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자료실? 아! 그런 곳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네. 인턴 면접 봤던 건물 있지? 거기 옆 건물에 자료실이 있을 거야. 근데 거긴 왜? 인턴 하면서 그 자료실을 가 볼 필요는 없을 텐데.”
“제가 좀 학구열이 강한 타입이라서요. 새로운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답니다. 훌륭한 책이 많을 거 같아서 가 보고 싶어요.”
실비아의 대답에 할머니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음, 그런 사람이 가끔 있긴 하지. 근데 거기는 원래 인턴 신분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 특별히 허가를 받으면 모를까….”
“허가요? 그 허가란 건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간단해. 기밀이 담긴 자료실도 아니니 간부들 두 명의 허가증만 받으면 출입이 가능하지.”
생각보다 간단한 출입 조건에 실비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메리 할머니는 실비아가 싱글거리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자신은 간부가 아니니 허가증을 써줄 수 없다며 동물원 부장에게 부탁해 보라고 했다.
사파리 월드의 동물들을 한참 케어하고 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구내식당으로 간 실비아는 늘 그렇듯이 부장에게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아부를 했다. 오늘만이 아니라 매일 점심마다 아재 개그를 견뎌낸 실비아는 부장의 호감을 사고 있었기에 무리 없이 허가증을 얻었다. 우선 하나 얻었고, 나머지 한 장은 대체 누구한테 부탁하면 될까. 다른 부서의 사람들과는 일면식이 없는데…. 고민하던 그녀의 뇌리에 서커스단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금전적 보상 말고도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보상을 줄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큰 부탁을 하기는 좀 그러니 허가증을 달라고 하면 되겠네.’
며칠 동안 고민을 하면서 이미 공연에 참여하기로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그녀는 서커스단장에게 허가증을 얻기로 했다. 더 큰 걸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과욕을 부리다간 당장은 얻는 게 있어도 결국 미움을 살 수도 있는 법. 서커스 단장과 좀 더 장기적인 커넥션을 이루기 위해 적당한 부탁을 하기로 결정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그녀는 이정표를 따라 서커스가 열리는 건물로 향했다. 도착하니 무지개색 천막 앞에서 피에로가 호객 행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피에로에게 인턴사원증을 보여 주고 단장님을 뵙고 싶다고 하자 그가 곧바로 실비아를 단장실로 안내했다. 피에로가 노크를 하자 들어오란 소리가 들렸다. 단장은 한창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단장님, 단장님을 뵙고 싶다고 하는 분이 계셔서요.”
“어, 그래…. 어? 아이고! 실비아 양, 어서 와요. 결정하신 거죠?”
서류에 열중하던 단장은 고개를 들었다가 실비아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환영했다. 그리고 급했는지 실비아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결정했냐고 물었다.
“네. 며칠 고민해 봤는데 저한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더라고요.”
“잘 생각했어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직접 찾아왔는데요….”
실비아는 그의 권유에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 단장이 앉고 얼마 되지 않아 피에로 단원이 차를 내왔다. 단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뭐든 말해 보라고 했다. 차를 한 모금 홀짝인 그녀가 자료실 허가증을 한 장 써 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장은 순간 황당한 얼굴을 하더니 곧 허허, 하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했더니 너무 소박한 부탁 아닙니까? 그거야 언제든지 써 줄 수 있습니다. 다른 거 요구하실 건 없나요?”
“네. 허가증만 써 주시면 됩니다.”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캐비닛에서 허가증 서식을 꺼내와 사인하고 실비아에게 건넸다. 그는 계속 이해가 안 되는지 헛웃음을 쳤다.
“허, 참. 정말 이걸로 됐습니까? 다른 건 필요 없고요?”
“예. 이거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싹싹한 태도로 미소 짓자 서커스 단장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소탈한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사실 실비아는 전혀 안 소탈하고 나중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린 것일 뿐이었지만, 단장이 그 속을 알 수는 없었다.
단장은 실비아를 배웅하며 금요일에 인턴 근무를 마치고 나서 서커스단에 들러 달라고 당부했다. 리허설을 미리 해 볼 필요가 있단 말에 그녀는 씩씩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정중히 인사를 하곤 갈 길을 바삐 갔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녀는 서둘러 자료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메리 할머니 말대로 인턴 면접을 봤던 옆 건물이 바로 그곳이었다. 경비원에게 허가증 두 개를 보여 준 그녀는 출입 명부에 사인하고 자료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받은 열쇠로 문을 열자 케케묵은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실비아는 입을 움찔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에취, 푸엥취!”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를 손을 휘저어 물리친 그녀는 자료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예상보다 자료실이 너무 컸다. 빼곡히 들어선 서고들은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방대했다. 서고의 반대편엔 라벨이 붙은 상자들이 먼지를 덮어쓴 채 쌓여 있었다.
‘너무 무턱대고 찾아왔나.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물어볼 걸 그랬어. 이대로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걸.’
실비아는 서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탐색했다. 책이 이렇게 많으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당장 마법진 파훼법이 담긴 고서는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온 김에 대충 위치는 알아 둬야겠다고 판단하고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가며 입구에 있는 서고부터 살폈다. 다행히 종류별로 분류해 놓은 라벨이 붙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실비아는 마법이라고 써진 라벨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여기 같은데?’
서고 옆에 있는 수레에서 마른 천을 집어 든 그녀는 먼지가 쌓인 서고들을 훑으며 책을 찾았다. 이 세계의 언어는 한글이랑 달랐지만, 그녀의 눈엔 자동으로 수월하게 읽혔다. 자라처럼 목을 쭉 빼고 위까지 훑으니 다른 책보다 확연히 먼지를 많이 덮어쓴 것이 하나 보였다. 혹시나 해서 꺼낸 그녀가 먼지를 훌훌 털어 보니 <마법진 파훼! 10년 벼락치기로 나도 해냈다.>라는 제목이 나타났다. 10년이 벼락치기라니 제목부터 절망적이었다.
‘뭐야, 제목부터 불길하게. 설마 10년 후에 블루를 공략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녀를 엿 먹이는 데 진심인 시스템이라면 10년이 걸리게 설계해 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10년 후 아쿠아리움의 동물부 대리가 된 자신이 ‘실비아는 10년 만에 드디어 블루를 공략했다.’ 같은 메시지를 보는 상상을 하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쏘옥 빠져나갔다.
고개를 격하게 저은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책을 펼쳤다. 목차를 살펴 ‘드래곤 마법진’ 항목을 찾은 그녀는 곧바로 그 챕터의 페이지를 펼쳤다. 이구아나처럼 생긴 드래곤 삽화와 함께 복잡한 수식이 3페이지에 걸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학창 시절 미적분을 처음 접했을 때 같은 충격이 그녀의 뇌를 강타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혼이 계속 몸을 떠나려고 해 붙잡느라 고생했다.
‘지금 상태로는 이걸 읽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지력을 700까지 올리면 가능해지는 걸까?’
먼지를 말끔하게 닦아 낸 그녀는 책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경비원에게 이 책을 자료조사 차 잠시 빌리겠다고 말하자, 대여 장부를 쓰는 간단한 절차를 거친 후 건물을 나올 수 있었다.
‘일단 지력이 700이 될 때까지 들고 있어야겠어.’
인턴 둘째 주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 왔다. 한국인이 만든 게임 세계라 그런지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주5일제 근무를 했기에 오늘은 불금이었다. 그래도 저번 주 금요일엔 낮부터 관람객이 많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의 놀이공원은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조련사와 함께 물개 쇼를 위해 무대를 밀대로 닦던 실비아는 평소보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아쿠아리움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보다 관람객이 좀 많은 것 같네요?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요.”
“그건 내일 있을 황실 개방 행사 때문이죠. 그 축제를 구경하려고 제국민들이 연차를 냈나 봐요. 다른 대륙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고요. 여행사에서 첫날은 엘리셔스 월드에서 놀고 다음 날 축제를 보고 돌아가는 패키지 상품도 판매하고 있거든요.”
게임 세계에 여행 패키지 상품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느 세상이든지 돈 벌 궁리를 하는 사람은 넘쳐나는구나.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그때 뻥 뚫려 있어 하늘이 바로 보이는 아쿠아리움 상공에서 익숙한 새소리가 들렸다.
“구구구구!”
참둘기였다. 그는 포르르 날개 소리를 내며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그것의 발에 붉은 편지가 묶여 있었는데, 루카의 편지였다. 실비아가 손가락을 내주자 참둘기가 앉았다. 그녀는 편지를 끄르며 무슨 상황인가 궁금해하는 조련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제 전서구가 일터까지 찾아왔네요. 근무 중에 찾아올 줄이야. 잠시 편지만 좀 읽어 볼게요.”
“일을 아주 열심히 하는 친구군요. 전서구 옷이 참 예쁘네요. 나중에 어디서 샀는지 좀 알려 줘요.”
“이건 선물 받은 거라….”
실비아의 말에 조련사가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와, 선물요? 부럽다. 누가 저런 고급진 옷을 선물해 줬을까.”
조련사가 아련한 눈빛으로 금색 옷을 입고 잔뜩 뻐기고 있는 참둘기를 구경했다. 참둘기는 그 시선을 느낀 듯 날갯죽지를 쫙 펴고 손가락 위에서 한 바퀴 돌며 제 옷을 과시했다. 확실히 옷을 입힌 후로 소속감이 생겨 태도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잠시 참둘기가 그러는 꼴을 지켜보던 실비아는 편지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