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아냐, 실비아. 너무 신난다. 빨리 가자.』
실비아가 되묻자 블루가 낯빛을 환하게 하곤 앞장서 갔다. 실비아와 친구(?)로서 이것저것 할 생각에 신나 있던 블루는 다른 쪽으로 이것저것 하게 돼 순간 불만이 치밀었지만,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아이스크림 노점을 향해 걷던 실비아는 행인들의 수상한 수군거림을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던지자 사람들이 블루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뭔 말을 하는가 들어 보니 블루의 잘생긴 외모에 감탄하는 내용이었다.
‘아, 맞아. 블루 얘도 다른 남주들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이지.’
아무래도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으니 그녀가 블루의 여자친구로 보인 모양이었다. 으쓱하던 실비아는 별안간 깨달은 사실에 당황했다. 자신은 유니폼을 입고 있고 블루는 목에 목줄을 차고 있었다. 일단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인턴사원증을 떼어 버렸다. 엘리셔스 월드가 워낙 큰지라 엄청 많은 직원이 있었기에 이 정도면 특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다음은 목줄. 목줄의 끝은 실비아의 허리끈에 달아놓은 상태였다. 급히 허리춤에 찬 목줄을 풀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눈에 띈 모양이었다. 행인들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깐, 저 여자는 놀이공원 직원 같은데.”
“저 남자 목에 저거 목줄 아냐? 심지어 여자가 들고 있어.”
“세상에, 지금 근무 중에 플레이…중인 건가. 보통내기가 아닌걸.”
여자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실비아는 제 뒷담화를 듣기 위해 한껏 귀를 기울였다.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네. 뭐 어때. 결국 부러워하는 거면…. 신난다!’
이 잘생긴 남자는 내 것이다! 아직 내 것이 아니긴 하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터. 실비아는 목줄을 얼른 빼 버리려던 계획을 변경하고 줄을 자랑스럽게 손에 들었다. 그녀가 턱을 치켜들고 도도하게 걸음을 옮기자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맘껏들 부러워해!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간 실비아의 뻐기는 표정에 옆에 서 있던 블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비아, 기분이 엄청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너랑 산책하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실비아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블루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나도. 난 너랑 있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
블루가 상체를 기울여 실비아의 어깨에 제 뺨을 비볐다. 그 모습에 등 뒤로 와닿는 시선이 더 따가워졌다. 수군거리는 인파도 아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블루의 순해 보이는 모습과 그의 목에 걸린 목줄이 맞물려 오해가 더 깊어진 듯했다. 처음에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눈빛에 즐거워하던 실비아는 점점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그녀가 변태라고 해도 양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변태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결국 그녀는 블루의 목줄을 풀어 미니백에 넣었다.
‘재밌긴 한데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역시 좀 그래.’
걷다 보니 어느새 아치형 다리에 다다랐다. 산들바람이 블루와 그녀의 앞머리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앞서간 실비아가 뒤돌아보니 블루는 논라를 머리에 쓴 채 강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신비한 하늘색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그의 얼굴을 가렸다.
블루는 무심한 눈으로 제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웠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세진 탓에 치우고 또 치워도 머리카락이 그를 성가시게 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논라를 고쳐 쓰는 블루의 곁으로 실비아가 가까이 다가갔다. 제 팔목에 차고 있던 머리끈을 뺀 실비아가 블루의 몸을 돌려세웠다.
“블루야, 머리 묶어 줄게. 모자 잠시 벗어 봐.”
『응.』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실비아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블루의 머리를 땋아 주기로 했다. 자신 못지않게 긴 머리를 정성스레 땋고 있자니 실비아의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남주의 머리를 땋아 줄 일이 생길 줄이야. 이게… 장발남의 매력?’
실비아는 장발남의 매력을 한껏 느꼈다. 땋은 머리를 한쪽 어깨에 넘겨주고 논라를 다시 씌워 주자 블루는 마치 동양의 신비로운 무사 같았다. 하늘색 머리인 것만 빼면 딱 그랬다.
“멋지다.”
『멋져? 그럼 앞으로도 자주 땋아 줘.』
대답 대신 활짝 웃은 실비아는 블루를 힐끗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블루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실비아를 조용히 따라왔다. 밖에서 보니 블루의 모습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목이 꺾일 정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에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어도 느껴지는 탄탄한 체격이 역시 남주는 남주다 싶었다. 거기다 그와 대비되는 우수에 젖은 눈동자는 그를 사연 있는 남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아쿠아리움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 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블루를 몰래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던 실비아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땅바닥에 대차게 넘어지려는 순간, 블루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괜찮아? 큰일 날 뻔했잖아.』
“아, 고마…워.”
실비아는 어색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의 등 뒤로 블루의 단단한 몸이 와 닿았다. 블루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다시피 끌어안고 있었는데 체격이 워낙 큰지라 그녀의 몸은 아예 파묻힌 꼴이 됐다. 잠시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실비아는 파드득 몸을 떨며 블루에게서 벗어났다.
“시간 없어. 빨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야지!”
귀 끝이 빨개진 그녀는 블루를 돌아보지 않고 아이스크림 노점으로 향했다. 몇 발자국 성큼성큼 걷다 힐끗 돌아보니 블루가 뒤늦게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게 보였다.
“여기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딸기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상인에게 건네받은 실비아는 블루를 찾았다. 무표정의 그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의 블루는 살짝 낯설었다.
“블루야!”
실비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블루의 얼굴엔 늘 짓던 싱그러운 미소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무표정은 꽤 무섭구나. 내 앞에선 항상 웃고 있어서 몰랐네. 웃는 상인 줄 알았더니.’
블루에게 딸기 아이스크림을 건네자 그가 감동한 듯 울먹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받고 열심히 먹었다. 실비아도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차갑지도 않은지 빠른 속도로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운 그가 아이스크림을 핥는 실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번처럼 아이스크림을 탐내는 건가? 실비아가 눈으로 묻자 블루가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달콤해 보여.』
“이건 내 건데! …흠, 그래. 한 입만 먹어.”
장난스럽게 내 거라고 하며 아이스크림을 숨겼던 실비아는 서운해하는 블루를 보며 속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한 입만 먹으라고 하며 아이스크림을 내밀자 블루가 콘을 쥔 실비아의 손을 겹쳐 잡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 입술에 닿은 감촉에 실비아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처럼 다가온 블루가 손가락으로 실비아의 입술을 문질렀기 때문이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실비아가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달리 블루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제 손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쪽 빨더니 눈꼬리를 접었다.
『맛있어.』
“방금 뭐한 거야?”
『아이스크림 먹은 건데. 왜? 뭐 잘못했어?』
실비아는 어버버하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입술에 아이스크림이 묻어서 먹은 건가. 저번에 분명히 예고 없이 다가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워낙 순식간이라 손을 내칠 틈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찮은 건가. 기분만 이상하네.’
실비아는 괜스레 민망해져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었다. 그러곤 아이스크림을 다시 할짝거렸다.
“잘못한 건 아니지만…. 흠흠, 함부로 그러면 안 돼.”
『칫, 왜? 다치지 않았잖아. 한 번 더 핥고 싶어.』
오해할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하는 블루의 모습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블루가 고개를 숙이더니 실비아가 핥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함께 핥았다. 순간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실비아와 눈을 마주친 블루는 한 번 더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맛있어.』
“아아, 어. 맛있지. 하나 더 사 줄까?”
블루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아이스크림이 좋은 거였군….’
실비아는 잠시 제가 한 생각에 민망해져 재빨리 노점으로 가 아이스크림을 샀다. 다시 고개를 내려 아이스크림을 할짝댄 걸 보니 블루는 정말 제 입술에 아이스크림이 묻어 아무 생각 없이 손으로 문지른 모양이었다.
새로 산 아이스크림을 건네자 블루가 또 열심히 먹었다. 그는 시선을 아이스크림에 둔 채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실비아.』
“으응?”
민망함을 삭히고 있던 실비아가 고개를 들자 블루가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나 좀 이상한 거 같아.』
“어?”
『느낌이 이상해.』
“뭐? 안 되지!”
실비아는 번뜩 떠오른 사실에 블루의 손을 잡고 뛰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블루는 갑자기 물개로 돌아갈 수 있는 몸이 아니던가. 놀이동산 한가운데에서 그가 물개로 변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마시듯이 먹으며 급하게 아쿠아리움 근처까지 온 그녀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빠, 빨리!”
『왜 그래?』
급하게 뛰어 다 죽어 가는 실비아와 달리 블루는 멀쩡했다. 그래, 드래곤이라 하나도 안 힘들다 이거지. 실비아는 블루의 등을 밀며 급하게 미니정원으로 들어갔다. 아쿠아리움을 들어가는 도중에 변신하면 곤란하니 여기가 최선이었다.
아까 앉았던 벤치에 앉은 실비아는 급하게 심호흡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고 급하게 뛴 부작용일까. 몸 상태가 영 아니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블루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실비아를 바라봤다.
『왜 그래? 왜 힘든 거야?』
“어우, 블루야…. 오늘 참 좋았는데 화나게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