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자신이 부탁하니 사파리에 가서 마법진의 힘을 약하게 만들어 줬고, 정어리를 먹기 싫다고 하니 이것저것 구해다 주려고 노력했지 않은가. 거기다가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게 했는데도 잠시 화를 낼 뿐,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도와주려고 했으니까.
블루는 자신이 혼자 있는 둥지로 시비를 걸러 찾아왔다가 혼쭐이 나서 도망간 여러 드래곤들과 실비아를 비교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둥지를 뺏으려고 혈안이었지, 어린 자신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인간이랑 드래곤이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아니, 인간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조련사와 관객들은 이렇지 않았다. 실비아가 인간치고는 특히 배려심이 많은 것 같았다. 사실 실비아가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는 블루를 향한 흑심이 90프로 이상 포함돼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블루의 눈에는 실비아가 무척 자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 또….’
그의 심장이 방금 크게 박동했다. 블루는 제 가슴팍을 손으로 가만히 누르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그는 처음부터 실비아를 보자마자 가슴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같이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고, 계속 말 걸고 싶고 옆에 있고 싶고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걸 첫눈에 반한 거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블루는 이런 감정이 처음이었기에 제 가슴이 뛰는 이유를 몰랐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마다 제 감정의 정체를 고민했고, 어느 날 사람들끼리 포옹하며 친구라고 말하는 장면을 봤다.
‘아! 몸을 만지고 싶은 사이를 인간 세계에선 친구라고 하는구나.’
그는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자신이 실비아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거라고 판단했다. 완전히 헛짚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정해 줄 이가 없었다.
실비아는 부드럽게 바라보는 블루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입이 마르고 닳도록 열심히 강연을 하던 실비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블루를 알아챘다. 그녀의 눈에 의심이 가득 어렸다. 손가락이 깨물리지만 않았어도 저 아름다운 외모에 넋을 놓았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저 새끼 또 뭔 짓 하려고 저러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 계속 웃어?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어떤 행동이든 꼭 미리 보고하고 하도록 해.”
『그냥. 네가 나한테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실비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바로 전에 안 좋은 일을 겪은 터라 뇌가 부정적인 쪽으로만 굴러갔다.
‘이 새끼가? 뭐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개고생을 하는데. 남이 고생하는 거 보니까 기분이 째진다고?’
지금은 저 잘생긴 얼굴이 아무리 화사하게 빛난다고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엄지가 그 지경이 되는 경험을 겪고도 잘생긴 얼굴에 넋이 나간다면 정말 갈 때까지 간 것일 터였다. 그녀의 낯빛이 흉흉해지려는 찰나 블루의 얼굴 위로 반투명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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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고되지만 보상이 따르는 법. 그녀는 블루에게 인간의 몸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가르침의 효과로 지력이 2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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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할 틈도 없이 또 한 번 떠오른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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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는 실비아의 자상한 모습에 감격한 것 같다. 블루의 호감이 1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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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이 20 상승했다는 메시지와 동시에 블루의 호감도도 10이 상승했다. 조금 전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껴 있던 실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화창해졌다. 시스템이 실비아의 개고생을 모른 척하지 않고 적절한 보상을 주다니. 웬일로 맘에 들었다.
인간을 잘 몰라서 계속 실수 혹은 살인 시도를 반복하는 블루가 가여워 과외를 했을 뿐인데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이야. 물론 게임 공략을 하려면 무조건 블루를 공략해야 하니 자신이 살기 위해서 설명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미소 지은 채 충동적으로 양팔을 활짝 펼쳤다가 접었다. 금붕어도 아니고 얼마 전의 살인 포옹을 잊고 블루를 껴안을 뻔했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팔을 바짝 붙인 채 손뼉을 잘게 짝짝 쳤다. 혹시나 블루가 껴안으려 하는 순간 밀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영문 모를 행동을 하자 블루가 입가에 웃음을 띤 채 고개를 기울였다.
『왜? 실비아! 갑자기 왜 그렇게 좋아해?』
“응? 아…. 네가 기분 좋다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졌어!”
실비아는 눈을 도로록 굴린 뒤 방금 블루가 한 말을 기억하고 대충 뇌까렸다. 그녀의 말에 단단히 오해한 블루는 양 뺨을 사랑스럽게 붉혔다. 그러곤 대뜸 실비아를 껴안으려 하는 게 아닌가. 다가오는 살인 시도에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 그녀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경고했다.
“너! 좋은 말 할 때 팔 내려.”
『으응? 아….』
매몰차게 포옹을 거부하려던 실비아는 블루의 얼굴에 실망이 어리려고 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하나하나 천천히 가르치면 영 못 쓸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손으로 블루의 팔을 밑으로 내리곤 망설이다가 제 팔을 펼쳤다.
“…손에 힘 빼. 포옹은 내가 할 거니까.”
『응?』
그녀의 말을 잠시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던 블루는 곧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양팔을 펼친 채 블루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 행동도 하지 말고. 힘도 빼고 있어.”
『이렇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돼?』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블루가 팔을 들어 올린다거나 어떤 위험한 시도를 하는 건 아닌지 재차 확인한 뒤, 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 사이로 콩콩거리며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말없이 계속 끌어안고 있자 그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더니 손을 움직이려는 낌새가 보였다. 그는 실비아의 머리 위에 뺨을 비비더니 서서히 손을 올려 그녀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
『부드러워….』
‘어딜!’
실비아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길을 원천 차단했다.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진 블루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붉어진 얼굴에 방심했다간 또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어찌 됐든 무사히 블루와의 포옹을 성공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말이다.
실비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미안. 네가 포옹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같이 끌어안고 싶었어.』
블루는 실비아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예쁘게 벌린 채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실비아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강아지 같아. 내가 귀여운 거에 약한 걸 어째 알고.’
드래곤이라면서 어째 이렇게 순할까? 블루의 뒤에 커다란 꼬리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 같은 환상이 보였다.
『그럼 우리 이제 친구 맞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감색 눈동자 안에 실비아의 모습이 담겼다.
“응?”
『저번에 사람들끼리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둘이 이런 식으로 껴안으면서 ‘친구야!’라고 하던데! 이거 친구끼리 하는 거 아냐?』
블루의 감색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순진해 보이는 질문에 실비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얘를 어쩌면 좋지. 친구라니. 난 너랑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블루를 공략해야 천국으로 갈 세계수 씨앗을 모으건만 큰일이었다. 우리 친구 맞냐고 묻는 순진한 모습을 보니 그녀의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녀는 블루랑 섹스 프렌드가 되어야 했다. 섹스 프렌드도 친구라면 친구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한 실비아가 헛기침을 했다.
“흠, 그래. 일단은 친구라고 치자.”
『좋아, 실비아…. 나랑 친구 해 줘서 고마워.』
블루는 감격한 표정을 짓더니 예고 없이 실비아를 와락 껴안았다. 다행히도 교육의 효과가 좋았는지 압박사 당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릴 쓰다듬었다.
이대로는 어느 세월에 공략을 할 수 있을지 까마득해 보였다. 지력도 하루바삐 올려야 하고, 호감도도 풀로 채워야 했다. 근데 블루가 지금 자신에게 가진 호감도가 이성적 호감이 아니라 우정 같은 거면 어쩌지? 에이, 설마 싶지만 이놈의 망할 게임은 그럴 수도 있었다.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조만간 자료실로 가서 마법진 파훼법이 담긴 책을 찾아봐야겠어. 어떤 책인지 미리 알아 두는 게 좋으니까.’
어느새 시간은 흘러 물개 쇼가 시작됐다. 객석에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실비아는 긴장한 낯빛으로 관람석을 바라봤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쿠아리움의 귀염둥이들을 소개합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찬 조련사가 물개들을 관람객들에게 소개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 후에 나비넥타이를 한 물개들이 주르륵 일렬로 서 관중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블루는 뚱한 표정으로 물개무리들의 구석에 섰다.
실비아는 무대에 오르기 전 조련사에게 블루를 밀착 케어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혼자서 몸뚱이가 파란지라 그를 보러 오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주목을 많이 받는 만큼 튀는 행동을 하면 눈에 띄었기에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실비아는 그가 헛짓거릴 하는 거 아닌가 눈을 빛내며 감시했다. 은근슬쩍 대열을 이탈하려던 블루는 힐끗 실비아를 돌아봤다가 매서운 눈빛에 화들짝 놀라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블루를 감시하던 실비아는 순간 제가 야릇하고 짜릿한 19금 역하렘 게임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웅X 소장이 된 거 같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집에도 일터에도 온통 동물 천지야. 무슨 주(ZOO) 타이쿤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