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아랫입술을 더듬던 엄지는 어느새 두 입술이 겹쳐진 틈새를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그 순간 입술 틈이 살짝 열리더니 따뜻하고 습기 찬 숨이 엄지손톱을 덥혔다. 이상한 느낌에 실비아가 몸을 움찔 떠는 동시에 빨간 혀가 나와 그녀의 손가락을 할짝거렸다.
『손가락에 쿠키 묻었어.』
“응? 아, 어….”
『…손가락이 달콤해. 먹고 싶다.』
…먹고 싶다고? 깜짝 놀란 그녀가 손가락을 떼려고 하는 순간 블루가 그녀의 손을 잡고 한 번 더 혀끝으로 손가락을 핥았다. 마주친 그의 눈빛은 속으로 곧 빨려들어 갈 것처럼 치명적이었다. 얘가 뭘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어 실비아는 혼란에 빠졌다. 이거 대놓고 꼬시는 멘트 아냐? 다용도실에서 한번 역사를 만들어 봐?!
체내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가운데 블루가 결국 실비아의 엄지를 입에 삼켰다. 뜨겁고 촉촉한 감촉에 실비아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아직 이럴 단계는 아닌 거 같은데 블루가 너무 적극적이었다. 손가락을 야릇하게 핥는 혀에 실비아의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블루는 그녀의 엄지를 핥다가 눈만 올려 그녀를 쳐다봤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말캉한 혀가 손가락 끝을 오갔다.
『깨물어도 돼? 깨물고 싶어.』
“응? 그럼. …마음대로 해.”
손가락을 깨물다니, 어우, 얘! 너무 야한 거 아니니? 정말 앙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응?”
이상하게도 손가락이 허전해졌다. 뭐…지? 실비아는 깜짝 놀라서 급히 블루의 입에서 제 손을 빼냈다. 세상에나, 없다. 엄지가 한마디 정도 사라졌다. 시발!
“끄아아악!”
실비아는 쌍욕을 내뱉으려다가 극심한 고통에 비명만 질러 댔다. 그녀는 허전해진 엄지를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 개새끼야!’라고 한껏 외치고 싶었지만, 눈앞이 아득해져 쉽지 않았다. 음흉한 생각만 해서 벌을 받는 걸까. 암울한 음악과 함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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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욕망에 눈이 멀어 블루에게 손가락을 내준 대가는 너무 컸다. 블루는 인간의 손가락이 얼마나 약한지 알지 못했고 깨물어도 된다는 실비아의 허락에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결국 실비아는 블루 때문에 쌍따봉을 하지 못하는 몸이 됐다. 누굴 탓할 수 있을까? 그녀의 어리석음 때문인 것을….]
[배드 엔딩 <쌍따봉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 진입합니다.
- 실비아는 실의에 빠져 남주 공략을 관두고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녀의 나이 방년 83세. 시골 마을에서 그녀는 칭찬에 인색한 할머니라는 평가를 받으며 숨을 거두었다. 쌍따봉을 날릴 수 없기 때문에 의기소침해지는 바람에 얻은 불명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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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사라지며 사위가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마치 경고등이 켜진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최초로 배드 엔딩에 진입했다. 이건 죽지 않으니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엔딩이었다. 그녀는 바닥을 뒹구는 와중에도 인벤토리를 열어 이럴 때 쓸모있는 아이템이 없나 급히 살폈다. 오래전에 혹시 몰라 사둔 <엔딩 회귀권>과 얼마 전 섬에서 얻은 <감쪽같이 연고>가 눈에 띄었다.
뭐를 써야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볼까?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지만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실비아는 이를 악물며 두 아이템을 비교했다. <엔딩 회귀권>은 이런 데 쓰기 살짝 아까웠다. 비밀상점주인 시크릿이 다음에 들를 때는 물건들의 가격이 오를 거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상을 찡그린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멀쩡할 때면 좀 더 곰곰이 비교해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실비아는 <감쪽같이 연고>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으, 좀 더 고민하고 싶지만 더 이상 그럴 정신이 없어. 이러다 내가 죽겠다.’
부들대며 아이템을 터치하자 바닥을 뒹굴던 몸을 새하얗고 눈부신 빛이 감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아이템명 그대로 엄지가 감쪽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아팠냐는 듯 고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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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엔딩 <쌍따봉을 못하는 사람>이 삭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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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를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바닥에 누운 채 이마를 손등으로 짚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가만히 누워 있던 그녀는 주위가 조용하단 걸 알아차렸다.
‘블루 이 새끼 어디 갔어?’
황급히 고개를 든 실비아는 블루가 소파 구석에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쭈? 블루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잘못한 거지? 미안해. 실비아.』
“아, 진짜! 그래. 휴우…. 잘못했지.”
엔딩을 되돌리지 않은 덕에 블루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생각지도 못한 효과가 발생했다. 순간 실비아는 성질을 내려다가 가까스로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참았다. 데드 엔딩 두 번을 겪고도 욕망에 눈이 먼 자신의 잘못이 컸다. 속에서 끌어올린 깊은 한숨을 내쉰 실비아는 블루의 곁에 앉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짧은 강연을 펼쳤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깨물면 보통 사람의 몸은 절단이 된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니?”
『으응…. 정말 미안해.』
실비아의 차분한 설명을 다 들은 블루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심한 짓을 저지른 건지 알아차린 것이다. 실비아는 울컥 튀어나오려는 화를 자제하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단지 귀엽다고 소동물을 만지작거렸다가 그것을 다치게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블루의 본체는 몸집이 집채만 한 블루드래곤이기에, 자신보다 약한 인간의 몸을 잘 몰랐을 것이다.
블루는 혹시나 실비아의 몸을 다시 다치게 할까 걱정됐는지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풍성한 속눈썹이 애처로웠다.
『내가 인간을 잘 몰랐어. 사실 난 해츨링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거든….』
실비아가 인간 몸에 대한 강의를 끝낸 것 같자 블루는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는 태어난 지 백 년밖에 되지 않은 드래곤으로 블루드래곤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닌 외따로 떨어진 둥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주 어릴 때는 부모님이 보살펴 주셨지만, 그 후로 부모님이 유희를 떠나셔서 혼자서 80년 넘게 지냈다고 했다.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블루는 인간이나 다른 생물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블루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자 실비아는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100년 넘는 세월을 산 드래곤과 고작 20년 넘게 산 인간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 없이 홀로 떨어져 지냈다는 것에선 비슷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어.”
실비아는 측은한 눈길로 블루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건 불쌍한 건데, 언제까지고 저런 살인마 5분대기조로 놔둘 순 없었다. 그녀는 다용도실 선반을 뒤적여 조그만 포크를 하나 찾아낸 후, 그것을 한번 물로 깨끗하게 헹군 뒤 블루에게 내밀었다. 진도를 나가는 건 둘째치고, 인간세계에서 블루가 무리 없이 사회를 돌아다니게 하려면 인간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 실습을 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자, 이걸 내 손가락이라고 생각하고 깨물어 봐. 내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알았어.』
블루의 붉은 입술 사이로 디저트용 포크가 들어갔다.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루가 입을 다물었다. 곧 뚝, 하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포크가 쫀드기도 아니고 가뿐하게 찢어졌다. 실비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삼지창이 사라진 포크의 손잡이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멀쩡해진 엄지가 다시 쓰라린 기분이었다.
‘무슨 절단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런 공포의 주둥이에 내 손가락을 넣었다니, 자살행위랑 다를 게 없었구나.’
“아니…. 내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잖아. 이게 뭐야, 어?”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깨물라고 해서 깨물었을 뿐인데.』
실비아가 손잡이만 남은 포크를 흔들며 나무라자 블루가 눈썹을 처량하게 내렸다.
‘이 자식 이거 일부러 아냐? 저번에 바닷가마을에선 성층권으로 날아가긴 했지만, 이 정도 노답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라, 한소리 하려던 실비아는 참을 인을 한 번 더 새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략을 위해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계속 화를 냈다간 블루랑 영영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었다.
‘아직 물개 쇼하려면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여기서 블루랑 얘기 좀 더 하다가 가야겠다.’
심호흡을 내쉬며 화를 참은 실비아는 차근차근 블루에게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를 다시 주지시켰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블루랑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키스하다가 사망, 애무받다가 사망 등 살벌한 데드 엔딩 루트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올 테니까.
실비아는 블루를 옆에 두고 강철 같은 드래곤의 몸과 달리 인간의 몸이 얼마나 푸딩 같은지를 다시 설명했는데, 순간순간 블루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며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문질러야 했다. 생각보다 설명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인 블루가 돌머리는 아닐 텐데, 종족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미처 몰랐다. 데드 엔딩 루트 중에 화병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자상해….’
한편 블루는 꾸준히 제게 인간과 드래곤의 차이를 설명하는 실비아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못 알아듣는 게 답답한지 투덜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