서만 있으려고? 나도 데려가, 실비아.』
실비아가 목줄을 들고 일어서자 블루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거부했다. 살짝 줄을 당겨 봤지만, 그는 지느러미로 벤치를 잡고 버텼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힘 스탯을 이용해 블루를 어깨에 짊어졌다.
『뭐야!』
“파돌아. 누나 힘들게 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가자.”
『악! 안 돼. 실비아. 쟤 말고 나랑 같이 있어.』
실비아의 어깨에 걸쳐진 블루가 버둥거렸다. 그럴 때마다 실비아의 경추 3번이 덜그럭거렸다. 루카는 여우 목도리처럼 블루를 걸친 실비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들어도 목이 괜찮은 거야? 물개 무게가 너랑 비슷할 텐데.”
“우선 데려가는 게 먼저죠.”
실비아는 미니정원을 나와 아쿠아리움으로 향했다. 관람객들이 진귀한 파란 물개를 목에 걸친 실비아를 보고 한번 놀라고 옆에 있는 잘생긴 루카의 외모에 두 번 놀랐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든 말든 고행길을 오르듯이 블루를 목에 이고 간 실비아는 금방 아쿠아리움 입구에 도착했다.
“파돌이를 물개 우리에 넣어놓고 와야겠네요. 여기서 기다리실래요?”
“아냐. 난 아까 말했던 아버지 친구분 좀 만나 뵙고 올게. 내가 데리러 올 테니 안에서 기다려.”
“그래요.”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모가지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는 걸 느끼고 멈칫했다.
‘아차, 블루를 목에 걸어놨었지. 인간적으로 이제 내려놓자. 자칫 잘못하면 목디스크가 걸리겠어.’
조심스럽게 몸을 구부려 블루를 내려준 그녀는 목을 주무르며 허리를 폈다.
그 순간 루카가 시선을 잠시 블루에게로 돌리더니 피식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실비아의 조그만 턱을 그러쥐더니 고개를 내려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