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실비아의 맑았던 초록 눈이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번들거렸다. 정치판에 진출하고 싶다곤 생각했지만, 막연히 먼 꿈이라고만 여겼는데, 지금 보니 무척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순간 시선을 돌려 서커스 단장의 모습을 스캔했다. 소매에 달린 보석 커프스와 딱 봐도 명품처럼 보이는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흠, 엘리셔스 월드의 인력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잘나가는 사업가 출신이 많다고 했었지. 이참에 서커스단장과 친해져 놓아서 나쁠 건 없겠어.’
여러모로 서커스 공연은 이득이 많았다. 보상도 준다고 하고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는 전제하에 정계 진출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기회였다. 거기다가 서커스부서의 총괄책임자인 서커스단장과 친해지기까지.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 봐야 했다. 공연에서 그녀는 어떤 걸 하게 되는 걸까. 너무 추잡스러운 일을 제안한다면 다 포기하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정치인은 이미지가 생명이거든.’
정치꿈나무 실비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서커스단장을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네요.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공연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건가요?”
“아이고! 능력만 된다면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죠. 일단 실비아 양이 면접에서 보여 준 것 말고 어떤 걸 더 할 수 있는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잠깐, 이건 요구하는 게 아니고요. 단순 궁금증에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때 보여 주신 걸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아니, 훌륭하죠!”
실비아의 질문에 기사단장이 흥분한 채 말을 다다다다 뱉어 냈다. 그의 격렬한 반응에 실비아는 슬쩍 기분이 좋아졌다. 게임의 버프 때문이긴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다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실비아가 빠르게 하는 건 뭐든 자신 있다고 답하자 서커스단장이 좋아하며 공연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대충 어떤 묘기를 해야 하나 들어보니 추잡한 일은 할 거 같지 않았다.
순간 단장의 칭찬 세례에 홀려 그대로 제안을 수락할 뻔한 실비아는 숱한 시스템의 농간을 떠올리고 공연에 참여할 시 어떤 보상을 해줄 건지 물었다. 칭찬은 칭찬이고, 챙길 건 제대로 챙겨야 했다.
“금전적 보상을 넉넉하게 해 드리죠.”
“금전이요….”
실비아가 말끝을 흐렸다. 보상도 있겠다 나쁘지 않지만, 혹시나 손해 보는 건 없나 계산하느라 그런 거였다. 그녀가 어물쩍거리자 서커스단장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말을 덧붙였다.
“혹시 다른 거 원하시는 거 있으시면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선 안에서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실비아 양은 능력이 좋으니 부르는 곳이 많을 테죠.”
“흠, 우선은 생각해 볼게요.”
당장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우선 주말에 굴다리 던전을 가야 했다. 공연에 갑자기 뛰어드는 만큼 그녀가 능력이 있다 해도 리허설 정도는 해야 할 터인데 그건 좀 피곤한 일이었다. 황금 같은 주말에 세비스랑 스트레스도 풀 겸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싶기도 했다. 원래라면 그와 같이 황실 개방 축제에 놀러 가기로 한 게 먼저였으니까.
“결정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꼭 연락 주세요.”
서커스 단장은 너무 오래 붙잡아 뒀다면서 생각 있으면 명함에 적힌 전서구 둥지 주소로 연락하라며 급히 떠나갔다.
‘해, 말아? 고민되네.’
단장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실비아는 미간을 좁혔다.
어느덧 인턴 일을 바쁘게 하다 보니 목요일이 왔다. 인턴 업무를 열심히 한 실비아에겐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메리 할머니를 도와 사파리 동물들을 돌보고 아쿠아리움에서 블루를 포함, 여러 해양 생물을 보살피다 보니 지력이 오르는 이벤트가 간간이 발생했다. 거기다가 매일 아침 비타민 섭취하듯이 <뜯어 먹는 단어장>을 열심히 씹어 먹어 매일 지력이 10씩 올라갔다. 그러다가 체하는 바람에 세비스가 손가락을 따 주는 사소한 일이 몇 번 있었다.
그것뿐인가. 베개 밑에 넣고 잤던 <전교 1등의 속옷>은 그녀에게 학주에게 시달리는 악몽을 안겨 줬지만 두 번 정도 지력 상승효과를 줬다. 그 아이템만으로도 총 20의 지력이 올랐다.
오늘 단어장을 아직 섭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비아의 지력은 390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좀 사기 아닌가 싶었지만, 인턴이란 게 원래 회사업무를 전반적으로 익히는 일이니 지력이 올라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로커 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출근하고 나서 먹으려고 챙겨 둔 단어장을 하나 부욱- 소리가 나게 찢었다. 10분 정도 열심히 단어를 암기한 뒤에 휴게소에서 떠온 물과 함께 단어장을 씹어 넘기자 지력이 400이 됐단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기대하지 않았던 메시지가 함께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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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400 달성! <헛소리를 진지하게>가 업그레이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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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됐다고? 그녀는 놀라서 상태 창을 얼른 켜 바뀐 스킬의 상세 설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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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를 온 누리에 진지하게>new!
- 고도로 발달한 헛소리는 독재자의 연설과 흡사하다. 이제 실비아는 높아진 지력으로 광역으로 헛소리를 떠들 수 있게 됩니다. 이전 스킬인 <헛소리를 진지하게>와 달리 대중들 앞에서 헛소리를 실컷 떠들어도 상태 이상에 걸리지 않습니다. 단, 스킬 성공확률은 50프로이다.
- 생활 스킬이자 전투 스킬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높은 지성을 가진 고위 몬스터에게도 사용 가능하다. 20프로의 확률로 스턴 기술인 <설득>이 발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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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광역기가 됐구나. 상태 이상에 걸리지 않는다니 엄청나다.’
<헛소리를 진지하게>를 광역으로 쓰면 상태 이상에 걸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거의 쓰지 않고 묵혀 두게 되었는데 이렇게 업그레이드된다면 얘기가 달랐다. 화술이 아닌 지력을 올리면 이 스킬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일 줄이야.
‘너무 신난다!’
실비아는 깨춤을 추며 업그레이드를 반겼다. 상태 이상이 걸리지 않을 테니 이제 어디서나 맘만 먹으면 이 스킬을 쓸 수 있었다. 실패한다고 쳐도 뭐 우황청심환처럼 생각하고 스킬 발동을 하면 마음도 든든하고 좋을 것 같았다.
로커 룸에서 나온 실비아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곤 사파리 월드로 향했다. 오늘은 메리 할머니를 도와 사파리 동물들을 보살피기로 했다. 메리 할머니 옆에서 업무 보조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그녀는 이곳 놀이동산 간부 몇몇과 이미 잘 아는 사이였다. 대충 엿들어 보니 아카데미 동창이라고 했던 것 같다. 할머니가 다녔던 곳은 명문 아카데미로 여러 유명 인사들을 배출한 곳이었다. 그런 고로 인턴 중에도 몇몇 그 아카데미 출신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놀이동산을 걷고 있자면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사근사근하게 인사하는 인턴들이 가끔 있었다. 그럼 할머니는 ‘일은 잘하고 있고? 혹시 억울한 일 있으면 말해.’라고 말하며 그들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게임 세계에서도 학연과 지연이 끈끈하게 얽혀 있어 훈훈한 현장이었다.
실비아가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며 멀뚱히 있을 때면 할머니는 ‘실비아 양도 힘든 거 있으면 말해!’라고 하며 격려를 해 주었다. 그래,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 아닌 건 아쉽지만, 할머니와 자신 사이엔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비록 할머니는 실비아네 아파트를 단지 운동 시설로 사용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인연은 인연이었다.
사파리 월드 내부의 깊숙한 곳. 할머니와 실비아는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늪지대에 도착했다. 얼음골에 온 것처럼 오싹한 느낌이 든 실비아가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는데 할머니가 늪지대에 손을 불쑥 집어넣더니 자이언트 악어를 꺼냈다. 그 악어는 둘을 도륙 낼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지 들켜서 아쉽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거리며 눈을 희번들하게 떴다.
“이놈 자식! 떼끼! 어디 버릇없이 눈알을 굴려.”
“크르르….”
할머니의 나무람에 악어가 이를 갈며 눈을 돌렸다. 꼬리로 바닥을 세차게 치던 그의 눈이 순간 할머니의 무시무시한 팔뚝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본 악어의 험악했던 눈빛이 저절로 온순하게 조절됐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분노조절장애엔 역시 강한 힘이 최고였다.
메리 할머니가 악어의 주둥이를 잡고 입을 벌리자 실비아가 바구니에 챙겨 온 칫솔 세트를 꺼내 악어의 입안을 청소해 주었다. 원래라면 악어새가 와서 악어를 도와줘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늪지대에 해괴한 동물들이 많이 살다 보니 악어새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얼씬도 안 하는 탓에 사파리 직원들이 악어 양치질까지 시켜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카치카 악어 양치를 열심히 시켜 주고 물로 헹궈 주고 있는데,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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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악어에게 팔을 절단당하지 않고 양치질을 시켜 주는 걸 성공했다.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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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역시나 오늘도 지력 메시지가 떠올랐구나.’
과연 인턴 말고 다른 직업을 택했어도 이렇게 지력이 올랐을까? 실비아는 순간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 이게 모니터 앞에서 하는 게임이었다면 다른 루트를 공략해 봤을 텐데, 게임처럼 여러 루트를 공략해 볼 수 없으니 아마 평생 모를 터였다.
할머니와 여러 동물을 케어하던 실비아의 눈에 저 멀리 동물수용소가 들어왔다. 탑을 보자 마법진 파훼법이 담겨있는 고서가 있는 자료실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단 게 떠올랐다. 일하느라 바빠서 하마터면 깜빡 잊을 뻔했다. 메리 할머니가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메리 할머니에게 떠보듯이 얘기를 꺼냈다.
“저번에 탑에서 마법진들을 봤었잖아요. 그때 직원이 엘리셔스 월드에 자료실이 있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어디에 자료실이 있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